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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찌옹수 Nov 27. 2019

욕망은 부정적인가?

욕망이란 개념의 저주가 풀릴 때까지


지금까지 대개의 경우 욕망이란 매우 부정적인 것으로, 혹은 심지어 저주받은 개념으로까지 사용되기도 했다. 보통 욕망은 식욕과 같이 생명체의 이기적인 욕구와 관련된 것으로 이해되거나 아니면 성욕과 같이 윤리적으로 위험한 욕구로 간주돼왔던 것이다. 이런 이유로 사실 서양의 정신을 지배해온 그리스 철학 전통과 기독교에서도 욕망이란 기본적으로 억제되어야 할 것으로 사유되었다. 욕망에 대한 이런 부정적 견해는 정신과 육체, 혹은 신과 피조물이라는 두 가지 이원론 틀에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보통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서양 철학에서 인간은 이성을 가진 동물로 규정되었다. 다시 말해 인간이 동물과 다른 본질적인 이유는 인간만이 가진 이성 때문이라고 본 것이다. 여기서 순수한 이성만을 가진 존재 (=신), 이성과 동물성이 섞여 있는 존재 (=인간), 그리고 마지막으로 순수하게 동물성만을 가진 존재 (=동물들)에 대한 추론 역시 가능해졌다.


서양 사유의 전통에서 볼 때 인간은 신이 될 수도 있고 동물로 전락할 수도 있는 분열적인 존재로 이해되었다. 인간이 신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은 인간에게 이성과 같은 정신적 요소가 있기 때문이다. 반면 다른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육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인간은 단순한 동물처럼 생존할 수도 있다. 물론 인간이 동물적인 욕망에 사로잡히게 된 이유는 그가 자신이 가진 정신적 능력을 방기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욕망에 대한 이런 사유 경향은 서양뿐만 아니라 동양 사유 전통에서도 그대로 반복되고 있다는 점이다. 불교에서는 탐욕貪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설정했으며, 아울러 유학절욕節慾이나 과욕寡慾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보면 "마음을 기르는 데는 욕망을 적게 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 養心莫善於寡欲"라고 강조했던 맹자 이야기가 가장 적절한 사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성과 욕망, 혹은 정신과 육체라는 이분법에서 이성과 정신의 측면만을 중시하려는 경향이 동서양의 사유 전통에서 동일하게 등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빈약한 생산력에서 그 중요한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생산력이 매우 저조할 때, 인간이 공동생활의 규범으로 채택할 수 있는 것은 금욕이나 절욕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때도 지배층은 자신의 욕망을 마음껏 충족시켰지만 말이다. 사실 18, 19세기 이후 서양에서 비로소 욕망을 긍정적으로 응시하려는 움직임이 발생하게 된 것도 이 점에서 볼 때 우연만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18세기 이후 산업자본주의의 급격한 발달로 서양 사회는 폭발적인 생산력의 시대로 들어서게 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20세기 후반 서양 사회가 보드리야르의 말처럼 소비사회로 본격 진입하면서부터, 욕망은 이제 인간에게 사장 소중한 가치로까지 격상하게 된다. 물론 이것은 인간의 욕망을 증폭시킴으로써 자신의 상품을 판매하려는 산업자본의 무의식적인 동기 때문에 가능했던 결과였지만 말이다. 그래서 보드리야르의 다음 통찰은 우리를 두렵게 만들 수도 있다.


지출, 향유, 무계산적인 구매('사는 것은 지금, 지불은 나중에')라고 하는 주제가 절약, 노동, 유산이라는 기존의 '청교도적'인 주제들을 대체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대체는 외관상으로만 인간의 혁명일 뿐이다. …… 소비자의 욕구와 그 충족은 오늘날에는 다른 생산력(노동력 등)과 마찬가지로 강요되고 합리화된 생산력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소비의 사회≫


철학적으로 볼 때 20세기 후반부터 공동체보다는 개인을, 이성보다는 감성을, 정신보다는 몸을, 동일성보다는 차이를, 그리고 정착민보다는 유목민을 강조하는 지적인 경향이 더 강하게 대두했다. 흔히 이러한 일련의 경향들을 포스트모더니즘 postmodernism이나 해체주의 deconstructionism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런 새로운 사유 경향은 기존의 낡고 억압적인 사유를 극복하면서 개인의 자유와 해방을 도모하려고 했다. 따라서 이 같은 사상적 흐름은 분명 인문학적으로 볼 때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데리다 Jacques Derrida (19030~2004)들뢰즈 GIlles Deleuze (1925~1995)의 철학에 열광하게 된 것인지로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이 대목에서 보드리야르의 차가운 진단을 잊어버려서는 안 된다.


산업자본의 입장에서 볼 때 공동체적 소비보다 파편화된 개인적인 소비가 더 많은 잉여가치를 남기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심지어 산업자본은 다양한 광고 전략을 통해 하나의 개인마저도 다양한 소비 주체들로 분열시키기까지 한다. 엄마로서 소비해야 할 때가 있고, 직장 여성으로서 소비해야 할 때도 있다. 이처럼 어떤 개인이 상품들에 대해 다양한 각도에서 서로 상이한 취향과 관심을 가지면 가질수록, 산업자본은 통일된 한 개인의 경우에서보다 더 많은 잉여가치를 얻을 수 있다. 그래서 보드리야르는 이렇게 경고하고 있다. 산업자본이 개인적 욕망과 그 충족의 자유를 선전하는 것은 인간의 자유와 해방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자기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라고 말이다. 매우 두려운 일이 아닌가? 모든 억압적인 중심을 공격해서 삶을 해방시키려고 했던 인간의 사상적 노력마저도, 자본주의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 이토록 적절히 활용하고 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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