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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찌옹수 Nov 22. 2019

사랑은 하나가 되는 것인가? <고찰>

사랑의 철학 혹은 철학의 사랑


1991년 가타리와 함께 들뢰즈는 ≪철학이란 무엇인가 Qu'est-ce que la philosophie≫라는 책을 출간한다.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낮이 지나 밤이 되서야 운다는 헤겔의 말이 맞기는 맞나 보다. 가장 왕성했던 삶을 보내고 60세가 넘어서야 '철학이란 무엇인지'를 이야기하려고 했으니 말이다. 얼핏 파안대소가 일어나는 지점이다. "그런데 들뢰즈 선생님, 선생님은 지금까지 철학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그렇게 많은 철학책들을 써왔던 건가요?" 그렇지만 ≪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들뢰즈는 친절한 철학 입문서를 우리에게 제공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책에서 들뢰즈가 하고 싶었던 것은 에필로그, 즉 결론 부분을 집필하는 것이었다. 결국 그가 1991년까지 출간했던 수많은 철학책들은 본문의 챕터들이었던 셈이다.


어쨌든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다음과 같은 들뢰즈의 말이다. "우리의 시대는 의사소통의 시대다. 그렇지만 작은 논의나, 토론회 혹은 간단한 대화마저 제안될 때마다, 모든 고귀한 영혼은 잽싸게 달아나가거나 어쩔 수 없다면 꼬물꼬물 자리를 피하려고 할 것이다." 그가 얼마나 제도권 대학의 철학과에서 이루어진 토론과 논쟁 등등을 싫어했는지를 알 수 있는 글귀다. 여기서 우리는 직감한다. 들뢰즈에게 철학은 토론이나 논쟁 등등 의사소통 communication과는 무관한 것이다. 아마 대부분의 제도권 철학자들, 즉 철학 교수나 철학 강사들은 들뢰즈의 철학관에 당혹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학부나 대학원에서 이루어지는 철학 수업이나 석사나 박사 학위 논문 심사를 할 때 그들은 의사소통이 가장 우선하는 핵심이라고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들이 수업하고 있거나 논문을 심사하고 있는 주제가 들뢰즈 철학이라면, 정말 웃기는 풍경이 펼쳐지고 있는 셈이다.


설마 나이가 들어 들뢰즈라는 철학자가 노망에 든 것일까? 아니다. 이것은 단지 1964년에 출간된 ≪프후스트와 기호들 Proust et les Signes≫에서 그의 고뇌와 숙고를 요약한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프루스트는 우정과 철학, 그리고 사랑과 예술이란 커플을 구분했던 적이 있다. 당연히 탁월한 소설가로서 프루스트 Marcel Proust (1871~1922)는 사랑과 예술이란 커플의 우월성을 긍정한다. ≪프루스트와 기호들≫에서 들뢰즈는 말한다.


"지성이 지향하는 사물, 기획, 가치 역시 다양하다. 지성은 우리를 '대화'로 향하게 한다. 대화를 통해서 우리는 관념들을 교환하고 전달한다. 지성은 우리에게 '우정'을 고취시키는데 우정이란 관념과 느낌을 공유한다는 점에 근거한다. 지성은 우리에게 '노동'을 권유하는데 노동을 통해 우리는 전달 가능한 새로운 진리들을 발견하게 된다. 지성은 '철학', 다시 말해 자발적이며 사유가 미리 생각해놓은 하나의 훈련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 프루스트는 우정과 철학이라는 전통적인 커플에다가 사랑과 예술이라는 보다 막연한 커플을 대립시킨다. 그렇지만 평범한 사랑이라도 위대한 우정보다 낫다. 왜냐하면 사랑은 기호 signe의 측면에서 볼 때 풍부하고, 무언의 해석을 자양분으로 삼아 살아가기 때문이다. 하나의 예술작품이 철학적 작업보다 더 낫다. 왜냐하면 기호 속에 감싸여 있는 것은 모든 명시적 의미들보다 더 심오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기호가 우리의 선의지와 우리의 사려 깊은 노동이 낳은 모든 성과보다 더 풍부하다."


친구는 나와 유사하게 생각하고 유사하게 느끼는 존재다. 그래서 항상 '대화'는 지속적으로 이루어진다. 혹은 반대로 말해도 좋다. '대화'가 지속 가능하다면, '친구'가 된다고 말이다. 취미 동호회나 학회 등을 떠올려보다. 공통의 관심사에 의해 지배되고, 그 공통의 관심사에 부합되는 걸 찾으면 열정적으로 그걸 공유한다. 결국 우정을 통해서 우리는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는다. 단지 공통의 관심사가 양적으로 확장될 뿐이다. 반대로 애인은 나로 하여금 그가 도대체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느끼는지 항상 해설하도록 만드는 존재다. 우정과는 달리 사랑에는 공통된 것이 하나도 없음에도 우리는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으니 말이다. 이렇게 공통된 것이 없기에 사랑은 우리를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만들 수 있다. 애인이 바흐의 첼로 무반주곡을 좋아한다면, 클래식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어느새 바흐의 선율을 읊조리는 사람이 되기 쉽다. 이처럼 우정에서는 공통된 것이 먼저 오지만, 사랑에서는 공통된 것이 나중에 오거나 영영 오지 않기도 한다. 그래서 우정과는 달리 사랑에는 새로운 무엇인가가 발생하는 생성의 기적이 가능한 것이다.


프루스트는 우정을 닮은 것이 철학이고, 사랑을 닮은 것이 예술이라고 생각했다. 들뢰즈는 프루스트의 생각에 따라 철학을 폐기하고 예술로 전향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들뢰즈는 사랑을 닮은 철학, 혹은 사랑 이미지의 철학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사람이어도 좋고 자연이어도 좋고 아니면 문화적인 것이어도 좋다. 이런 것들을 뜨겁게 사랑하는 철학, 그래서 이런 것들이 분출하고 있는 기호들을 민감하게 포착하고 해석하는 철학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아니 최종적으로 그는 기호들을 마구 뿜어내어 독자들을 사랑에 빠지도록 만드는 철학책을 쓰려고 했던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들뢰즈의 야심과 속내가 이질적이라고 나무랄 필요는 전혀 없다. 오히려 18세기 이후 대학이란 제도, 나아가 국가라는 제도에 포획된 철학이 전체 철학사적 흐름에서는 이질적인 것이다. 공통된 관심사를 두고 아무리 많은 논문을 발표하고 아무리 격렬한 토론을 해도, 제도권 철학은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다.


우정 이미지의 철학에서 탈출해서 사랑 이미지의 철학을 창조하는 것! 이것이 바로 들뢰즈의 깊은 속내였던 셈이다. 아니 사랑 이미지의 철학이 아니라 바로 사랑이 들뢰즈 철학의 최종 귀결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할지도 모를 것이다. 세계의 모든 존재자들을 애인을 격렬히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이 깊어지면 그만큼 앎도 깊어질 테니 말이다. 무언가를 안다고 해서 필연적으로 그걸 사랑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결국 사랑은 앎의 충분조건이었던 셈이다. 사랑일 뿐이다! ≪프루스트와 기호들≫애소 들뢰즈는 말한다.


"우정은 관조와 대화를 양분 삼아 자라날 수 있는 반면 사랑은 무언의 해석에서 태어나고 또 그것으로 양육된다. 사랑받는 존재는 하나의 기호, 하나의 '영혼'으로 나타난다. 그 존재는 우리가 모르는 어떤 가능세계를 표현한다. …… 사랑,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 속에 감싸여진 채로 있는 우리가 모르는 세계들을 '펼쳐서 전개시키고자'하는 우리의 노력이다."


친구의 침묵과는 달리 애인의 침묵은 우리를 불안하게 하고, 우리의 마음을 번뇌에 빠지도록 한다. 침묵하는 친구가 있다면, 우리는 그가 말할 때까지 기다리면 된다. 그러나 내 앞에서 침묵하는 애인은 그런 관조를 허락하지 않는다. 침묵으로 닫힌 애인의 마음을 열 수 있는 열쇠를 바로 이 순간 만들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와 영영 헤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서 벗어날 수 없을 테니 말이다. 열쇠가 가장 정확히 맞을지 확신할 수 없지만, 우리는 다양한 열쇠로 애인의 마음을 열려고 노력할 것이다. 여기서는 관조나 대화가 들어설 틈이란 전혀 없다. 오직 불안감, 해석, 가능성 등등만 우리에게 허락될 테니 말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는 타자를 관조하는 대신 타자에 육박하려는 삶의 철학자가 된다는 점이다. 이럴 때 사변철학 speculative philosophy은 마침내 실천철학 practical philosophy에 자리를 내주게 된다. 들뢰즈가 자신의 사랑의 철학으로 원했던 것이 바로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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