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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식 Dec 22. 2018

나는 정말, 사랑에 빠져본 적이 없는데

영화 <본 투 비 블루>

이 글의 소제목은 전부 <본 투 비 블루>에 나오는 Soundtrack의 소제목입니다. 


영화 <본 투 비 블루>



우울하게 태어났어요 Born to be blue

영화 <본 투 비 블루>는 재즈 트럼페터인 쳇 베이커의 삶의 두 부분을 단면처럼 잘라서 보여준다. 흑백으로 처리된 부분은 1954년 그가 처음 버드랜드에서 재즈 뮤지션으로 데뷔하며 최고의 영광을 누리고 있을 때다. 컬러로 처리된 부분은 밑바닥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아득바득 몸부림치는 1966년대를 다룬다. 영광은 색을 잃었고, 밑바닥에서 허우적대는 현재는 따뜻하게 채색돼있다. (그래서 그 시기가 역설적으로 쳇 베이커의 인생 가운데서 가장 안정된 부분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따뜻한 가사를 품었음에도 처연함이, 서늘한 멜로디 사이로 숨길 수 없는 따뜻함이 기묘하게 뒤섞여 있는 그의 노래는 어쩌면 그의 삶과 예술 사이의 아이러니를 고스란히 담아내는 것 같기도 하다. (제임스 개빈이 쓴 쳇 베이커의 전기에는 ‘악마가 부른 천사의 노래’라는 부제가 달려있다) 영화에서 자세하게 다루진 않지만, 쳇 베이커라는 사람의 삶을 들여다보면 당혹스럽다. 섬세하고 여린 그의 음악은 넉넉한 미소와 수줍은 얼굴을 떠올리게 하지만, 그의 삶은 세상을 향해 핏발 선 두 눈을 가득 부릅뜬 얼굴을 생각나게 한다. 그의 음악을 듣는 사람에게는 부드러운 위로를, 정작 자기 자신에게는 희망을 거세한 채 혹독할 만큼 절망을 향해 달려가는 예술가. 평생 동안 마약을 끊지 못하는 예술가. 우리는 이 예술가를 어떻게 볼 것인가. 



영화 <본 투 비 블루>


영화 <본 투 비 블루>는 예술가의 기묘한 불일치를 다룬다. 사실 쳇 베이커라는 예술가 자체가 우리에게는 딜레마다. 예술가의 삶과 그의 예술이 일치하지 않다고 느낄 때, 대중은 당혹한다. 더욱이 그 사람의 예술을 가슴 깊이 사랑한 사람이라면, 일치하지 않는 그의 삶에 대해 ‘배신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그러나, 쳇 베이커의 삶이 엉망이라고 해서 그가 꺼내놓는 예술 역시도 엉망인 걸까. 그렇다면 그의 음악으로부터 받았던 따스한 위로는 모두 헛것에 불과한 걸까. (이 점에서 영화 <위플래시> 역시 비슷한 예술가의 딜레마를 품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분명 꿈과 예술을 향한 그들의 태도는 비인간적으로 느껴진다. 그런데도 영화의 마지막 그들의 음악에서 말로 표현하지 못할 품위가 느껴지기도 한다) 


스스로를 파멸로 몰아붙이는 그에게, 대중으로부터 비난을 받지 않기 위해서라도 제발 그러지 말라고 말리고 싶지만, 애초부터 ‘난 우울하게 태어났어요’(Born to be blue)라고 말하는 그를 무슨 수로 말릴 수 있을까. 그러니 쳇 베이커를 좋아하게 된다면, 우리 역시 그의 삶과 예술에 대해 불일치한 태도를 갖게 될 것이다.




나의 귀여운 발렌타인 My Funny Valentine

영화 <본 투 비 블루>는 쳇 베이커의 삶을 고스란히 재현한 영화는 아니다. 내내 마르지 않는 사랑을 쳇 베이커에게 주었던 제인(카르멘 에조고)은 실존 인물이 아니다. 그렇다면, 쳇 베이커에게 마르지 않는 사랑을 주었던 제인의 진실된 사랑은 모두 거짓에 불과한 걸까. 


제인이라는 캐릭터는 한 인격일 수도 있지만, 신념, 목표를 인격화한 캐릭터로 보이기도 한다. (쳇 베이커는 그녀에게 이름을 묻자, 제인은 ‘아주카’라는 아프리카 이름을 덧붙인다. 그 뜻은 ‘과거의 영광’이다) 그러니까, 그가 다시 한 인간과 뮤지션으로 일어나게 만든 힘은 ‘과거의 영광’과 나눈 사랑이기도 하다. 생애 처음으로 공연했던 버드랜드에서 받았던 사람들의 환호, 믿기지 않을만큼 자신에게 쏟아졌던 카메라 플래시 세례, 인기와 명성. 삶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이 언제나 과거라는 사실에 인간의 근원적인 비극이 있다.


영화 <본 투 비 블루>


굳이 제인을 ‘과거의 영광’으로 보지 않고, 한 인물로 대한다 하더라도 이 영화는 감동적이다. 그 사랑의 가장 로맨틱한 순간은 캠핑카 안에서 그녀에게 밸브링을 건네며 청혼하는 장면이 아닐까. 아버지가 처음 사준 트럼펫의 밸브링을 건네며, 위태로운 현재라는 시제에서 무구한 미래를 다짐한다. 


“My funny Valentine. sweet comic valentine. You make me smile with my heart” 

나의 귀여운 발렌타인, 달콤하고 귀여운 발렌타인. 당신은 나를 진심으로 미소 짓게 만들어요. 

Stay little Valentine, Stay”

머물러 줘요. 귀여운 발렌타인. 머물러 줘. 


설령 그 다짐이 미래에서 실망으로 확인된다 해도, 지금 이 순간만은. 



사랑에 빠져본 적이 없어요 I’ve never been in love before

다시 찾은 버드랜드. 중요한 공연을 앞두고, 그는 어리석은 선택을 한다. 변한 것처럼 보였던 그의 모습은 일시적이었던 걸까. 그녀와 다짐했던 미래와 약속들은 모두 무슨 의미였던 걸까. 아무리 사랑을 해도, 변하지 않는 그는 구제불능인 인간인 걸까. 영화의 마지막, 그는 다시 서게 된 버드랜드에서 얼굴에 손을 갖다 대며 영화의 마지막 노래를 읊조린다. “I’ve never been in love before” 무언가 본능적으로 직감한 그녀는 더 이상 그를 보지 못하고 그 자리를 떠난다. 그녀는 아마도 그가 마약을 했다는 사실 자체보다, 무력한 사랑의 한계를 발견한 게 아닐까.


처음 그녀와 볼링장에서 데이트를 하며 사랑의 시작을 알렸던 그 노래는, 영화의 마지막에서 작별을 고하는 노래로 바뀐다. 그가 부른 그 노래는 회한이었을까. 자신의 선택에 대한 변명이었을까. 푸르스름한 조명 아래, 희끗한 팔 위로 이미 굳어버린 검붉은 핏자국을 셔츠 안에 숨기고 부르는, 지독하고 처절한 아름다운 그 노래는. 1인분의 인생은 지나치게 냉혹하고, 2인분의 사랑은 과도하게 따뜻하다. 그렇기에 한 인간은 어디 하나 머물러 있지 못하고 둘 사이에서 무망한 진자운동을 벌인다. 


영화 <본 투 비 블루>



I’ve never been in love before. Now all at once it’s you. It’s you forever more. 

난 한 번도 사랑에 빠져본 적이 없어요. 이제는 갑자기 당신이, 당신에게 영원히 (빠져버렸어요)


사랑의 시작은 달콤하고, 끝은 쓰라리다. 이 로맨틱한 노래도 이제, 바뀐 의미로 불러야 한다.


So please forgive 

This helpless haze I’m in 

I’ve really never been in love before.


그러니 용서해줘.

어쩔 수 없이 몽롱함을 껴안은 나를.

나는 정말, 사랑에 빠져본 적이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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