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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찌옹수 Nov 28. 2019

욕망은 부정적인가? [라캉]

"나는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


지금까지 부정적으로 억압되어왔던 욕망 개념을 사유하는 데 가장 중요한 첫 번째 통로는 프로이트가 정초했던 정신분석학이라고 할 수 있다. 프로이트는 투명하고 이성적이라고 이해되어온 인간 정신의 이면에 무의식으로 요약되는 욕망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밝혔다. 사실 이것만으로도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은 혁명적인 함의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프로이트의 말대로 인간의 정신이 무의식적 욕망에서 분리될 수 없는 것이라면, 순수한 이성과 정신을 추구했던 과거 동서양 사유 전통의 꿈은 불가능한 것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정신분석학이 어떻게 욕망을 사유했는지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라캉 Jacques Lacan (1901~1981)의 정신분석학적 통찰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라캉을 통해서 정신분석학은 욕망에 대한 명확한 이론화에 성공한다. 그런데 욕망과 관련된 라캉의 사유를 살펴보기에 앞서 코제브 Alexandre Kojève (1902~1968)의 다음 이야기를 먼저 살펴보고자 한다. 코제브의 욕망이론만큼 라캉의 사유에 강한 영향을 미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욕망은 오직 다음과 같은 조건에서만 인간적일 수 있다. 우리가 타자의 육체를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욕망을 욕망할 때에만, …… 다시 말해 만일 우리가 타자가 인간 개체로서의 우리의 존재를 그리고 우리 자신의 인간적 가치를 '욕망하거나, ' '사랑하거나', 혹은 '인정하기'를 원할 때에만 말이다. 마찬가지로 자연적 대상에 대한 우리의 욕망도 단지 다음과 같은 조건에서만 인간적일 수 있다. 우리의 욕망이 동일한 대상에 대한 타자의 욕망에 의해 매개된다면 말이다. 타자가 욕망하기 때문에 우리는 타자가 욕망하는 것을 욕망한다. 이것은 인간적인 것이다.
≪ 헤겔 독해 입문 Introduction to the Reading of Hegel≫


코제브는 인간의 욕망이 기본적으로 타자의 욕망일 때에만 인간적일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이어서 그는 인간의 욕망을 타자에 대한 것과, 대상에 대한 것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타자에 대한 우리의 욕망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바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랑에 빠진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이 사랑하는 타자의 육체를 통해 성적인 만족을 얻는 것이 아니라, 그 타자로부터 자신이 사랑받으려는 데 있다. 그러니까 사랑에 빠진 사람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상대방이 자신을 사랑해주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우리에게 타자는 충분히 매력적이고 사랑스러워야만 한다. 오직 이런 타자만 우리를 욕망하고 사랑하고 인정할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해 가난한 사람, 비천한 사람, 혹은 추한 사람의 욕망을 우리는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코제브는 자연적 대상에 대한 욕망도 분석하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은 돈, 권력, 미모, 명예를 욕망한다. 코제브는 우리가 그런 대상들을 욕망하는 이유는 타자들이 그것을 욕망하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 사실 이것은 경험적으로도 쉽게 확인된다. 상당히 지적인 것처럼 보이는 어떤 사람이 서점의 서가에서 어떤 책을 뽑았다고 하자. 혹은 상당히 매력적인 사람이 백화점에서 옷을 몸에 걸치면서 살펴보고 있다고 하자. 어느 경우든 그 타자가 자리를 떠나자마자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그 사람이 뽑은 책을 살펴보거나 혹은 앞의 살마이 걸친 옷을 자신의 몸에 대볼 수도 있을 것이다. 무의식적으로도 우리는 모두 타자가 욕망하는 대상을 스스로 욕망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인간의 모든 욕망에는 타자의 욕망이 개입되어 있다는 것, 이것이 바로 욕망에 대한 코제브의 근본적인 통찰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욕망에 대한 라캉의 입장을 해명하는 관건이 되기도 했다.


문제는 주체는 타자가 아니라는 데 있다. 이것은 우리에게 심각한 균열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걸 말해준다. 타자의 욕망을 자신의 욕망이라고 우리가 생각한다고 할지라도, 우리에게는 우리만의 고유한 욕망이 존재할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바로 이런 불행한 균열을 사유했기에, 라캉은 코제브를 넘어서게 된다고 할 수 있다.


만일 욕망이 누군가를 겁쟁이로 만든다면, 욕망, 혹은 욕망이라고 불리는 것은 삶을 무의미하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법이 진정으로 현존할 때, 욕망은 일어서지 못한다. 그렇지만 이것은 법과 억압된 욕망이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정확히 프로이트가 발견했던 것이다.
≪에크리 Écrits≫


타자의 욕망, 혹은 어머니로 대변되는 사회의 욕망은 우리에게 해서는 안 될 것, 혹은 해야만 할 것을 규정한다. 그러니 타자의 욕망을 우리는 '법'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처음에는 타자의 욕망이라는 이질감 때문에 우리는 저항할 수도 있다. 당연히 타자는 자신의 욕망을 관철하기 위해 물리력을 행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저항에도 불구하고 불행히도 '법', 혹은 타자의 욕망은 우리 내면에 자리를 잡게 된다. 이것이 바로 프로이트가 말한 '초자아'다. 아이러니한 것은 초자아로 타자의 욕망을 수용한 순간, 주체는 지금까지 물리력의 충동을 초래했던 저항을 괜히 했다는 느낌마저도 든다. 이제 세상과는 별다른 갈등 없이 편안하게 지낼 수 있으니 말이다. 물론 이런 상태는 주체가 자신만의 욕망을 철저하게 억압했기 때문에 가능한 법이다. 그런 살아 있는 한, 어떻게 주체가 자신의 욕망을 제거할 수 있다는 말인가? 비록 억압할 수는 있지만, 주체는 결코 자신의 욕망을 제거할 수는 없다.


억압된 욕망이 억압을 뚫고 주체에게 돌아올 때가 있다. 1896년 초기 <논문 방어 신경증에 대한 또 다른 고찰 Weitere Bemerkungen über die Abwehr-Neuropsychosen>에서부터 프로이트가 가장 많이 사용했던 "억압된 것의 회귀"라고 불리던 현상이다. 눌린 용수철이 어느 순간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튕겨 나오는 것과 같다. 바로 이 억압된 욕망이 주체에게 의식될 때, 주체는 갈림길에 서게 된다. 자신의 욕망을 관철시키지 못하면, 주체는 겁쟁이가 될 테니까 말이다. 겁쟁이에게 자신의 삶은 라캉의 말처럼 "무의미한" 것이 된다. 두려움 때문에 자신의 삶을 살지 못하고 타인이 원하는 대로 사는 삶에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억압된 욕망이 억압에서 풀려났다는 것 자체가 초자아, 혹은 '법'의 지배가 느슨해졌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사실 겁쟁이의 단계는 자신의 욕망을 되찾기 위한 작은 실마리이기도 하다는 점도 중요하다. 바로 이것이 라캉이 프로이트를 이어 정신분석학의 과제로 설정한 것이기도 하다. 라캉은 말한다.


세상에 태어날 때 주체는 타자로부터 욕망되는 자로 서건 아니면 욕망되지 않는 자로 서건 간에 타자의 욕망의 대상으로 존재한다. 자신이 욕망하는 것이 진실로 자신이 소망하는 것인지 혹은 소망하지 않는 것인지를 알기 위해서, 주체는 다시 태어날 수 있어야만 한다. 정신분석의 방법을 고안함으로써 프로이트가 밝힌 진리의 본성은 바로 이런 것이었다. ≪에크리≫


프로이트도 마찬가지지만 라캉의 정신분석학은 한 가지 전제에서 출발한다. 그것은 인간이 기본적으로 미숙아로 이 세상에 태어난다는 사실이다. 인간이 독립적인 생활이 가능해질 때까지 주변의 애정과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아프리카 초식동물의 경우 태어난 지 한두 시간 안에 혼자 걸을 수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 걸어야만 한다. 자신이 태어난 곳을 빨리 벗어나지 않으면 피 냄새를 맡은 육식동물들이 몰려들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인간의 경우 갓난아이는 1년이 되어서야 간신히 걸을 수 있다. 물론 그것도 위험에서 벗어날 정도의 걸음마는 결코 아니다. 몇 년의 긴 시간이 더 지나야 비로소 위험에서 스스로 피할 수 있을 정도가 된다. 이처럼 타자의 사랑과 보살핌이 없다면, 인간은 결코 생존을 기약할 수 없는 나약하고 취약한, 다시 말해 매우 결핍된 존재라고 불 수 있을 것이다. 이 때문에 인간이 타자에게서 지속적인 사랑을 받아야 한다는 점은 단순한 선택 사항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필수 조건이라는 걸 알 수 있다.


갓난아이에게 최초의 타자는 곧 어머니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최초의 타자가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일 필요는 전혀 없다. 중요한 것은 최초의 타자가 자신을 지속적으로 돌봐주느냐의 여부이기 때문이다. 타자에게서 지속적인 사랑을 받기 위해서 갓난아이는 자신을 돌보는 타자가 자신에게서 욕망하는 것을 행하려고 한다. 예를 들어 어머니가 자신이 김치를 먹는 것을 좋아한다면, 갓난아이는 김치에 대한 자신의 불쾌감을 무릅쓰고 그것을 먹으려고 한다. 비록 괴롭긴 하지만 김치를 먹었을 때 어머니가 자신을 사랑스럽게 생각할 것이라는 점을 갓난아이는 직감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어머니가 아주 느끼한 파스타를 좋아했던 경우라도 마찬가지의 결과가 나올 것이다. 이 아이는 어머니에게 지속적인 사랑을 얻기 위해서 파스타를 기꺼이 먹을 테니까 말이다.


어른이 되었을 때, 인간은 자신이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는 사실을 쉽게 망각하게 된다. 그래서 자신이 원하는 음식은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 원하는 것이라고 믿게 된다. 하지만 김치찌개나 파스타를 먹고 싶어 하는 자신의 욕망은 사실 어머니의 욕망을 반복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타인의 욕망에 입각해서 욕망하는 것은 어떤 문제도 일으키지 않을 수 있다. 그렇다고 안심할 수는 없다. 불행은 언제든 찾아오기 마련이다. 본인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 그러니까 어머니의 욕망을 수용하느라고 억압되었던 자신의 욕망이 분출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모와 자식 간의 대립 혹은 갈등은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결국 어머니의 욕망은 어머니의 것이지 우리의 것은 아니다. 언젠가 우리는 진정한 주체로서 다시 태어나는 선택의 갈림길에 놓이게 될 것이다. 타자의 욕망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을 회복할 수 있다면 결국 진정한 주체가 되는 것도 가능해질 것이다. 라캉의 말대로 "자신이 욕망하는 것이 진실로 자신이 소망하는 것인지 혹은 소망하지 않는 것인지를 알기 위해서, 주체는 다시 태어날 수 있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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