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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찌옹수 Jan 01. 2020

전체주의는 왜 발생하는가?

나치즘과 하이데거 사이의 은밀한 동거


국가사회주의 Nationalsozialismus, 즉 나치즘 Nazism히틀러 Adolf Hitler (1889~1945)라는 고유명사로 기억되고 있다. 서양 대의민주주의 이념의 핵심적인 가정 가운데 하나는, 각 개인들의 의지가 선거를 통해서 보편적으로 실현되기 때문에 투표에 의해 뽑힌 대표자는 그가 대통령이든 혹은 국회의원이든 공정하고 선한 정치를 할 수 있다고 믿는 데 있다. 지금도 여전히 작동하고 있는 대의민주주의 이념의 이런 가정은 히틀러의 총통 당선으로 인해 이미 여지없이 깨져버렸다. 히틀러는 국민의 직접선거에 의해 압도적인 지지와 열광 속에서 당선되었던 정치 대표자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다수결의 이념이 절대적인 진리일 수 없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는 슬픈 사례였다. 당시 독일은 자본주의의 내적 모순에 시달리고 있었고, 독일 국민은 당시 상황에 대해 커다란 불안과 불만을 품고 있었다. 이때 히틀러는 불안과 불만에 가득 찬 독일인에게 '위로부터의 해결'을 약속하면서 말 그대로 왕처럼 강림했던 것이다.


라이히 Wilhelm Reich (1897~1957)

≪파시즘의 대중심리 Die Massenpsychologie des Faschismus≫에서 라이히 Wilhelm Reich (1897~1957)가 지적한 것처럼 당시 히틀러 통치하의 독일 국민은 자신들이 곧 "작은 히틀러"인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했다. 다시 말해 독일 국민은 총통의 결정이 곧바로 자신들의 결정인 것처럼 믿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보면 '자발적인 복종'이야말로 나치즘의 고유성을 규정하는 중요한 한 가지 계기라고 할 수 있다. 피통치자가 자신이 수탈의 대상이라는 것을 오히려 망각하고, 그 수탈을 외적인 결정과 의지에서가 아닌 내적인 자기 의지와 결정으로 수용하는 것처럼 느낄 때 나치즘이 작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발적 복종이란 모순된 조건을 은폐하기 위해 권력자에 대한 열광과 환호가 더 거세진다. 자발적 복종에서 '자발'에 방점을 찍어 '복종'의 진실을 가지려는 일종의 정신승리 반응이다. 바로 이런 열광과 환호 속에서 피통치자들은 자신이 엄연한 판단의 주체이자 또한 책임의 주체라는 사실을 망각하게 되었다. 다시 말해 총통과의 내면화된 관계를 통해, 이제 주체의 초자아에 내면화된 총통이 각기 들어서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나치즘의 논리에 20세기 최대의 존재론자 하이데거 Martin Heidegger (1889~1976) 역시 깊이 연루되어 있었던 것은 매우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이데거 Martin Heidegger (1889~1976)

하이데거는 1933년에서 1945년까지 나치당에 자발적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기부금을 헌납했던 인물로서 일련번호 312589를 받은 상당히 열성적인 나치 당원이었다. 1933년 하이데거는 라디오 방송에 출현하거나, 혹은 프라이부르크 대학 총장으로 있으면서 학생들과 독일 국민에게 나치즘 합류를 독려하는 연설을 자주 행했다. 다음 글은 ≪프라이부르크 학생신문≫에 실린 <독일의 남성과 여성들이여!>라는 제목의 하이데거 기고문 가운데 일부이다.


독일 교직원 여러분 그리고 독일 민족 여러분! 독일 민족은 지금 영도자Führer 로부터 투표하라고 소환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영도자께서는 우리 민족에게 어떤 것도 원하지 않으십니다. 차라리 그분께서는 우리 민족에게 모든 것을 가장 탁월하게 결정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하고 계십니다. 전체 우리 민족이 우리 민족으로서의 현존 Dasein을 원하는지 아니면 전체 우리 민족이 그것을 원하지 않는지의 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말입니다. ≪프라이부르크 학생신문≫ (1933년 11월 10일)


지금 하이데거는 독일 민족이 히틀러를 선택하는 것은 독일 민족 각 개인이 자신의 현존을 선택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일이라고 역설하고 있다. 이런 투표는 사실 주체적 투표 행위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대표자를 뽑는 결정과 판단의 자리가 아니라 오히려 자신이 독일 민족의 한 성원이라고 고해성사를 하는 종교적 열광의 자리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단순히 표면적으로 보면 이러한 하이데거의 선거 독려는 독일 민족에게 자신이 독일 민족임을 선언하는 당연한 권리를 행사하라고 요구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심지어 하이데거는 영도자 히틀러가 독일 국민에게 원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강변하면서, 오직 독일 민족의 현존을 밝히는 일이 중요할 뿐이라고 강조하기도 한다. 여기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점은 하이데거의 철학 체계 자체가 이미 위와 같은 나치즘의 내적 구조와 그 맥을 같이하고 있다는 점이다.


≪동일성과 차이 Identität und Differenz≫에서 하이데거는 이렇게 말했다.

존재는 '밝히면서 건너옴'으로 스스로를 내보인다. 존재자로서 존재가 자체는 '밝혀져있음 속에서 다가와 그 안에서 스스로를 간직하는 도래'라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라고. 존재는 존재자를 밝히고, 존재자는 존재에 의해 밝혀진다.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구절이다. 하지만 형광등의 불빛을 존재에, 그리고 방 안에 있는 사물들을 존재자에 대입해 생각해보면 이 구절을 그리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불빛이 마치 방 안을 밝히면서 오는 것 같고, 사물들은 불빛에 의해 밝아진 방 안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존하면서 나타나는 것처럼 보인다. 이 대목에서 중요한 것은 존재 자체가 불빛처럼 강림하지 않으면 존재자들은 그 모습이 드러나지 않는다고 본 하이데거의 발상이다. 하이데거가 강조한 존재는 마치 신처럼 전능한 것이다. 이런 존재의 자리에 바로 히틀러를, 그리고 존재자들의 자리에 독일 국민을 대입하면, 우리는 하이데거의 연설문이 그의 변명처럼 일회적인 실수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다.


"히틀러는 세상을 밝히면서 건너오고, 독일 국민은 히틀러가 환히 밝힌 공간 속에서 독일 국민으로 자신을 간직한다." 하이데거에게 진리란 존재가 스스로를 드러내서 존재자들을 밝히는 사태를 의미한다. 정치철학적으로 이것은 히틀러라는 영도자가 독일 민족에게 강림하지만 그들에게 어떤 것도 원하지 않고 단지 그들 각자로 하여금 자신이 독일 민족임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있다는 생각과도 맥을 같이하는 것이다. 하이데거가 논쟁하거나 추론하면서 진리를 얻으려고 했던 철학자가 아니라, 존재의 소리를 직접적으로 들을 수 있었다고 전해지는 소크라테스 이전의 시인 혹은 사상가들을 좋아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존재의 소리를 들었던 시인 사상가들처럼 하이데거는 총통의 강림을 맞이하는 충실한 사제 노릇을 스스로 실천했던 셈이다. 존재신학의 사제!


아도르노 Adorno, 아렌트 Arendt

나치즘에 열광하던 독일 국민과는 달리 당시의 광기를 겁에 질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히틀러에 의해 정치적 권리를 박탈당한 유대인들이 바로 그 주인공인데, 불행히도 그들의 공포감은 얼마 지나지 않아 아우슈비츠로 현실화된다. 사실 나치즘은 유대인들에게는 지옥 그 자체로 기억될 것이다. 당연히 나치즘 이후 수많은 유대인 철학자들이 나치즘으로 상징되는 전체주의를 철학적으로 해부하는 데 집중하게 되었다. 그중 독일에서 활동했던 아도르노 Theodor Ludwig Wiesengrund Adorno (1903~1969)와 미국으로 건너간 아렌트 Hannah Arendt (1906~1975)는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다. 아도르노와 아렌트에게 전체주의는 단순한 지적 호기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두 사람은 모두 나치 정권 초기 독일에서 활동했던 경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일찍 독일에서 탈출하지 않았다면, 아도르노와 아렌트도 그 악명 높던 아우슈비츠에서 허무하게 살해되었을 수도 있다. 400만 명의 죄 없는 생명들이 아우슈비츠의 독가스실에서 살해되고 소각되었다. 통계 자료에 의하면 그중 약 3분의 2가 유대인이었다고 한다. 이 점에서 유대인이었던 아도르노와 아렌트에게 아우슈비츠란 그들이 용케도 한 번은 벗어나는 데 성공했던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현실의 또 다른 일상적 모습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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