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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찌옹수 Jan 31. 2020

에로티즘은 본능적인가? [바타유]

"사회적 금기가 성욕을 인간적으로 만든다."


우리의 상식적인 견해와는 달리 '사치', '소비', '선물'이 더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주장했던 현대철학자가 있다. 그가 바로 보드리야르의 정신적 멘토이기도 했던 바타유 Georges Bataille (1897~1962)였다. 자신의 주저 《저주의 몫 La part Maudite》에서 그는 '절약', '생산', '축적'을 강조하던 기존의 상식적인 경제적 사유를 '제한경제 restrictive economy'라고 규정하면서, 그 논리의 부적절함을 폭로한다. 주어진 체계에 에너지가 들어오면 어느 정도까지 체계는 성장할 수 있지만, 에너지 유입이 그치지 않으면 체계는 폭발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었다. 그래서 체계는 과잉된 에너지를 어떻게 해서든지 외부로 배출해야만 한다. 이것은 체계로서는 사활을 건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따르면 결국 진정한 경제학적 사유는 생산이나 축적보다는 소비나 선물의 논리를 사유할 수 있어야 한다. 바타유는 자신이 제안한 새로운 경제학적 사유를 '일반경제 general economy'라고 규정하고 있다. '일반경제'라는 표현은 글자 그대로 '제한경제'보다 더 일반적이고 포괄적인 사유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가 인류의 무한한 성장과 진보를 약속했지만, 바타유는 생산과 축적이라는 자본주의적 가치는 인류의 파멸을 낳을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사실 그는 20세기에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났던 세계대전도 과잉된 에너지를 소모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라고 진단한다. 그래서 바타유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결단을 촉구했다. 자본주의 체계가 초래하는 '불유쾌한 파멸'의 길을 따라갈 것인가? 아니면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유쾌한 파멸'의 길을 우리가 먼저 선택할 것인가?


넘치는 에너지를 소모하는 것과 그것을 이용하는 것은 다른 일이다. 완벽하고 순수한 상실, 사혈瀉血은 필연적으로 발생하며 애초부터 성장에 사용될 수 없는 초과 에너지는 파멸될 수밖에 없다. 이 피할 수 없는 파멸은 어떤 명목으로든 유용한 것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이제 불유쾌한 파멸보다는 바람직한 파멸, 유쾌한 파멸이 중요해질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분명하게 다를 것이다.
《저주의 몫》


불유쾌한 파멸이란 과잉된 에너지로 체계가 붕괴되면서 이 과잉 에너지를 배출할 때 발생하는 파멸을 의미한다. 한편 바람직한 파멸 혹은 유쾌한 파멸체계의 안정성을 도모하면서 과잉된 에너지를 아무런 대가 없이 소모할 때 발생하는 파멸의 다른 양상이라고 할 수 있다. 가령 이 문제는 다음과 같은 간단한 사례로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계속 먹고서 몸이 폭발할 정도로 비만해지면서 신경질적 반응을 보이면서 살 것인가, 아니면 내수중에 있는 음식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나누어주거나 혹은 운동을 통해 이 과잉된 에너지를 배출하면서 기분 좋게 살 것인가? 전자가 불유쾌한 파멸의 사례라면, 후자가 바로 유쾌한 파멸의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우리가 유쾌한 파멸의 방식을 따른다면 현행 자본주의 체계가 인정할 수 없는 형태의 소비 양식을 선택해야 할 것이다. 과잉된 에너지를 합리적으로 혹은 계산적으로만 이용하려는 자본주의 체계 편에서 보았을 때, 아무런 대가 없이 이루어지는 "완벽하고 순수한 상실"이란 것은 받아들이기 매우 힘든 일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바타유의 지적인 노력은 모두 일반경제를 정당화하려는 데 집중되어 있다. 그는 이 맥락에서 죽음이나 부패와 같은 사례들을 함께 연구하기도 했다. 물론 이런 사례들 역시 바타유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는, 넘치는 에너지를 소멸시키려는 인간의 무의식적인 의지 혹은 일반경제에 대한 인간의 무의식적인 감각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에로티즘에 관한 바타유의 논의 역시 바로 이와 같은 상황에서 출현했던 것이다. 그에게 에로티즘은 소비, 사치, 상실의 가치를 갖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에로티즘은 종족 보존이란 제한경제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유쾌한 파멸과 관련된 일반경제의 문제라는 것이다.


바타유의 에로티즘 논의의 파괴력을 제대로 음미하려면, 먼저 플라톤의 《향연 Symposion》에 등장하는 구절을 읽어볼 필요가 있겠다.

"무엇이 이런 사랑과 욕망의 원인이겠습니까? 걷는 동물이건 나는 동물이건 모든 동물은 생식하기를 원할 때 특별한 상태에 빠져듭니다. 모두 병적인 상태가 됩니다. 사랑으로 인해 병이 듭니다. 처음에는 성교를 하기 위해서, 그다음에는 자식들을 위해서 말입니다." 

이 구절은 에로티즘에 대한 가장 고전적인 이해 방식을 담고 있다. 2,000여 년이 지난 뒤 등장한 에로티즘에 대한 쇼펜하우어의 논의는 플라톤 시대에서 기원하는 통념을 형이상학적으로 체계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매혹적인 이성에 대한 인간의 에로티즘, 즉 플라톤의 표현을 빌리자면 "생식하기를 원할 때 빠지는 특별한 상태"는 결국 종족 보존을 위한 맹목적 의지의 발현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지 않은가? 인간에게 에로티즘은 단순한 생식 기능을 넘어서 무언가 유희의 느낌이 강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관음증, 페티시즘, 자위행위, 그리고 콘돔 등 임신 억제 도구 사용만 보더라도, 인간의 에로티즘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물론 플라톤이나 쇼펜하우어의 입장에서 이런 행위들은 모두 비정상적인 것으로 보일 테지만 말이다. 그래서 에로티즘과 관련된 바타유의 논의가 더 현실적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과거 전통적 생각에 비해 혁명적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이제 드디어 에로티즘과 관련된 그의 육성을 직접 들어볼 차례가 된 것 같다.


에로티즘에 유혹과 공포, 긍정과 부정의 엇갈림이 있으며, 바로 그런 점 때문에 인간의 에로티즘은 단순한 동물의 성행위와는 다르다고 할 수 있다. …… 거꾸로 금기의 대상은 금지되었다는 사실 그 하나만으로 강력한 탐욕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성적인 것과 관련이 있는 금기는 대체로 대상의 성적 가치 (혹은 에로틱한 가치)를 강조하는 결과를 낳는다. …… 금지된 대상에 대한 선망이 없다면 결국 에로티즘도 없을 것이다.
《에로티즘의 역사 L'Histoire de l'érotisme》


쇼펜하우어나 도킨스와 같은 사람들은 인간의 에로티즘이 종족을 보존하기 위한 맹목적 의지나 유전자의 책략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점에서 보면 인간은 다른 생물들과 별다른 차이를 보이지 않을 것이다. 다른 모든 생물종도 종족 보존의 본능에 따라 짝짓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타유만은 인간의 에로티즘이 동물의 성행위와는 전혀 다른 성격을 갖는다고 주장했다. 그에게 인간의 에로티즘은 사회적 금기 그리고 이 금기에 대한 위반의 문제와 밀접한 관련을 갖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은 금지된 것에 대한 강한 욕망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다. 금지된 것에 대한 선망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예외 없이 관찰되는 현상일 것이다. 이런 금지된 것에 대한 인간의 선망이 바로 성적인 대상과 관련될 때, 바타유가 말한 에로티즘이 비로소 강렬하게 발생한다. 바타유가 에로티즘에 "유혹과 공포, 긍정과 부정의 엇갈림"이 존재한다고 이야기했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여기서 우리는 "금기의 대상은 금지되었다는 사실 그 하나만으로 강력한 탐욕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는 바타유의 말은 조금 더 음미할 필요가 있다. 이 지적만큼 인간의 본성이랄까, 아니면 인간의 숙명이나 비극을 간파한 것도 없으니 말이다. 바타유의 지적처럼 인간은 통제하기 어려운 존재다. 통제가 주어진다면, 인간은 그 이유 하나만으로 그 통제를 넘어서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인간에게는 자유의 본능이라고 할 수도 있고, 아니면 모험의 본능이라고도 할 수 있는 묘한 특성이 존재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것은 역으로 우리 인간은 직접적인 욕망 대상을 갖지 못한다는 걸 말해준다. 무언가 금지되어야만 강한 욕망이 작동한다면, 우리의 욕망은 이미 매개된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대목에서 금지를 결정할 수 있는 체계가 인간을 교묘하게 통제할 수 있는 계기도 드러난다. 금지를 적절히 활용하면서 체제는 인간의 욕망을 증폭하고 제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바타유의 통찰은 인간의 자유를 역설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인간의 부자유를 폭로하는 것이기도 하다.


《에로티즘의 역사》라는 책 제목이 말해주는 것처럼 에로티즘에는 역사가 존재한다. 이것은 인간의 에로티즘이 쇼펜하우어의 생각과는 달린 본능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사회적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다양한 인간 사회는 자신만의 금기 체계를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조선시대에는 남녀 사이에 '남녀칠세부동석 男女七歲不同席'이라는 금기가 적용되었다. 일곱 살이 넘은 남녀는 한 곳에 같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들 시대의 사회적 금기 혹은 성적 금기 사항이었다. 따라서 당연한 일이지만 이 시대에서는 남녀가 한 곳에 같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강렬한 에로티즘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일곱 살이 넘은 남녀들이 한 곳에 같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에로티즘을 느끼기는 힘들다. 젊은 남녀가 같이 있는 것이 별다른 금기가 될 수 없는 사회에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아직도 남녀가 함께 있다는 이 사실 하나만으로 에로티즘을 느끼는 살마도 일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그가 아직도 남녀칠세부동석의 지나간 사회적 금기에 의해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바타유는 에로티즘이 생물학적인 짝짓기의 문제로 환원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었다. 그에게 인간의 에로티즘은 사회적으로 금지된 짝짓기에 대한 욕망에 지나지 않는다. 특히 여기서 핵심은 사회적으로 '금지된 것'을 넘어서려는 인간의 욕망이다. '금지'가 사회적 차원을 띤다는 점에서, 이제 에로티즘 역시 '사회적' 층위를 함축하는 욕망을 이해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나아가 '금지'가 역사적 차원을 띤다는 점에서, 에로티즘은 결국 '역사적'층위도 내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에로티즘 문제를 잘 숙고하면, 인간과 동물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간극이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동물이 본능에 따라 성생활을 영위하는 반면, 인간은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의미를 매개로 동물과는 다른 방식의 성생활을 영위하기 때문이다. 라캉은 이렇게 말한다.

"성관계란 존재하지 않는다 il n'y a pas de rapport sexuel"

고. 이것은 물론 인간의 성관계가 사회적 층위를 함축하는 '상징적인 symbolique 것'의 지배를 받는다는 의미이다. 만약 바타유의 통찰이 없었다면, 인간의 성관계에 대한 라캉의 통찰은 우리에게 훨씬 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되었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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