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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찌옹수 Dec 03. 2019

욕망은 부정적인가? [들뢰즈]

"욕망은 새로운 관계를 만들려는 힘이다."


욕망과 관련된 라캉의 공헌은 이중적이다. 우선 그는 욕망이 인간의 삶과 사유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다는 점을 밝혔다. 이 점에서 그는 욕망을 금기시해왔던 서양 전통에서 멀리 벗어나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인간의 욕망을 결여와 결핍에서 설명하려고 시도했다. 그래서 그가 설명하고 있는 욕망 개념에는 결여와 결핍이라는 이미지, 즉 부정적인 이미지가 여전히 남아 있게 된 것이다. 들뢰즈라는 철학자가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는 욕망의 중요성을 긍정하면서, 동시에 라캉의 욕망 개념에 남아 있는 부정적 이미지를 극복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욕망에 대한 들뢰즈의 입장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생성 개념과 관련된 들뢰즈의 존재론을 간단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생성이란 개념은 창조라는 개념과 구별되어야만 한다. 기독교의 우주론이 시사하는 것처럼 창조가 '무에서 유가 발생하는' 것을 의미한다면, 들뢰즈가 말한 생성은 '유에서 유가 발생하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과정과 실재 Process and Reality≫에서 화이트헤드는 '이접적 다양성 disjunctive diversity'이 '연접적으로 conjunctively' 결합되는 것이 창조성이라고 이야기했다. 화이트헤드의 이런 생각은 들뢰즈를 이해하는데 일말의 단서가 된다. 들뢰즈에게서도 생성은 이접적인 것들이 연접적으로 연결되어 새로운 배치, 즉 아장스망 agencement을 구성하는 것으로 사유되고 있기 때문이다.


아장스망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양한 이질적인 항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나이 차이, 성별 차이, 신분 차이, 즉 차이나는 본성들을 가로질러서 그것들 사이에 연결이나 관계를 구성하는 다중체 multiplicité이다. 따라서 아장스망은 함께 작동되는 단위이다. 그것은 공생이며 공감이다.
≪대화 Dialogues≫


낡은 자동차가 있다고 해보자. 그리고 달리기를 잘하는 사람도 있다. 거친 도로도 있다. 이런 조건이 바로 '이접적 다양성'의 사례라고 하겠다. 그냥 A '또는' B '또는' C와 같이 서로 무관계한 방식으로, 혹은 이접적인 방식으로 병존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사람이 낡은 자동차를 타고 거친 도로를 몇 년에 걸쳐 아주 반복적으로 주행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우선 달리기를 잘하는 이 사람의 경우 달리기를 통해 만들어졌던 기존의 근육이 사라지고 클러치와 브레이크를 밟는 근육이 발달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울퉁불퉁한 노면 때문에 허리나 목의 뼈 구조도 조금씩 달라졌을 수 있다. 이것은 낡은 자동차, 거친 도로가 이 사람을 중심으로 '연접적으로' 결합된 결과이다. 그는 이제 정확히 표현하면, '인간 그리고 낡은 자동차 그리고 거친 도로'라고 불릴 수 있는 방식으로 새롭게 생성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들뢰즈가 말한 생성을 의미한다. 생성과 과정 속에서 새로운 배치, 즉 '아장스망'이 실현된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낡은 자동차로 거친 도로를 주행했던 그에게는 낡은 자동차와 거친 도로의 흔적이 마치 주름처럼 잡혀 있다는 점이다. 들뢰즈가 아장스망을 '다중체'라고 이야기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많은 multi 주름 pli이 새롭게 생성된 개체에 각인되어 잠재되어 있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했던 것이다. 새로운 주름, 혹은 새로운 배치가 그에게만 벌어지는 현상은 아니다. 낡은 자동차도 거친 도로도 그와 마찬가지로 다르게 생성될 것이기 때문이다. 낡은 자동차도 달리기를 잘하는 사람과 거친 도로에 적합하게 새로운 주름을 만들었을 것이고, 거친 도로도 낡은 자동차와 달리기를 잘하는 사람에게 맞게끔 새로운 주름을 만들었을 테니까 말이다. 이제 우리는 들뢰즈의 욕망 개념을 분석할 준비가 되었다. 아장스망과 다중체라는 개념으로 정립된 들뢰즈의 생성 개념을 염두에 두면서 들뢰즈의 다음 이야기를 읽어보도록 하자.


현실적인 욕망의 수동적인 종합 passive synthesis의 결과적인 산물이다. 여기서 욕망이란 무의식의 자기 생산을 말한다. 욕망은 어떤 것도 결여하고 있지 않다. 다시 말해 욕망은 자신의 대상을 결여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욕망에 결여되어 있는 것은 오히려 주체이다. 혹은 욕망은 고정된 주체를 결여하고 있다. 억압이 없다면 고정된 주체는 존재할 수 없다. 욕망과 그 대상은 동일한 것, 즉 기계의 기계로서 존재하는 기계이다. 욕망은 기계이며, 욕망의 대상 역시 그것에 연결된 또 다른 기계이다.
≪안티 오이디푸스 L'anti Oedipe≫


방금 읽은 구절에서 '기계'라는 낯선 개념은 '아장스망'이나 '다중체'와 마찬가지로 '연접적으로 종합되면서 생성된 개체'를 가리키고 있다. 들뢰즈에게 기계 machine도 기본적으로는 '연결 connection' 작용을 통해서 새로운 것으로 생성되는 기능을 나타내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들뢰즈는 우리가 가진 욕망을 '수동적 종합'의 힘이라고 이야기한다. 여기서 '수동적'이라는 말이 우리가 만나는 타자가 '우발적인 마주침'의 대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면, '종합'이란 말은 우발적으로 마주친 타자에 맞게 역동적으로 자신을 변형시킨다는 것을 강조하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들뢰즈에게 우리의 욕망은 새로운 타자와 마주쳐서 그것과 연결하려는 긍정적인 힘, 다시 말해 새로운 연결 관계를 만들려는 생산적인 힘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이 경우 추구하는 새로운 대상, 그리고 동시에 새로운 주체도 출현시키게 될 것이다. 따라서 주체나 대상이 먼저 있고 난 뒤 연결이 이루어지는 것이 결코 아니라, 새로운 연결이 발생하면서 비로소 주체나 대상이 사후적으로 출현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어머니는 다양한 이유를 들어 젖 물기를 포기할 수 있다. 젖이 아파서일 수도 있고, 젖이 나오지 않아서일 수도 있고, 아니면 이유식을 먹이려는 목적에서 일 수도 있다. 어머니의 젖꼭지와 연결 관계를 계속 유지하려는 아이에게 젖꼭지를 물리지 않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이때 아이는 젖꼭지를 욕망하는 주체로, 그리고 젖꼭지는 그가 욕망하는 대상을 고착될 것이다. 이 때문에 갓난아이들은 인공 젖꼭지를 물거나 혹은 손가락을 빨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어떤 특정한 억압이 일어나면, 새로운 연결 관계를 추구하려는 욕망이 왜곡되어버린다. 다시 말해 사회가 특정한 연결 관계만을 계속 고수하려고 하면, 욕망은 기존에 만들어진 특정한 주체의 욕망으로 축소되고 만다. 이렇게 탄생된 고정된 주체는 고정된 대상에 대해서만 연결 관계를 유지하려고 할 뿐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억압이 일어나는 경우에만 고정된 주체가 결여 혹은 결핍을 경험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고 만약 갓난아이가 젖꼭지와의 연결 관계에서 다른 것과의 연결 관계로 자연스럽게 이행하도록 내버려 두면, 이 아이의 욕망은 결여나 결핍의 상태가 아니라 생산적 productive이고 긍정적 positive인 욕망, 다시 말해 새로운 연결을 도모하려는 순수한 힘의 상태에 머물게 될 것이다. 이처럼 욕망이 결여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새로움을 찾아서 끝없이 움직이고 변화한다고 보는 것, 이것이 바로 들뢰즈가 욕망을 새롭게 이해하는 방식이었다.


배가 고프면 식욕을 느낀다. 이것이 욕망을 이해하는 전형적인 방식이다. 라캉은 바로 이 결여의 모델에 따라 욕망을 사유한다. 미숙아로, 다시 말해 결여의 존재로 태어났기 때문에 주위의 보살핌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사실을 언급하면서 말이다. 결여의 모델에 따르면 결여만 충족되면 욕망은 발생할 이유가 없게 된다. 이런 경우 욕망은 결여의 상태에서 충족을 지향하는 일시적인 작용으로 이해될 뿐이다. 반면 들뢰즈에게 욕망은 결여가 아니라 충만으로 사유된다. 욕망은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역량, 혹은 외부의 타자와 접촉함으로써 새로운 삶의 모습을 창조하려는 근본적인 동력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정신적 멘토 스피노자니체가 생각나는 대목이다. 스피노자가 인간의 본질을 원천적인 욕망 '코나투스'로 정의했다면, 마찬가지로 니체도 '힘에의 의지'가 인간의 본질이라고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결국 욕망은 결여를 느낀 주체가 결여를 충족시키려는 욕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 되었다.


오히려 들뢰즈는 주체를 탄생시키는 것이 욕망의 좌절이라고까지 이야기한다. 주체는 접촉과 연결을 지향하는 욕망이 방해될 때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들뢰즈에게 주체란 태생적으로 부정적인 것일 수밖에 없었던 셈이다. 자전거와 연결되어 자전거의 리듬과 육체의 리듬을 결합시키고 있을 때, 우리는 즐거움을 느낀다. 만약 이 순간 누군가가 자전거를 빼앗는다면 과연 어떻게 될까? 이때 자전거를 온몸으로 지키려고 하는 특정한 주체가 발생하게 될 것이다. 금기를 통해 욕망의 주체가 탄생한다바타유의 생각, 혹은 호명을 통해서 주체가 구성된다푸코의 경고가 상호 교차되는 순간이다. 들뢰즈에게 주체란 둥그런 용기를 빼앗긴 둥근 얼음과도 같다. 얼음은 자신이 만들어졌던 둥근 용기를 동경한다. 둥근 용기에 담길 때에만 편안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욕망은 둥근 용기에서 얼기 이전의 유동적인 물과도 같다. 마주치는 용기가 무엇이든지 간에 물은 그 용기의 모양에 따라 달라지지만, 그렇다고 해서 결코 자신의 유동성을 상실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런 유동적이고 생산적인 욕망을 회복하는 것! 이것이 바로 들뢰즈가 우리에게 요청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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