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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식 Jan 01. 2019

<레토>가 우리에게 내리는 축복

영화 <레토>

레토, 그 여름. 레닌그라드를 가득 채운 건, 더운 공기보다 금기였다. 막 날개가 돋은 멜로디는 훠이훠이 날아가려는데, 자유를 경계하는 이념은 기어이 손을 뻗어 길을 막고 나서야 만족한다. 노래의 날개를 뜯고 나면, 자유를 꿈꾼 죄의 처벌이 마무리된다. 그때, 날개 잃은 노래가 택한 방법은 꿈이다. 노래는 꿈을 통해서만 날 수 있다. (그래서일까, 영화 <레토>에서 'If'문법으로 된 상상이 많이 등장한다)



영화 <레토>


1980년대,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을 위시한 냉전의 한기가 아직 없어지지 않았을 무렵. 영화 <레토>가 딛고 선 땅은 그러한 시대 배경이다. 소련(러시아)의 레닌그라드(상트페테크부르크)에서 락 밴드를 하는 마이크(로만 빌릭)는 검열을 통과해야만 공연을 할 수 있다. 관객들과 방방 뛰며 열광적인 공연을 하고 싶지만 앉아있는 청중도, 공연을 하는 마이크도 모두 끌어 오르는 흥을 애써 억누른다. 어느 날, 아내인 나타샤(이리나 스타르셴바움)가 빅토르 최(유태오)에게 마음이 간다는 걸 눈치챈 마이크는 속상해하면서도 둘의 관계를 막아서지 않는다. 때로 기꺼이 자리를 비켜주기도 한다. 빅토르는 처음 ‘가린과 쌍곡선’이라는 밴드로 데뷔한 이후, 마이크의 전폭적인 도움에 힘입어 가수로 급성장한다. 이후, 빅토르는 ‘키노’라는 밴드로 공연을  하고, 그걸 보는 마이크와 나타샤가 흐뭇해하는 쇼트가 나오며 영화 <레토>의 막이 내린다.


시종일관 객석을 흥과 추억으로 가득 채우는 <레토>의 사운드트랙도 훌륭하지만, 유태오와 로만 빌릭, 그리고 이리나 스타르셴바움의 연기 역시도 대단하다. 억압된 시대 속에서 자유로운 음악을 태동시킨두 음악가를 멋지게 소화해냈다. 사람이기보다, 하나의 예술적 뮤즈처럼 보이는 나타샤의 특징을 고스란히 나타낸 이리나 스타르셴바움의 연기도 좋다.



영화 <레토>



레닌그라드에서 마이크는 사람들이 열광하는 뮤지션이다. 빅토르 최가 마이크에게 다가간 것도 인정받는 뮤지션인 그의 눈에 들기 위해서였다. 마이크는 진지하게 자신의 노래를 부르는 빅토르를 흐뭇해한다. 그런데 문제는 생각지 못한 곳에 도사리고 있었다. 아내인 나타샤가 빅토르에게 호감을 느낀다는 것. 급기야 나타샤는 마이크에게 “빅토르와 키스하고 싶어”라는 말까지 서슴없이 한다. 그런데도 마이크는 아연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상할 정도로, 쿨하게 “그러면 키스해”라고 말한다. 그것도 모자라, 빅토르의 공연이 끝나고 그 둘이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스스로 자리를 비켜준다. 그리고, 빅토르가 뮤지션으로 성공할 수 있도록 마이크는 아낌없이 뒤에서 지원해준다. 조금씩 자신의 음악 영역을 구축했던 빅토르는 마이크의 지원을 등에 업고 어느새 레닌그라드에서 가장 유명한 뮤지션이 되었다.


마이크의 콘서트를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밀려들어오는 장면을 영화에서 첫 장면으로 보여줬다면, 영화의 엔딩에 이르러서는 정반대로 빅토르의 공연을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공연장으로 밀려들어온다. 그 자리에서 마이크는 관객의 일부가 되어 공연을 관람한다. 그렇다면, 이건 두 음악가가 교차하는 흥망성쇠를 다룬 영화인 걸까.


영화 <레토>


“당신의 음악은 뉴 웨이브 음악 같아요.” 누군가 빅토르의 음악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마이크와 빅토르의 경계를 구분하는 음악은 바로 이 문장에 있다. 마이크는 펑크 같은 락을 하지만, 빅토르의 락은 그것과는 결을 달리하는 음악이다. 이건 영국에서 1970년대에 시작돼 1980년대에 이르러서 멀리 퍼져나가며 새로운 흐름이라는 ‘뉴 웨이브’ 인데, 이 장르는 일종의 ‘포스트 펑크 락’의 흐름이다. 그러니까, 마이크와 빅토르라는 두 음악가는 당시 교차되는 음악의 흐름을 상징하는 캐릭터라고 볼 수 있다.


한편, 영화 <레토>는 어떤 면에서 단순히 음악영화처럼 보이지 않는다. 영화라는 예술이 어떻게 탄생하는지를 보여주는 ‘메타 영화’적인 특징도 갖고 있다. 처음 마이크 밴드에 관련된 영화를 찍기 위해서 영화 내내 졸졸 따라다니는 줄로 알았던 카메라 기사는 사실 카메라 기사가 아니었다. 녹화된 촬영 필름을 확인하던 자리에서 그는 비밀을 밝힌다. KGB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우연히 카메라를 들었는데,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되었다고. 그 말을 마친 그는 지금까지 녹화된 필름 영상(촬영기술을 알지 못하므로 엉망으로 찍힌)을 튼다. 그 영상엔 바다에서 청춘을 즐기던 마이크 밴드와 빅토르가 있었다. 영상을 보던 밴드의 기타리스트는 영화 안으로 뛰어든다.



영화 <레토>



엔딩에서 키노의 공연을 보여주고 막을 내리는 이 영화는 밴드 ‘키노’의 탄생을 보여주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는데, 키노라는 뜻은 러시아어로 ‘영화’라는 의미다. “지금 찍을 사람은 저 쪽이야” 마이크는 공연을 마친 빅토르에게 기꺼이 주인공의 자리를 내어준다. 카메라 기사가 만드는 영화는 마이크 밴드 이야기가 아니라, ‘키노’(영화)의 이야기였다. 내내 흑백이었던 영화는 카메라 기사가 찍은 필름을 보여줄 때 색을 입혀, 키노를 축복한다.


‘레토’, 여름. 특정 계절을 지칭하는 제목과 달리 흑백인 이 영화에서 그 계절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녹화된 필름은 여름을 담고 있었다. 청춘을 담고 있었고, 바다는 영롱한 푸른빛이었다. 이 영화에서 시대에 짓밟힌 피해자는 없다. 인물을 파국으로 몰아넣는 갈등도 없다. 삶의 가장 뜨거운 시간, 감정이 차오르던 순간 그대로를 고스란히 비춘다. 영화는 그렇게 삶이 되고, 삶은 또다시 영화가 된다.


이것이 영화 <레토>(여름)가 1월 겨울을 통과하는 우리에게 내리는 가장 따뜻한 축복이다.



영화 <레토>는 브런치 무비패스를 통해 관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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