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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찌옹수 Jan 23. 2020

에로티즘은 본능적인가? [쇼펜하우어]

"생의 맹목적 의지가 인간의 성욕을 촉발한다."


칸트 Kant, 스피노자 Spinoza

현상세계실체세계를 구분하면서, 칸트 Immanuel Kant (1724~1804)는 실체세계가 우리의 감성을 촉발할 뿐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대상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인도 사상, 특히 힌두교와 불교에서 깊은 영향을 받은 쇼펜하우어 Arthur Schopenhauer (1788~1860)는 현상과 실체라는 칸트의 도식을 새롭게 해석해낸다. 그는 물자체를 이제 칸트와 달리 맹목적인 의지라고 정의 내렸다. 여기서 맹목적 의지는 무언가를 촉발하고 발생하는 어떤 힘으로 이해하면 쉽다. 사실 의지의 맹목성은 우리 입장에서만 맹목적인 것으로 보일 뿐이다. 의지의 입장에서는 자신을 보존해야 한다는 명확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스피노자 Baruch Spinoza (1632~1677)의 영향이 짙게 드리워진 대목이다. 어쨌든 쇼펜하우어에게 현상세계란 단지 맹목적 의지가 드러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사실 우리의 감성을 촉발하는 물자체만이 맹목적인 의지인 것은 아니다. 현상세계를 인식하고 있는 인간 자체도 맹목적 의지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 자신도 물자체의 범주에 들어간다는 점에서, 인간 자체가 맹목적 의지에 지배된다는 생각은 당연한 귀결 일 것이다.


이제 쇼펜하우어에게서 근대 독일 철학의 화두였던 투명한 '자기의식'의 논의도 희석되고 만다. 외부의 물 자체도 알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자기 자신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의 현상적인 의지, 혹은 개체적인 의지가 절대적이고 유일한 우주론적 의지의 한 가지 구체적 실현 양상이라고 이해했다. 이 부분에서 힌두교가 주장하는 범아일여梵我一如의 사상이 그에게 미친 영향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범아일여 사상에 따르면 우주적 신인 브라흐만 brahman, 즉 범梵과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개체들의 아트만 Ātman, 즉 아我는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자신의 삶을 유지하려는 개체적 의지는 다른 개체들의 의지와 충돌하고 갈등할 수밖에 없다. 바로 여기서 인간 삶의 비참함과 고통이 시작된다고 쇼펜하우어는 생각했다. 그러나 개체적 의지 이면에는 더 거대한 맹목적 의지가 도도하게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쇼펜하우어가 개체적 의지를 부정하라고 권고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이럴 때 더 거대한 의지가 우리를 통해 분출할 테니 말이다. 이럴 때 브라흐만적인 의지와 아트만적 의지는 그야말로 범아일여의 경지로 통일된다. 이러한 관점을 가진 그에게 인간에로티즘, 혹은 성욕이란 것은 개체들의 작은 의지와 그 이면에 존재하는 더 거대한 맹목적 의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였다고 할 수 있다.


성욕은 정욕 중에서 가장 격심한 것으로 욕망 중의 욕망, 즉 우리의 모든 욕망의 집결체이다. 그리고 개인적인 성욕, 즉 어떤 특정한 개인을 대상으로 한 그 사람 고유의 성욕의 만족은 행복에 대한 결정이자, 하나의 왕관이며, 이것만 손에 넣으면 모든 것을 얻게 되는 것이고, 반면에 이것을 손에 넣지 못하면 모든 것에 실패한 듯이 생각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욕의 생물학적 측면으로서 객체화된 의지 속에서, 다시 말해 인간의 조직 속에서 호르몬이 분비물 중의 분비물이며 모든 액체의 정수이고, 유기적인 모든 기능의 최종 결과임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Die Welt als Wille und Vorstellung》


쇼펜하우어에게 성욕, 혹은 에로티즘은 정신과 관련된 것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우리 인간 개체의 전 실존, 즉 정신적 측면과 육체적 측면을 포괄하는 맹목적 의지의 실현으로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우선 정신적으로 보면 성욕이란 것은 그의 말대로 "어떤 특정한 개인을 대상으로 해서 그 사람을 통해 성욕이 만족되면 모든 것을 얻을 것 같은" 확신을 정신에 심어준다. 하지만 쇼펜하우어는 성욕에 빠진 인간의 신체적 변화도 간과하지 않았다. 어떤 성적 대상에 에로티즘을 느낀 우리의 몸에는 호르몬이 저절로 분비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에게 "호르몬은 분비물 중의 분비물이며 모든 액체의 정수이고, 유기적인 모든 기능의 최종 결과"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정신적 차원과 육체적 차원에서 동시에 작동하는 개체의 성욕을 통해 맹목적 의지가 진정으로 실현하길 원했던 것은 무엇일까? 쇼펜하우어는 종족 보존이라는 측면에서 그 문제의 답을 구한다.


본래 사랑하는 두 남녀의 애정이 깊어진다는 것은 이미 이 두 사람이 낳을 수 있고, 또 낳고 싶어 하는 새로운 개인의 삶에 대한 의지를 말한다. 이뿐만 아니라 두 사람이 서로 눈짓을 교환할 때 이미 새로운 삶이 꿈틀거리고 있으며, 장차 잘 조화되고 결합된 개성으로서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사랑하는 두 사람은 자기들이 만들 새로운 생명을 통하여 장래에도 계속해 살아가기 위해 현실에 하나의 존재로 결합되고 융합되기를 동경하는 마음을 갖는다. 이 동경은 두 사람이 갖고 있는 각각의 개성이 새로운 생명 속에서 유전되고 결합되고 융합되었을 경우에 이 새로운 생명에 의해 열매를 맺게 된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헤겔 (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

성욕, 에로티즘, 사랑은 오직 하나의 목적, 즉 종족 보존을 실현하기 위 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 이것이 쇼펜하우어의 근본적인 입장이었다. 그래서 "사랑하는 두 사람은 자기들이 만들 새로운 생명을 통하여 장래에도 계속해 살아가려고 한다"는 그의 말이 중요하다. 사실 새로운 생명을 낳는다고 해서 사랑하는 두 사람이 계속해서 함께 살 수는 없는 법이다. 마지막까지 계속 살아가는 것은 인간이라는 종족 그 자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정확히 말해 종족 보존의 의지, 혹은 맹목적 생존 의지가 사랑하는 두 사람을 매개로 삼아 새로운 개체로 전달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점에서 쇼펜 하우어는 일정 부분 헤겔 (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의 역사철학 테마를 다른 방식으로 반복하고 있다 고 할 수 있다. 《역사 철학 강의》에서 헤겔은 역사를 '이성의 간지 List der Vernunft'라고 규정했다. 헤겔에 따르면 역사를 이끌어가는 주체는 인간 개체들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진정한 주체는 인간 개체들을 조종하는 이성, 즉 절대정신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이성의 간지'라는 개념은 쇼펜하우어의 에로티즘이나 사랑 개념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물론 이성의 간지보다는 '의지의 간지 List der Wille'라는 표현이 더 정확하겠지만 말이다.


도킨스 Richard Dawkins (1941~)

표면적으로 사랑하는 남녀가 자유롭게 사랑과 결혼 생활을 영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종족을 보존하려는 맹목적인 삶의 의지의 한 책략, 혹은 한 가지 계기에 지나지 않는다. 사랑하는 남녀는 단지 맹목적 의지의 간지에 빠져서 허우적거리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쇼펜하우어의 발상이 아직도 생물학에서는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기적 유전자 The selfish gene》에서 도킨스 Richard Dawkins (1941~)는 생명의 운동에서 인간 개개인은 매체에 지나지 않을 뿐 생명의 진정한 주인공은 바로 유전자라고 주장했다. 이에 따르면 모든 개별적 생명체들은 유전자의 의도를 실현하고 있는 단계적 매체에 불과하다. 정말 흥미로운 일이다. 가장 세련되어 보이는 현대 생물학의 유전자 논리가 쇼펜하우어의 논리, 더 나아가 헤겔의 논리를 생물학 영역에서 무의식적으로 반복하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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