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사유란 타자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아도르노와 마찬가지로 아렌트의 평생 화두도 나치즘으로 상징되는 전체주의를 철학적으로 해명하는 것이었다. 1951년 그녀가 ≪전체주의의 기원 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이라는 책을 출간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 상당한 아쉬움이 남는데, 그것은 아렌트가 전체주의에 대해 기술하고는 있지만 전체주의 발생의 진정한 원인을 철학적으로 해부하는 데는 성공하지 못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 저작 이후로도 그녀는 집요하게 전체주의 문제를 숙고했다. 1963년 출간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eichmann in jerusalem≫은 이 점에서 매우 중요한 저작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책을 통해 비로소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비밀을 풀기 위한 나름의 진지한 해법을 보여주고 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1961년 12월, 예루살렘에서 열였던 아이히만 Adolf Otto Eichmann(1906~1962)의 재판을 다룬 책이다. 유대인 학살 과정의 총책임자 아이히만은 1960년 5월 아르헨티나에서 이스라엘 비밀경찰 모사드에 의해 체포된다. 이 당시 아이히만은 강제로 예루살렘에 이송되어 재판을 받게 된 것이다. ≪뉴요커 New Yorker≫의 특파원 자격으로 재판을 참관했던 아렌트는 아이히만이란 인물, 그리고 재판 과정을 면밀히 기록하며 전체주의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더욱 심도 있게 해명하기 시작했다. 하지막 문제는 당시 아렌트의 글이 그녀의 동포, 즉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던 유대인들에게서 심한 거부반응을 불어 일으켰다는 점이다. 그것은 아이히만이란 인물이 잔혹한 악마가 아니라, 이웃의 빵집 아저씨처럼 너무도 평범한 사람이라고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이 책의 부제로 아렌트가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 A Report on the Banality of Evil'라는 제목을 달았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악이 평범하다는 그녀의 말은 무슨 의미였을까? 해답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아이히만의 악에 관한 아렌트의 분석을 살펴보도록 하자.
자신의 개인적인 발전을 도모하는데 각별히 근면한 것을 제외하고는 그는 어떤 동기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이런 근면성 자체는 결코 범죄적인 것이 아니다. …… 그는 어리석지 않았다. 그로 하여금 그 시대의 엄청난 범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게 한 것은 (결코 어리석음과 동일한 것이 아닌) 철저한 무사유 sheer thoughtlessness였다. …… 이처럼 현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과 이러한 무사유가 인간 속에 아마도 존재하는 모든 악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대 파멸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사실상 예루살렘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이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아렌트의 눈에는 아이히만이란 인물은 히틀러의 명령을 충실히 따르려고 했던 근면한 관료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였다. 다시 말해 그는 보통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출세를 지향했으며, 나아가 그러기 위해서 근면을 생활의 준칙으로 삼은 인물이었을 뿐이라고 본 것이다. 만약 그의 상관이 히틀러가 아니라 훌륭한 인격자였다면, 아이히만은 유사 이래로 가장 청렴한 관료로 독일 역사에 기록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나 다를까 아이히만은 재판정에서 자신에게 죄가 있다면 그것은 상부의 명령을 충실히 따른 것밖에 없다고 수차례 강변했다. 관료로서 상부의 명령을 따랐기 때문에 자신에게 죄를 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만약 죄가 있다면 그것은 결국 명령을 내린 상부에게 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이히만은 자기 변론이 타당하다고 믿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이런 아이히만을 설득하여 자신이 저지른 죄를 인정하도록 만들 수 있을까? 아렌트라면 아이히만에게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철저한 무사유' 역시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철저한 무사유'란 무엇일까? 히틀러의 명령을 듣고 수행했을 때 아이히만은 자신의 명령 수행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것일까? 물론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히틀러가 내린 명령의 내용, 그리고 그것의 실행 절차에 대해 충분히 숙지하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아렌트가 말한 '철저한 무사유'가 어떤 특수한 의미를 띠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과연 무엇일까?
아이히만의 말을 오랫동안 들으면 들을수록, 그의 말할 수 없음은 그의 생각할 수 없음, 즉 타자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 없음과 매우 깊이 연관되어 있음이 점점 더 분명해진다. 그와는 어떤 소통도 가능하지 않았다. 이는 그가 거짓말을 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말과 타자의 현존을 가로막는, 따라서 현실 자체를 막는 튼튼한 벽을 에워싸여 있었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이제 아렌트가 말한 '철저한 무사유'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더 분명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타자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 없음"을 의미했던 것이다. 히틀러에게서 받은 명령을 집행할 때, 아이히만은 자신의 서명이 그 서명과 관련된 유대인들에게 어떤 효과를 미칠지 생각했어야만 했다. 구체적으로 말해 자신이 집행한 상부의 명령으로 아우슈비츠에 갇힌 유대인들의 불안감을, 그리고 수용 공간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유대인들을 죽이라는 명령에 의해 가스실로 걸어가는 유대인들의 공포를 사유했어야만 했다는 것이다. 물론 아렌트 유죄 평결을 아이히만이 듣고서 자신의 죄를 인정했을 리 만무하다." 그는 말과 타자의 현존을 가로막는, 따라서 현실 자체를 막는 튼튼한 벽으로 에워싸여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히만의 범죄를 수고하면서 아렌트는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던지고 있다. 사유란 단순한 생각함이 아니라 '타자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판단하는 능력'이라는 점을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에게 사유는 우리에게 주어진 천부적인 능력이 아니라, 우리가 반드시 수행해야만 하는 의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 의무를 지키지 않을 때, 언제든지 우리는 누구나 제2의 아이히만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아렌트는 우리에게 악은 너무도 평범한 것이 아니냐고 반문했던 것이다. 무서운 일이다. 중대한 악이 우리 주변에서 우리 곁의 친근한 이들에게서 그리 어렵지 않게 출현할 수 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전체주의를 막기 위한 아도르노나 아렌트의 노력은 절박한 것이다. 그 혹은 그녀 자신이 아우슈비츠에서 흔적도 없이 소멸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쓸모없는 실존"을 숙고하려는 아도르노의 노력, 혹은 사유를 의무로 수행하라는 아렌트의 충고는 너무 무기력하다는 느낌이 든다. 세계화되어가는 자본의 운동 속에서 사회는 갈수록 분업화, 전문화, 체계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거대한 체계 속에 포획된 인간은 그만큼 왜소해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그 누가 아도르노나 아렌트의 충고를 귀담아들을 수 있겠는가? 또 듣는다고 해서 작은 개인 한 명이 어떻게 체계에 효과적으로 맞설 수 있다는 말인가? 전체주의를 막는 유일한 방법은 주체의 시선이나 태도의 변화로만 가능한 것이 아니다. 전체주의적 비극을 조장하는 사회구조나 체계를 새롭게 변형시키려는 작업도 동시에 수반되어야만 한다.
그렇다면 사회의 체계를 어떤 식으로 바꾸어야 할까? 우리는 그 실마리를 시몬 베유에게서 찾을 수 있다. 《자유와 사회적 억압의 원인들에 대한 성찰 Réflexions sur les causes de la liberté et de l'oppression sociale》에서 그녀는 "가장 인간적인 문명은 육체노동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 문명"이라고 이야기했다. 바로 이 점이다. 사회의 분업화와 체계화의 핵심에는 항상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이분법이 도사리고 있고, 육체노동에 비해 정신노동을 중시하는 가치평가가 내재하는 법이다. 체계는 최고 상급자가 가장 정신적인 노동에, 그리고 최하 계층은 가장 육체적인 노동에 종사하는 구조로 작동한다. 베유는 바로 이 구조를 붕괴시켜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상급자도 육체적 노동에 종사하게 된다면, 그 체계는 결코 거대해질 수 없는 법이다. 베유가 제안했던 인간적인 문명이 실현된다면, 당연히 인간 개체를 하나의 작은 수단으로 간주하는 국가와 같은 거대 체계들은 더 이상 발을 붙일 수가 없을 것이다. 누가 이 과업을 수행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