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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찌옹수 Nov 19. 2019

사랑은 하나가 되는 것인가? [바디우]

"사랑은 둘의 경험이자 무한히 열린 관계이다."


사랑과 결혼에 대한 헤겔의 판타지는 주관적일 수밖에 없는 사랑을 객관적으로 만들려고 할 때 결국 비극으로 결말을 맺게 된다. 여기서 사랑이 함축하고 있는 주관성이란 것은, 사랑과 관련된 주체들의 자유를 전제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타자의 자유를 긍정하지 못한다면, 다시 말해 타자의 주관 혹은 내면을 긍정하지 못한다면, 사랑에 남겨지는 것은 참담한 비극일 수밖에 없다. 이 점에서 스르트르보부아르 Somone de Beauvoir (1908~1986)의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많은 것을 생각하도록 해준다. 그들은 타자의 자유를 긍정하면서도 사랑이 가능하다는 것을 몸소 보여준 사례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들이 헤겔의 사랑에 대한 관점을 실천적으로 거부한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사르트르의 사랑은 철학적으로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을까? 이것이 바로 그의 후배 바디우 Alain Badiou (1937~)에게 남겨진 숙제의 하나였다.


만약 바디우가 사르트르의 사랑을 정당화하는 데 성공한다면, 드디어 우리는 사랑과 결혼과 관련된 헤겔의 해묵은 이론을 극복할 수 있는 한 가지 단서를 얻게 될 것이다. 사랑을 새롭게 숙고하면서 바디우는 먼저 사랑에 대한 기존의 편견을 다음과 같이 해체하려고 시도한다.


사랑은 융합적인 것이라는 관념에 대한 거부, 사랑은 구조 속에서 주어진 것으로 가정되는 둘이 황홀한 하나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 황홀한 하나란 단지 다수를 제거함으로써만 둘 너머에 설정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 사랑은 희생적인 것이라는 관념에 대한 거부. 사랑은 동일자를 타자의 제단에 올려놓는 것이 결코 아니다. …… 오히려 사랑은, 둘이 있다는 후後사건적인 조건 아래 이루어지는, 세계의 경험 또는 상황의 경험이다. ≪조건들 Conditions≫


헤겔에게 결혼과 가족은 사랑하는 '두' 사람이 '하나'로 결합되는 계기, 혹은 '둘'의 주관적 사랑이 '우리'라는 객관적 사랑으로 질적으로 변화하는 계기로서 사유되었다. 웨딩마치와 신혼여행은 바로 이런 '하나'로의 진입을 주관적으로나 객관적으로 선포하는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바디우는 '하나'라는 것은 '둘'의 일시적인 효과로 사유될 수 있을 뿐이라고 지적한다. 가령 내가 설레는 마음으로 손을 내밀었을 때 다행스럽게도 타자도 그 손을 잡아줄 때가 있다. 이 경우 나와 타자는 '하나'라는 순간적인 느낌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둘이 자신의 자유에 입각하여 손을 마주 잡았던 것처럼, 둘은 자신의 자유에 입각해서 손을 놓아버릴 수도 있다. 결국 아주 오랫동안 손을 마주 잡고 있다고 할지라도, 이것은 단지 두 사람이 서로의 손을 잡으려고 의지적으로 노력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하나'라는 순간적 느낌의 이면에는 '둘'의 의지가 끈질기게 지속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바디우가 "황홀한 하나란 단지 다수를 제거함으로써만 둘 너머에 설정될 수 있을 뿐"이라고 지적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하나의 느낌에 매혹되어 사랑이 '둘'의 자유로운 의지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쉽게 망각해버리면, 이것은 사랑의 본질에 대한 배신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둘'을 강조하고 있을 때, 바디우는 사랑을 유지하고 지속해나가는 동력이 '둘'의 자유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다. 당연히 상대방에 대한 일반적인 헌신이나 희생은 사람의 문제에서 존재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일방적인 헌신이나 희생은 결국 상대방의 자유를 부정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상대방의 속내를 고려하지 않고 그에게 자신의 삶을 헌신하거나 희생하는 것은 오히려 상대방에 대한 폭력이 될 수도 있다. 또한 결혼해서 '하나'가 되었다는 이유로 상대방에게 자유를 포기하고 결혼생활에 헌신할 것을 강요하는 것 역시 타자에 대한 사랑과는 거리가 먼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결혼의 관계가 둘의 자유에 근거한 의지 위에 기초하고 있음을 간과한 것이다. 이 때문에 바디우는 "사랑이란 동일자를 타자의 제단에 올려놓는 것"이 결코 아니라고 역설했던 것이다.


마침내 바디우는 우리에게 사랑에 대한 다음과 같은 놀라운 정의를 제안하게 된다. "사랑은, 둘이 있다는 후사건적인 조건 아래 이루어지는, 세계의 경험 또는 상황의 경험"이라고 말이다. 다시 말해 사랑은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둘의 사건이라는 것이다. 바디우의 표현 중 "둘이 있다는 후사건적 조건"이란 표현이 매우 난해하게 느껴질 수 있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경험을 떠올려보면 그의 말이 이해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세상에는 자신과 상대방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경험을 하게 마련이다. 반대로 사랑의 경험에서 나와 타자를 제외한 일체의 사람들은 모두 조연들로서 배경의 자리로 물러나게 된다. 이처럼 둘만이 주인공으로 대두되는 경험은 사랑이란 사건이 발생한 뒤에나 가능한 것이다. 이 때문에 바디우는 "둘이 있다는 후사건적인 조건"을 이야기했던 것이다.


그런데 바디우에게 둘이 주인공으로 대두되는 이러한 느낌은 사랑의 완성이 아니라, 사랑의 시작으로 사유되고 있을 뿐이라는 점이다. 이제 둘로서 직 대면하게 된 사람은 마치 무인도에 표류한 사람들처럼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하고 모든 것을 새롭게 경험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헤겔과 달리 바디우의 사랑은 다음과 같은 혁명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 사랑이란 기존의 모든 사회관계를 배경으로 보내면서 둘만이 만들어나가는 새로운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힘이기 때문이다.


사랑이란 그 자체가 비-관계, 탈-결합의 요소 속에 존재하는 이 역설적 둘의 실재성이다. 사랑이란 그런 둘에의 '접근'이다. 만남의 사건으로부터 기원하는 사랑은 무한한 또는 완성될 수 없는 경험의 피륙을 짠다.
≪철학을 위한 선언 Manifeste pour la philosophie≫


'비-관계'나 '탈-결합'은 사랑에 빠진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경험하는 감정일 것이다. 기존에 별다른 의식 없이 영위하던 모든 일상적 관계들에서 벗어나야 비로소 둘은 오직 둘로서만 마주 볼 수 있게 된다. 혈연, 학연, 지연, 심지어는 민족이라는 관계마저도 벗어나지 않는다면, 둘은 둘로서 마주 볼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당연한 귀결이지만 사랑하는 사람들이 씨줄과 날줄처럼 만들어가는 경험의 피륙은 기존의 관계 경험과는 매우 다른 것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는 헤겔이 얼마나 보수적이었는지를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그는 자유의 사건으로서 사랑을 결혼과 가족으로 상징되는 기존의 관계로 편입시킴으로써 인간의 사랑과 자유가 지닌 혁명적 성격을 원천적으로 무력화시키려고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디우의 말대로 둘의 경험으로서 사랑은 '자유'라고 하는 인간의 근본적 숙명과 함께할 수밖에 없다. 인간의 자유를 갈망했던 많은 사상가들에게 둘 혹은 자유의 진실을 가르쳐준 연인들이 있었던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마치 사르트르에게는 보부아르가, 그리고 벤야민에게는 아샤 라시스 Asja Lacis (1891~1979)가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사랑과 관련해서 헤겔은 '하나'로 상징되는 동일성을 추구한다면, 바디우는 '둘'로 상징되는 차이를 지향하고 있다. 문제는 아직도 우리 현실은 동일성이 압도적 우위를 점하고 있다는 데 있다. 이것은 결국 우리가 아직도 자유를, 자신의 자유뿐만 아니라 타자의 자유도 긍정하지 못하고 남루한 현실에 살고 있다는 걸 보여준다. 아직도 우리는 20세기 말 프랑스에서 유래한 해체의 작업을 끈덕지게 수행해야 할 시대에 살고 있는 셈이다. 해체주의 기획은 범주적으로 동일성 identity의 의미를 지니기 위해 그간 차이 difference를 억압하고 은폐해왔다는 사실을 폭로했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 차이가 우선적이고, 동일성은 이런 차이를 억압하고 나서야 비로소 등장하게 되는 파생적 범주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 것이다. 또 기원이나 근거도 아니면서 그 자리를 찬탈했다는 점에서, 동일성은 지배의 의지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서 우리의 사정이 더 나아진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이제 차이라는 원초적 관계에 내던져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동일성의 해체를 통해 차이를 발견한다는 것은 차이를 가능하게 하는 타자를 발견한다는 것과 같은 이야기이다. 동일성이 미리 설정된 관계의 논리로 작동했다면, 차이는 그런 미리 설정된 관계가 없이 우연한 타자와 어떤 우연한 관계를 만들도록 강제한다. 이제 차이에 내던져진 우리는 어떤 전망과 약속도 없는 타자와 매우 위험한 관계에 놓일 수밖에 없다. 해체의 끝에서 우리는 타자, 더 정확히 말해서 타자와의 비대칭적 차이 asymmetrical differnce의 관계를 발견하게 되었다. 사실 헤겔도 타자와의 비대칭적 차이를 발견했던 철학가였다. 하지만 그의 불행은 비대칭적 차이를 견디지 못하고 '하나'로, 혹은 '하나 됨'을 통해 이 차이를 미봉하려고 했다는 데 있다. 사랑 앞에서 쩔쩔매며 서둘러 결혼과 가족제도에 의존해 차이를 미봉하려 했던 헤겔의 비겁함이 바로 여기에서 유래한다. 반면 바디우는 우리에게 비대칭적 차이를 힘들어서 포기하고 싶더라도 "끈덕지게 견뎌내야만 한다"라고 역설한다. 사랑의 관계에서 그가 역설했던 '둘'이란 바로 이 비대칭적 차이를 상징하는 것이다. '둘'을 '하나'로 환원하려는 유혹을 견뎌낼 때에만 우리는 비로소 사랑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윤리학 L'éthique≫에서 그가 주체란 충실성 fidelité의 지지자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강조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이는 결국 '둘'에 대한, 즉 '비대칭적 차이'에 대한 충실성을 일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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