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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찌옹수 Jan 04. 2020

전체주의는 왜 발생하는가? [아도르노]

"이성이 추구하는 동일성이 배제와 억압을 낳는다."


젊은 시절부터 아도르노 쇤베르크 Arnold Schönberg (1874~1951)의 무조음악에 심취했을 정도로 탁월한 예술적 재능을 보였다. 예술적 감수성이 풍부했던 그에게 아우슈비츠는 벗어나기 힘든 트라우마로 작용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가 "아우슈비츠 이후에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다"라고 말했던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있을 때조차 그는 자신의 몸이 아우슈비츠에서 소각되는 환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인간의 여린 심성을 노래하는 서정시를 쓸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자기 대신 사라진 동료들에 대한 죄악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정신분석학의 교훈처럼 아우슈비츠라는 트라우마에서 해방되기 위해서 그는 끈덕지게 전체주의 문제를 숙고해야만 했다. 그 결과 그는 충격적인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아우슈비츠'를 낳은 것은 광기나 비정상이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다. 오히려 그 참혹한 학살을 일으켰던 주범은 지금까지 서양철학이 그토록 자랑하던 '이성' 혹은 '합리성'이었기 때문이다.


1961년 아도르노는 자신의 통찰을 파리에서 콜레주 드 프랑스 강의를 통해 처음으로 대중에게 알렸다. 1966년에 출간된 ≪부정변증법 Negative Dialektik≫은 바로 이때의 강의를 책으로 엮은 것이다. 먼저 아우슈비츠라는 비극이 발생하게 된 원인에 대한 그의 입장을 직접 들어보자.


대량학살이란 절대적 통합이다. 이런 통합은 사람들이 획일화되는 곳이면 어디서나, 사람들이 완전한 무가치성의 개념으로부터 벗어날 경우 문자 그대로 말살될 때까지 ―군대에서 말하듯이 ―마모되는 곳이면 어디서나 등장하게 된다. 아우슈비츠는 순수 동일성은 죽음이라는 철학 명제가 진실임을 확증했다.
≪부정변증법≫


플라톤 이후 서양철학은 인간의 이성이 복잡하고 다양한 세계를 파악할 수 있는 순수한 동일성, 혹은 본질을 추구하고 추구해야만 한다고 강조해왔다. 그렇게 출현한 것이 바로 존재, 인간, 동물, 생물, 여성, 남성, 백인, 흑인, 독일인, 유대인 등과 같이 다양한 개체들을 분류하고 규정하는 개념이다. 개념을 뜻하는 영어 'concept'나 독일어 'begriff'도 모두 무엇인가를 '붙잡는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도 다 이 때문이다. 개념으로 무엇인가를 포착하기 위해서 이성은 개체들이 가진 복잡성과 차이는 제거하고 획일화해야만 한다. 이처럼 이성이 지향하는 내적인 논리는 개념으로 개체들을 포획하기 위해서 개념의 동일성을 편집증적으로 지향한다는 데 있다. 동일성을 추구하는 이성의 욕망에서 아도르노는 마침내 전체주의의 기원을 발견하게 된다. 동일성에 대한 욕망은 게르만 민족의 순수성을 지향하며, 이런 순수성을 더럽히는 차이로서 유대인과 집시들을 제거하려는 나치의 편집증적 욕망으로 실현되었다고 본 것이다.


하나의 개념 속에 포획된 개체들은 이제 교환 가능한 것으로 사유된다. ≪차이와 반복≫에서 들뢰즈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일반성 généralité'과 '특수성 particularité'의 회로가 개념의 자기동일성이 관철되는 형식이기 때문이다. 동일성의 논리에 따르면 유대인 네 사람, 예를 들어 아도르노, 벤야민, 아렌트, 레비나스는 이제 그들이 가진 단독성 singularité으로서 사유되지 않는다. 단독성은 '교환 불가능성'을 전제로 하는, 각 개체들의 개체성을 의미하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동일성의 논리에 지배되면 그들은 이제 유대인 1, 유대인 2, 유대인 3, 유대인 4라는 '특수성'으로만 사유될 뿐이다. 물론 여기서 '유대인'이란 개념은 '일반성'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래서 만일 히틀러가 유대인 한 명을 데려오라고 명령을 내린다면, 그의 부하는 아도르노, 벤야민, 아렌트, 레비나스 중 누구라도 데리고 오면 된다. 어차피 이 네 사람은 유대인이라는 '일반성'에 의해 포획된 '특수한'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개념의 동일성 혹은 이성의 순수성이 아우슈비츠를 낳았다면, 다시는 이 세상에 학살의 비극이 도래하지 않도록 막는 유일한 방법이 '일반성'과 '특수성'의 회로, 혹은 개체들을 다른 것으로 교환 가능한 것이라고 보는 이성의 논리를 해체하는 것이다. 아도르노가 '비개념적인 것'을 강조했던 것도 바로 이런 맥락에서였다.


역사적 위치에 비추어보면 철학은 헤겔이 전통에 따라 무관심을 표명한 것에, 즉 비개념적인 것, 개별적인 것, 특수한 것에 진정으로 관심을 둔다. 말하자면 플라톤 이래 덧없고 사소한 것이라고 배척당하고 헤겔이 "쓸모없는 실존'이라고 꼬리표를 붙인 것에 관심을 두는 것이다. 철학의 테마는 철학에 의해 , 우발적인 것으로, 무시할 수 있는 양으로 격하된 질들일 것이다. 개념으로는 도달하지 못하는 것, 개념의 추상 메커니즘을 통해 삭제되는 것, 아직 개념의 본보기가 되지 않은 것, 그런 것들이 개념에 대해서는 절박한 것이 된다.
≪부정변증법≫


'비개념적인 것', '개별적인 것', '특수한 것', 다시 말해 헤겔이란 이성주의 철학자가 "쓸모없는 실존"이라고 배척했던 것들을 아도르노는 철학적으로 구제해야 한다고 보았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아도르노가 언급한 '특수한 것'은 들뢰즈에 따르면 '단독적인 것'으로 번역될 수 있는, 그러니까 교환 불가능한 개체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아도르노의 부정변증법은 이런 맥락에서 제안된 것이다. 헤겔의 변증법은 개체들 간의 대립과 차이를 강조하는 것 같지만, 최종 목표는 개념을 통한 종합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헤겔의 변증법은 개념의 자기동일성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아도르노는 자신이 제안한 변증법의 중심은 종합이 아니라, 종합되지 않은 모순의 원칙을 관철하는 데 있다고 주장한다.


헤겔의 변증법을 생각해보라. 아주 거치게 말해 변증법의 운동은 정正, these에서 반反, antithese으로, 그리고 마침내 합合, synthese에서 완성된다. 아도르노는 정과 반만 남기고 합을 거부하려고 한다. 여기서 부정변증법이 탄생한다. 정과 반은 서로를 부정하기 때문이다. 부정변증법의 핵심은 정이 반을 지배하거나 흡수해 합으로 가는 걸 막는 데 있다. 이럴 때 반의 계기는 부정적이지만 자신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으니 말이다. ≪부정변증법≫에서 그가 개념의 자기동일성에 저항하는 이질적인 것을 강조하면서 자신의 변증법이 "비동일성에 대한 일관된 의식"이라고 강조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그의 변증법에 따르면 이제 아도르노, 벤야민, 아렌트, 레비나스는 특수성의 굴레에서 벗어나 단독적인 것으로 사유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다. 그래서 아도르노의 부정변증법은 단독성의 변증법 혹은 차이의 변증법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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