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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찌옹수 Feb 26. 2020

아름다움은 어떻게 느껴지는가?

칸트, 진선미를 구분하다.


칸트 Immanuel Kant, 레오나르도 다빈치 Leonardo da Vinci

서양철학사에서 가장 위대한 철학자를 한 사람 뽑으라면, 대부분의 사람은 별로 주저하지 않고 칸트를 지목할 것이다. 과거의 위대한 철학적 사유들이 대부분 칸트라는 저수지로 합류하여, 다시 다양한 길로 흘러갔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칸트의 철학적 위대함은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것은 우선 그가 진眞, the true, 선善, the good, 미美, the beautiful라는 세 영역을 분명히 구별했던 데에서 찾을 수 있다. 칸트 이전에 진선미는 일종의 삼위일체 trinity로서 작동했다. 그러니까 참된 것은 선하고 아름답다는 판단, 선한 것은 참되고 아름답다는 판단, 혹은 아름다운 것은 참되고 선하다는 판단이 모두 통용되었다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조각상이나 혹은 중세 시절의 성화聖畫 등을 보면, 진선미 삼위일체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직감할 수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Leonardo da Vinci (1452~1519)의 그림들을 보아도 명확하다. 그림이나 조각에서 완전한 기하학적 대칭성과 아름다운 외모 등등은 묘사된 인물이 선하다는 느낌을 분명히 주고 있으니 말이다.


개개인보다 공동체를 강조했던 근대 이전의 사회에서 진선미 중에서 가장 높은 지위를 부여받은 것은 바로 선이었다. 결국 선 중심의 삼위일체가 진선미를 규정하는 전통적인 관념이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도 플라톤의 영향력이 두드러진다.


'좋은 to gathon의 이데아'가 가장 중요한 배움이라는 것을, 그리고 바로 이 이데아 덕분에 정의로운 것들도 그 밖의 다른 것들도 유용하고 유익한 것들로 된다는 것을 자네는 여러 차례 들었을 테니까 말일세. 자네는 방금도 이걸 내가 말하려 하고 있다는 걸 익히 알고 있었으며, 게다가 우리가 이 이데아를 충분히는 알고 있지 못한다는 것도 알고 있네. 그러나 만약에 우리가 이걸 모른다면, 이것을 제외한 채 다른 것들을 우리가 아무리 많이 안다고 할지라도 그건 우리에게 아무런 덕도 되지 않는다는 걸 자네는 알고 있네. 마치 우리가 어떤 것의 '좋음'을 빠뜨린 채 그걸 소유한들 아무 소용이 없듯이 말일세. 혹시 자네는 소유가 정작 좋은 것이 아닐지라도 모두 이득이 되는 것이라 생각하는가? 혹은 좋음을 제외한 다른 모든 것을 이해하면서도 정작 아름답고 좋은 것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그렇겠는가?
《국가 Politeia》


형상, 즉 이데아는 플라톤에게 지식 epistēmē진리 alētheia의 대상이다. 그것은 변화하는 생성의 세계에 동일성을 부여하는 원리이기도 하다. '사람 자체', '삼각형 자체', '테이블 자체' 등등 다양한 이데아들이 존재할 수 있다. 이런 이데아들이 이데아로 불리려면, 그것들에는 최종적 이데아가 존재해야만 한다. 그것이 바로 '좋음의 이데아', 즉 '선의 이데아'다. 다양한 삼각형들이 삼각형 자체, 즉 삼각형 이데아에 수렴되고, 다양한 테이블들이 테이블 자체, 즉 테이블 이데아에 수렴되는 것처럼, 이번에는 삼각형 이데아나 테이블 이데아 등등은 모두 '선의 이데아'로 수렴된다는 것이다. 테이블을 만드는 장인은 '테이블 이데아'만 알면 되지만, 전체 사회를 지배하는 통치계층에 속한 사람들은 모든 이데아들의 이데아, 즉 선의 이데아를 알아야만 한다.


결국 눈앞에 있는 '아름다운' 테이블은 '참된' 테이블 이데아의 규정을 받아서 만들어진 것이고, 바로 이 테이블 이데아는 '선의 이데아'에 의해 최종 규정된다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선 중심의 전선미 삼위일체가 완성된다. 1700년대까지 지배하던 이런 통념이 칸트의 위대함이다. 미학의 혁명이라고 해도 좋을 듯하다. 이제까지 참됨에 의해 지배되었던 아름다움이, 그리고 최종적으로 선함에 의해 지배되었던 아름다움이 마침내 독립을 했으니 말이다. 이제는 아름다움은 참되지 않아도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고, 선하지 않아도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제 미학이 하나의 학문으로 탄생한 것이다. 인물을 묘사하기 위해 해부학을 공부했던 레오나르도 다빈치로서는, 혹은 선한 사람만이 아름다움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던 미켈란젤로로서는 경천동지할 일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칸트가 진선미 자체를 부정했던 것은 아니다. 단지 그는 진과 선과 미는 서로 독립적이라고 주장했을 뿐이니 말이다. 그에 따르면 우리는 동일한 대상이라도 최소한 세 가지 영역, 다시 말해 세 가지 종류의 관심으로 다르게 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의 기원인 셈이다.


예를 하나 들어보도록 하자. 어느 날 길을 가다가 갑자기 쿵하는 소리와 함께 나이가 별로 들어 보이지 않는 젊은 청년 한 사람이 투신자살한 장면을 우연히 목격하게 되었다고 해보자. 칸트에 따르면 우리는 이 충격적인 장면을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관심에 입각해 서로 다르게 이해할 수 있다. 첫째는 '이론적 관심'이다. 만약 이 장면을 '이론적 관심'으로 바라본다면, 우리는 그 청년의 실제 몸무게와 빌딩의 높이 등을 계산해서 그의 몸이 보도 바닥에 닿았을 때의 충격량을 이론적으로 계산해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진리眞의 영역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충격적인 장면을 '이론적 관심'이 아니라 '실천적 관심', 즉 '윤리적 관심'을 통해 바라볼 수도 있다. 이 경우 우리는 젊은 청년을 자살로까지 내모는 살인적인 취업 경쟁과 자본주의 사회의 비정함, 그리고 관료와 정치인들의 사회적 무책임 등에 분노를 느끼게 될 것이다. 이 경우 우리는 지금 한 청년을 죽음으로 몰고 간 윤리적 책임을 따지고 있는 셈이다. 이것이 바로 칸트가 말한 윤리善의 영역이다. 한편 '이론적 관심'이나 '실천적 관심'을 포함한 일체의 관심을 전혀 가지지 않고, 다시 말해 시종일관 '무관심'으로 빌딩 아래 떨어진 한 청년의 시신을 바라볼 수도 있다. 이 경우 우리는 참혹한 이 장면에서 마치 느와르 영화의 한 장면이라도 보고 있는 것처럼 오히려 의도치 않은 미적 유혹을 느낄 수도 있다. 이것이 바로 아름다움美의 영역이다.


칸트에 따르면, 진선미의 세계가 우리가 가진 관심이 이론적 관심이냐, 실천적 관심이냐, 아니면 무관심이냐에 따라서 서로 다르게 드러난다. 이제 우리는 세 가지 인경을 얻게 된 셈이다. 참과 거짓을 보는 안경, 선과 악을 보는 안경, 아름다움과 추함을 보는 안경. 칸트의 유명한 세 가지 비판서가 쓰인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첫 번째, 《순수이성비판》을 통해 칸트는 이론적 관심을 드러나는 진리의 세계를 다루고 있다. 두 번째, 《실천이성비판》을 통해 칸트는 실천적 관심으로 드러나는 윤리의 세계를 해명하려고 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판단력비판 Kritik der Urteilskraft》을 통해서 칸트는 무관심을 통해서 드러나는 아름다움의 세계를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좀 더 생각해 볼 점은 위와 같이 세 가지 관심으로 동일한 대상이나 사건을 모두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볼 때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물론 타고난 천재라면 저절로 그럴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우리가 칸트가 구별했던 진선미의 세계를 별도로 식별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정도의 교육과 학습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바로 그런 특별한 교육과 경험을 대가로 해서만 얻을 수 있는 분별력 discernment이 우리에게 갖추어져 있어야 비로소 우리는 어떤 대상이나 사물을 다양한 관심에 따라 서로 다르게 판단하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런 분별력을 얻을 수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많을 수가 없다. 우수한 교육과 학습에 장기간 투자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진 부르주아 계층이 아니라면 어떻게 이런 과정을 학습할 수 있겠는가.


결국 칸트에 따르면 분별력이 있는 사람, 혹은 배운 사람이라는 것은, 동일한 대상이나 사건을 자신의 필요에 따라 이론적 관심으로도, 혹은 실천적 관심으로도, 그리고 무관심으로도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 반면 분별력이 없는 사람, 혹은 배우지 못한 사람은 이론적 관심으로 보아야 할 때 다른 관심으로 보거나, 아니면 무관심하게 보아야 할 때 특정한 관심을 갖고 보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보자. 의사는 사람의 몸을 하나의 기계처럼 보도록 철저히 배우고 훈련받은 사람이다. 그래서 평범한 사람이 의사가 되려면, 반드시 장시간의 해부학 실습 과정과 이론적 학습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해부학 실습을 통해서 평범한 사람은 수술대 위의 사람들 몸을 마치 기계의 일부처럼 다루는 법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이런 학습 과정이 잘못되어 의사가 이론적 관심이 아닌 특정한 다른 관심, 예를 들어 환자를 지나치게 동정하여 감정의 동요를 일으킨다면 그는 위험한 수술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없을 것이다. 한편 미술가는 이성의 나체를 보고도 성적인 관심이 아니라 무관심으로 나체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도록 훈련을 받아야만 한다. 그런데 이 경우에도 누드화를 그리는 미술가가 미적 관심 혹은 무관심이 아닌 다른 관심에 따라 이성의 나체를 바라보면 제대로 된 그림을 완성하기 어렵게 된다. 이것은 칸트가 생각했던 세 종류 관심의 구별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전형적 사레라고 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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