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관심한 관심에서 미적인 것은 탄생한다."
칸트의 《판단력비판》은 미학 aesthetics을 가능하게 한 텍스트라고 할 수 있다. 칸트 미학의 핵심은 '무관심'의 관조라는 생각에 달려 있다. '무관심'하게 보지 못한다면, 아름다움의 영역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무관심하게 본다는 것이 멍청하게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이것은 아름다운 여인을 주시하다가 다른 일체의 생각을 떠올리지 못하는 정신 상태와 흡사하기 때문이다. 《판단력비판》에서 칸트가 다루는 미적인 대상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종류이다. 첫째가 바로 단순한 아름다움, 즉 '미 Das schöne, the beautiful'이고 둘째가 곧 '숭고 Das Erhabene'이다.
"미는 우리에게 어떤 것을, 자연까지도 관심을 떠나서 사랑하도록 마음을 준비시키고, 반면 숭고는 그것이 비록 우리의 관심에 거슬릴지라도 존중하도록 마음을 준비시킨다."
《판단력비판》에 등장하는 칸트의 발언인데 우선 먼저 '미', 즉 단순한 '아름다움'에 대한 그의 설명을 좀 더 들어보도록 하자.
취향 Geschmack, taste은 어떤 대상이나 표상 방식을 일체의 관심을 떠나 만족이나 불만족에 의해서 판단하는 능력이다. (이와 같은 판단에 의해 가능한) 만족의 대상은 아름답다고 말해진다. 《판단력비판》
칸트에 따르면 미적인 취향은 "일체의 관심을 떠나서 만족이나 불만족에 의해 판단하는 능력"이다. 무관심하게 보았을 때 만약 어떤 대상이 만족을 준다면, 그 대상은 아름다운 것으로 간주된다. 그렇지 않고 우리에게 불만족을 준다면, 그 대상은 결코 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상큼한 사과를 묘사하고 있는 정물화를 보았을 때, 배고픈 사람은 자신에게 식욕이 생기는 것을 느낀다. 이어서 그는 상큼한 사과가 아름답게 묘사되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런데 칸트에 따르면 이것은 무관심한 만족감이 아니다. 무관심한 만족이라면 식욕과 같은 다른 관심이 전혀 개입하지 않아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마르셀 뒤샹 Marcel Duchamp (1887~1968)이야말로 가장 칸트적인 예술가였다고 할 수 있다. 변기를 〈샘 Fountain〉 (1917)이란 이름으로 전시했던 그의 작품은 관객들에게 다음과 같이 묻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들은 이 변기를 무관심하게 볼 수 있는가? 그렇다면 당신들은 아름다움이나 혹은 추함이라는 미적인 느낌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럴 수 없다면 당신은 스스로가 미를 느낄 수 없는, 그래서 전시회에 들어올 필요가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자인하고 있는 셈이다."
만약 여러분이 변기 그림을 보고 예술품이라기 보다 역겨운 감정만을 느꼈다면 이것은 여러분에게 미적인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인식 능력, 즉 무관심의 능력이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고 뒤샹의 그림은 반문하는 셈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미에 대한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무관심이 우리의 내면에서 자연적으로 생기기는 힘들다는 점이다. 일반인들이 미술관에 전시된 변기나 혹은 상큼한 사과를 무관심하게 볼 수 있다는 것은, 그들이 미술관에 전시된 작품을 일상적 관심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점을 이해하고 있거나 혹은 그것에 대해 이미 교육받았다는 것을 전제한다. 이 점에서 미를 가능하게 하는 무관심은 우리의 의지적인 노력에 의해 학습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칸트는 무관심의 다른 가능성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그것이 바로 숭고의 느낌이다. 숭고의 느낌은 무관심이란 것이 우리 의지적인 노력에 의해 가능한 것이 아니라, 외부 대상이나 사건에 의해 무조건적으로 강제될 때 발생하는 미적 감정이다. 칸트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도록 하자.
우리가 이런저런 설명을 붙이지 않고 순전히 어떤 대상을 포착할 때 우리 내부에 숭고의 감정을 일깨우는 것은 그 형식에 있어서는 우리의 판단력에 대해서는 물론 반목적적이며, 우리의 현시 능력에 대해서는 부적합하고, 상상력에 대해서는 흡사 난폭한 것같이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그 때문에 더욱더 숭고하다고 판단되는 것이다.
《판단력비판》
하늘과 땅, 그리고 바다가 뒤엉켜 보일 정도의 엄청난 폭풍우와 직면할 때가 있다. 혹은 숲으로 우거진 산길을 걷다가 갑자기 시야가 트이며 거대한 폭포를 목격하게 될 때도 있다. 이런 경우 우리는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강제적으로 무관심의 상태에 빠지게 된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 이런 압도적인 광경은 우리로 하여금 다른 일체의 생각이나 관심을 갖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타자적 경험에 빠진 것이다. 하늘과 땅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모든 것은 뒤엎어버릴 것 같은 폭풍우, 혹은 어디에서 시작되어 어디까지 떨어지는지 감도 잡히지 않는 거대한 폭포 앞에서 우리는 지금까지 자신의 모든 생각과 상상력이 얼마나 보잘것없었는지 느끼는 순간이다. 한마디로 생각했던 것, 혹은 상상했던 것 이상의 풍경이 우리를 덮칠 때, 우리는 그저 입 만 벙긋 벌린 채 망연자실하게 된다.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우리는 무관심의 상태에 빠지고 만 것이다. 칸트에 따르면 바로 이때 우리가 느끼는 미적인 감정이 바로 '숭고'의 감정이다.
비록 칸트가 분명하게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논리적으로 두 가지 종류의 '무관심의 상태'가 있는 셈이다. 하나는 주체의 노력과 연습으로 달성되는 '자발적인 무관심'의 상태이고, 다른 하나는 주체의 노력과 연습을 조롱하듯이 외부 풍경이 우리가 다른 일체의 것에 관심을 갖지 못하도록 만드는 '비자발적인 무관심'의 상태다. '자발적 무관심'의 상태는 바로 아름다움, 그러니까 미와 관련된다. 어떤 대상이나 사건을 조용하고 편안한 가운데 무관심하게 판단할 때 '미'의 감정이 출현하는 법이다. 반면 '비자발적 무관심'의 상태는 숭고와 관련된다. 압도적인 대상이나 사건이 우리의 모든 관심을 폭풍우처럼 날려버리고 일체 다른 것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게 만들어버릴 때, 우리는 '숭고'의 감정에 젖어들게 된다. 어쨌든 '미'나 '숭고'가 모두 미적인 감정일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의 경로가 어떻든 간에 우리 내면에 '무관심의 상태'가 발생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