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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찌옹수 Feb 25. 2020

에로티즘은 본능적인가? <고찰>

다이아몬드 수레에 탄 에로티즘


기독교적 사유가, 아니 일체의 금욕주의적 사유가 문제다. 육신의 쾌락을 모조리 회생해야만 정신의 아버지가 살고 있는 천국으로 가서 정신의 희열을 느낄 수 있다고 설교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질료보다는 형상을 우선시하는 고대 그리스 사유 전통이 결합되면서, 육체는 부정되고 당연히 육체적 쾌락, 즉 섹스의 쾌락은 저주의 대상이 된다. 스피노자니체와 같은 아주 비범한 철학자들만이 육체와 섹스를 긍정했을 뿐이다. 불행히도 플라톤에서 쇼펜하우어에 이르기까지 서양 주류 철학 전통은 섹스를 오직 종족 보존의 목적으로만 긍정했을 뿐이다. 심지어 에로티즘을 탁월하게 분석했던 바타유마저 섹스에 대한 금기를 받아들이면서 논의를 진행하고 있을 정도다. 한편으로는 금기를 넘어서려는 인간의 자유를 긍정하는 것 같지만, 바타유의 에로티즘은 섹스를 긍정하는 논의라기보다는 섹스의 금기를 전제하는 논의에 불과하다. 그러나 섹스에 대한 금기를 넘었다고 해서 섹스는 긍정될 수 있는 것일까? 여기서 부정의 부정은 긍정이라는 형식논리적 사유를 전개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섹스 자체가 아니라 섹스에 대한 금기이기 때문이다. 금기가 있기에 욕망이 있었고, 금기를 넘어서면 욕망은 충족된다. 이것이 바로 바타유의 핵심 논리다. 여기에는 섹스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섹스는 단지 금기와 위반의 변증법에 포획된 재료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신과 형상을 부정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바로 이 신과 형상이 금기를 낳은 기원이다. 한마디로 육체와 섹스를 그 자체로 긍정하려면, 우리는 초월적 세계를 부정해야만 한다.


여기서 우리는 동양을 지배했던 강력한 사유 전통 불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불교는 범아일여梵我一如라는 초월적 세계관을 부정하면서 인도에서 출현했던 사유 체계였다. 여기서 범梵은 우주적 신인 브라흐만을, 그리고 아我는 개별자의 불멸하는 아트만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범아일여는 개별자의 자아가 바로 우주적 신과 같다는 주장이다. 불교는 바로 이 우주적 신도 그리고 불멸하는 자아도 모두 부정한다. 불교의 트레이드마크 무아론無我論은 바로 이런 문맥에서 탄생한 것이다. 영원성과 불멸성을 제대로 부정해야, 우리는 찰나성과 가변성을 긍정할 수 있다. 결국 무아론은 단독적인 세계와 자신의 삶을 긍정하는 것으로 귀결되어야만 한다.


불교에는 밀교密敎, 즉 탄트라 불교 Tantric Buddhism라고도 불리던 금강승 金剛乘, Vajrayāna의 전통이 있다. 밀교 즉 금강승은 모든 것에는 시체가 없다는 공空의 가르침, 즉 무아의 가르침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니까 철학적 계보로 보아서는 유식불교唯識佛敎가 아니라 중관불교中觀佛敎 계통에 속한다고 하겠다. 금강승의 가장 뚜렷한 개성은 이 전통이 지식인 중심의 불교가 아니라 민중 중심의 불교를 지향했다는 데 있다. 그래서 금강승은 논리적 담론보다는 문맹자가 많은 민중들을 위해 다양한 방편들을 사용한다. 금강승은 불교 가르침을 요약한 주문인 다라니 dhāraṇī를 외우면 열반에 이를 수 있거나 혹은 악귀와 질병을 쫓을 수 있다고 말한다. 혹은 요가를 통해 몸과 마음을 강건하게 만들어 헛된 집착에 빠지지 않도록 가르치기도 했다. 간혹 섹스마저도 무아의 가르침을 얻는 좋은 방법으로 권하기도 한다.


금강승의 방편은 모두 민중들과 그들의 생활 속에서 찾은 것들이다. 글을 몰라서 소외된 민중들에게 어떻게 부처가 되는 길을 열어줄까 고민했던 금강승의 애정이 짙게 느껴지는 대목이다. 그래서 '작은 수레'를 의미하는 소승小乘도 아니고 '큰 수레'를 의미하는 대승 大乘도 아니고 금강승이라는 이름이 만들어진 것이다. 민중들을 '다이아몬드 수레'에 태우겠다는 각오다. 금강승의 대표적인 경전은 5세기경 인도에서 만들어진 《금강정일체여래진실섭대승현증대교왕경 金剛頂一切如來眞實攝大乘現證大敎王經, Vajraśekhara-sarvatathāgata-tattvasaṃgraha-mahāyāna-pratyutpannābhisambuddha-mahātantrarāja-sūtra》이다. 줄여서 《금강정경金剛頂經, Vajraśekhara-sūtra》이라고 불리는 경전이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그로부터 100여 년 뒤 만들어진 경전 《이취경理趣經》이다. 이 경정은 정식 명칭은 《반야바라밀다이취오백십송 般若波羅蜜多理趣百五十頌, Prajñāpāramitā-naya-śatapañcaśatikā》이다. 《금강정경》의 밀교적 가르침에 따라 《이취경》은 못 배운 민중들이 어떻게 하면 척박한 땅에서 불국토를 이루게 되는지 다양한 방편들을 그들에게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십칠청정구十七淸净句'라고 불리는 17가지 다라니다.


십칠청정구 十七淸净句


17가지 모든 것이 몸과 관련된 것이 대부분이다. 특히 《이취경》이 강조하고 있는 것은 섹스와 감각이다. 아무리 못 배운 민중들이라고 하더라도 감각기관이 있고 성욕이 있는 법이다. 아니 많은 것을 배우지 않아서 오히려 그들에게 감각적 쾌락과 성적 쾌락이 거의 전부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를 통해 그들은 자기만이 아닌 타자가 존재한다는 걸 배우게 된다. 좋은 걸 보고 싶고 맛난 걸 먹고 싶고, 근사한 남자와 몸을 섞고 싶고, 근사한 여자와 섹스를 나누고 싶다. 그렇지만 그것이 모두 뜻대로 되지는 않는다. 처음에는 감각적 희열을 주는 존재를 소유하려고 하지만, 이런 소유욕이 좌절되는 경우도 많다. 맛난 음식을 너무나 많이 먹어서 배탈이 나기도 하고, 너무 짙은 향을 맡아서 후각이 마비되기도 할 것이다. 혹은 사랑하는 이성과의 섹스로 갈등이 벌어지기도 할 것이다.


특히나 이 대목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섹스다. 사랑이 없는 섹스는 상대방을 그저 자위도구로만 소유하려고 드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런 식의 섹스는 나의 쾌락만 중요하고 타자의 쾌락이랑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전제에서나 가능하다. 당연히 섹스가 줄 수 있는 최상의 쾌락을 얻기는 힘든 법이다. 나와 너라는 구분 자체가 사라지는 쾌감이 섹스가 줄 수 있는 최대의 쾌락일 테니 말이다. 결국 섹스에서도 자아에 대한 집착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배울 수 있다. 중관불교는 금강승의 이론적 기초라고 할 수 있다. 중관불교의 창시자 나가르주나 Nāgārjuna (150?~250?)는 자신의 주저 《중론中論, Madhyamaka-śāstra》에서 말했던 적이 있다.


"내我, ātman가 없는데 어찌 나의 것 我所, ātmani이 있을 것인가. 나와 나의 소유가 없으므로 그는 나라는 의식도 없고 소유하려는 의식도 없는 자가 된다. …… 안으로나 밖으로나 나라는 생각이 없고 나의 것이라는 생각이 없다면 집착은 없어질 것이다."

나와 내 욕망이 없어질 때, 우리는 무아를 체험하게 된다. 바로 이럴 때 우리는 불변하는 자아나 소유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다. 섹스에서 이것은 자신보다는 타인의 쾌감을 증진시켜주려는 사랑을 가능하게 한다. 반대로 타인도 자신의 쾌감보다 나의 쾌감을 증진시키려고 노력할 수도 있다. 바로 이럴 때 두 사람은 오르가즘을 체험하게 된다. 내가 타자인지, 타자가 나인지 구별될 수 없는 느낌! 타자가 즐거워 내가 즐거운 것인지, 내가 즐거워 타자가 즐거운 것인지 확인할 수 없는 느낌! 아니 역으로 오르가즘을 느끼는 순간, 나나 타자는 무아의 상태에 이를 수도 있다. 원효가 말한 '자리이타自利利他', 즉 자신도 무아의 경지에 이르도록 하고, 타인도 무아의 경지에 이르도록 한다는 가르침이 현실화되는 순간이다. '십칠청정구'에서 반복되는 청정净, viśuddhi이라는 단어는 바로 이 무아의 상태, 즉 공空의 경지를 가리켰던 셈이다. 그러니까 금강승은 민중들에게 권고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자아나 소유에 대한 집착이 없이 모든 육체적 역량을 실현하라는 것이다.


섹스를 해도 상대방을 소유하려고 해서는 안 되고, 나의 쾌락만 추구해서도 안 된다. 감각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꽃이 보기 좋다고 혹은 향이 좋다고 혼자 소유하려고 꺾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자신도 타자도 실체라고 여길 때에만 강력한 소유욕이 발생하는 법이다. 반대로 모든 것에는 실체가 없다는 걸 안다면, 우리에게는 소유의 욕망 대신 싯다르타가 그렇게도 강조했던 자비 慈悲, maitri-Karuṇā라는 사랑이 가능해진다. 싯다르타는 무아를 이야기했고, 제2의 싯다르타가 불리는 나가르주나는 무아를 공空이란 개념으로 명료화했다. 바로 제법무아 諸法無我, niratmanah sarva-dharma의 가르침이다. 한마디로 모든 것에는 불변하는 실체가 없다는 가르침이다. 당연히 제법무아는 모든 것에 대한 자비의 마음을 낳게 된다. 모든 것을 의미하는 제법 sarva-dharma이라는 말에 주목하자. 그러니 무아나 공의 가르침은 당연히 섹스에도 애무에도 그리움에도 그리고 꾸미는 것에도 적용되어야만 한다. 금강승의 위대한 통찰은 바로 여기에 있다.


기독교 신자이거나 칸트라면, 혹은 공자와 같은 유학자들이 금강승의 '십칠청정구'를 보았다면, 혀를 끌끌 찼을지도 모른다. 어떻게 육체적인 것에서 윤리적인 것을 읽어내려고 하느냐고 비판하면서 말이다. 승려나 불교 신자도 금강승을 나무랄 수 있다. 그들은 감각 대상이나 섹스 대상과는 가까이하지 않아야 싯다르타의 제자라고 강변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어떤 것에 가까이하지 않겠다는 의지도 소유욕의 또 다른 양태라는 걸 간과하고 있다. 금강승에 대한 오해 때문인지 《이취경》은 자신의 입장을 멋지게 표현했던 적이 있다. 금강승은 "연꽃의 몸은 본래 더럽기에 더러운 티끌로 더럽혀지지 않는" 것과 같다고. 어쨌든 금강승 덕분에 이제 민중들은 《중론》과 같은 복잡한 이론서를 읽을 필요가 없다. 아니 읽을 수도 없고 일겅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 어쩌면 더 정직한 평가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금강승은 지식인들이나 귀족층들이 가장 천하게 생각하는 민중들의 삶 속에서 불국토의 씨앗을 뿌리는 데 성공한 것이다.


청정하게 섹스를 해야 한다고 주문을 외우고, 간혹 청정하게 꽃을 봐야 한다고 주문을 외우는 무식한 민중들을 떠올려보라. 그리고 그 주문대로 섹스를 하고 그 주문대로 꽃을 보는 민중들을 생각해보라. 바로 이들이 부처가 아니라면, 누가 부처라는 말인가? 금강승은 바타유가 경악할 수 있는 아주 건강한 에로티즘을 이야기했던 것이다. 일체의 부정의식이 없는 아주 건강한 에로티즘, 금강, 즉 다이아몬드처럼 강고한 에로티즘이다. '십칠청정구'를 보았다면, 바타유는 아마도 자신의 한계를 자각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바타유의 에로티즘은 갖지 못하는 금기가 있기에 더 가지려고 하는 경락한 소유욕에 기초하고 있으니 말이다. 바타유의 에로티즘에서 칙칙한 느낌이 들고, 금강승의 에로티즘에는 봄날 개나리와 같은 풋풋함이 느껴지는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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