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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식 Dec 17. 2018

괄호 쳐진 진심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



브로크백 산은 비밀을 간직하고 있었다. 나무가 봄에서 여름, 가을에서 겨울로 몸을 바꾸는 동안, 그 산 위엔 언제나 새하얀 눈이 덮어져 있었다. 둘만의 비밀을 덮으려는 것처럼. 떳떳하지 못한 마음을 깨끗이 표백해주려는 듯. 시간이 훌쩍 지나고, 계절이 몸을 뒤집어도 사랑은 그 산 언저리에서 언제까지나 맴을 그리고 있었다.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은 잭 트위스트(제이크 질렌할)와 에니스 델마(히스 레저)의 애달픈 사랑 이야기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머물러 있는 사랑이라는 점에서 <문라이트>가, 서로를 절실히 갈망하는 애달픔에서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이 떠오르기도 한다.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


잭과 에니스는 브로크백 산에서 양 떼를 돌보는 일을 맡게 된다. 양 떼들이 깊은 산에 있으므로 둘은 오랜 시간 동안 산에 머물며 임무를 수행한다. 그러다 서로에게 자기 자신조차 이해하기 어려운 감정을 서서히 느끼게 된다.


"누군가에게 알려지면 우린 정말 끝이야." 자신의 인생 전체를 기꺼이 사랑에 던지려 했던 잭과 달리, 에니스는 종종 몸을 사리곤 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에니스의 사랑이 잭보다 못한 것은 아니었다. 에니스에게 그 사랑은 목숨을 담보로 하는 종류의 것이었으니까. 잭은 둘만의 목장을 꾸려 단란하게 살고 싶어 했지만, 에니스는 미덥잖게 반응한다. (어린 시절, 에니스가 겪은 비극적인 일을 떠올려보면 미덥잖은 에니스의 반응의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니까, 에니스에게 그 사랑은 둘만의 내밀한 감정만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


영화의 설정을 보면, 둘의 사랑이 얼마나 안타깝고 위태로웠는지 더 절실하게 다가온다. 영화의 배경인 와이오밍 주는 미국 서부 개척시대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당시 그곳에서는 카우보이를 동경하는 ‘남성문화’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곳 ‘남성문화’가 여성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봤는지는 축제 자리에서 에니스와 다투게 된 ‘카우보이’ 두 명의 대사를 떠올리면 알 수 있다) 잭과 에니스의 사랑은 그런 끔찍한 편견과 시대 분위기의 토양 위에 발을 딛고 있었다. 또한 에니스는 기독교 배경을 갖고 있다는 설정이 나온다. 이 점에서 에니스가 그동안 동성애를 어떤 시각으로 생각했을지를 짐작하게 만든다. (잭과 사랑에 빠지기 바로 직전, 에니스가 ‘난 죄 지을 기회가 없었어’라고 말한 부분은 여러모로 인상 깊다) 


사회, 통념, 문화, 돈, 가족. 사랑을 입 밖으로 표현하고 싶어도 자꾸만 삼키게 만드는 것. 오갈 데 없는 사랑은 어디에 발을 편히 뻗어 쉴까. 그때 둘은 브로크백으로 향한다. 그들의 사랑을 허락해준 유일한 곳으로. (브로크백에서 둘이 알몸으로 수영하는 쇼트는 그곳에서 그들이 얼마나 자유로운지를 보여주는 것 같다) 브로크백이 그들을 가장 아름답게 만들어주는 공간이라고 한다면, 산에서 내려오는 것은 다시 사회 통념 속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그들은 사랑을 나눌 때 브로크백으로 향하고, 산에서 내려와서는 다시 사회적 위치를 수행한다.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인물들의 진심은 모두 괄호 쳐져있다는 점도 인상 깊다. 에니스의 전처였던 알마는 잭과 에니스의 관계를 눈치챘지만, 끝까지 그 사실을 입 밖으로 내지 않는다. 그건 잭의 부인이었던 루린 역시 마찬가지다. (영화 상으로 분명히 나오진 않지만) 그녀 역시 잭과 에니스의 관계를 이미 알고 있던 것처럼 보여준다. 에니스의 딸인 알마 주니어 역시 마찬가지다. (잭이 에니스의 이혼을 축하하러 단숨에 달려왔을 때, 그 자리에 그 딸이 있었다) 결국, 모두는 둘의 비밀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비밀을 추궁함으로써 잭과 에니스를 산란하게 만들지 않았다. 그런 면에서 생각한다면, 전처였던 알마도, 잭의 부인인 루린도, 알마 주니어도 모두 에니스와 잭에 대한 사랑이 진심에 가깝지 않았을까. (이 점에서 이안 감독의 따뜻한 시선이 느껴진다) 


딸은 결혼하겠다는 말과 함께 겉옷을 에니스의 집에 남겼다. 에니스는 딸의 옷을 개어 옷장에 넣으려 문을 열었다. 그곳엔 피 묻은 잭의 셔츠와 에니스의 셔츠가 겹쳐져 있었다. (이전에 잭의 집에서는 에니스의 셔츠가 안에 있었고, 그것을 잭의 셔츠가 감싸고 있었다) 그 옷에는 편견과 세월을 견뎌낸 둘의 단단한 사랑이 배어있었다. 결국 사랑을 증명하는 건 입 밖으로 꺼내놓는 말이 아니었다. 침묵이, 함께 견뎌온 시간이, 그 피 묻은 셔츠가, 딸의 옷이, 반송된 편지와 물 묻지 않고 멀쩡한 낚시대가, 그리고 브로크백이 사랑을 증명한다.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



그렇기 때문에, 에니스의 진심 역시 괄호 쳐져야 한다. 잭의 셔츠를 보며 고요히 눈물 흘리는 에니스는 나직이 되뇐다. “잭, 맹세해…” 아마, 우리는 이다음 나올 에니스의 대사가 무엇일지 영원히 알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영원히 속에서 맴을 그리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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