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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찌옹수 Jan 21. 2020

에로티즘은 본능적인가?

쾌락원리와 현실원리 사이에서


라캉 Jacques Lacan (1901~1981)

라캉 Jacques Lacan (1901~1981)이 이야기했던 것처럼 욕구 need욕망 desire은 다른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들뢰즈 Gilles Deleuze (1925~1995)는 반대하겠지만 라캉에게 욕구나 욕망은 모두 어떤 결여를 전제로 하는 개념이다. 그런데 욕구가 단순히 부족한 무엇인가를 얻으면 간단히 충족되는 것인 반면, 욕망은 단순한 충족을 뒤로 연기하면서도 여전히 충족을 지향하는 복합적인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가령 동물이나 인간은 모두 배고픔을 느끼는데, 이 가운데 오직 인간만이 배고픔에 대한 직접적인 충족을 뒤로 미룰 수 있다. 인간만이 애피타이저를 즐기고 상대방과 대화를 나누면서 배고픔의 완전한 충족을 뒤로 미룰 수 있다. 이것은 성욕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성적으로 성숙해지면 동물이나 인간은 모두 성적인 결핍감을 느낀다. 동물이 발정기가 되면 허겁지겁 짝짓기를 하는 반면, 인간은 이성에게 성적 욕구를 느끼지만 그럼에도 직접적인 욕구의 충족은 뒤로 미루곤 한다. 상대방과 와인을 마시며 환담을 나누거나 혹은 가볍게 애무와 키스를 나누면서 직접적인 성교를 뒤로 미루는 것이 등이 바로 이러한 사례이다.


그렇다면 인간에게만 고유한 욕망, 동물이 보기에는 너무도 번잡해 보이기까지 하는 이런 복잡한 경로의 욕망은 어떻게 해서 발생하는 것일까? 우리는 그에 대한 실마리를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서 찾을 수 있다.


'쾌락―자아'는 쾌락을 '소망'하며, 다시 말해 쾌락 생산에만 매진하고 불쾌는 회피하려고 노력한다. 마찬가지로 '현실―자아'는 '유용한' 것만을 추구하고 손상을 당하지 않으려고 스스로의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 사실은 쾌락원리를 현실원리로 대체한다고 해서 쾌락원리를 완전히 폐기해버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와 같은 현실원리의 대체가 쾌락원리를 보호한다고 할 수 있다. 그 결과가 불확실한 어떤 순간적인 쾌락은 포기되지만 그것은 새로운 걸을 통해서 나중에 더욱 확실한 쾌락을 보장받기 위해서이다.
《정신적 기능의 두 가지 원칙 Formulierungen über die zwei Prinzipien des psychischen Geschehens》


쾌락원리에 지배되는 '쾌락―자아'는 쾌감을 지향하고 불쾌함을 피하는 데 모든 관심을 집중한다. 이런 '쾌락―자아'는 갓난아기에게서 더 분명히 관찰되는 자아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보자. 배고픔이 불쾌감으로 다가온다면, 갓난아이는 배를 채움으로써 불쾌감을 피하려고 할 것이다. 반면 어머니의 가슴이 주는 온기가 쾌감을 준다면, 갓난아이는 어머니의 가슴에 파고들려고 할 것이다. 아주 어렸을 때는 자신의 욕구가 대부분 손쉽게 충족되는 것을 느끼겠지만, 점차 한두 살 나이를 먹으면서 주변 상황이 달라지는 것을 감지하니 않을 수 없다. 가령 할아버지 제사장의 음식을 보았을 때 이 어린아이가 멋모르고 덥석 음식을 접었다고 해보자. 그 순간 이 아이는 자신의 부모에게서 따가운 눈총을 받거나 아니면 등짝을 한 대 얻어맞을 수도 있다. 이것은 이 아이에게 일종의 트라우마가 될 수 있는데, 최초의 타자로서 어머니 혹은 아버지가 보내는 차가운 시선이 아이로 하여금 자신의 존재에 대한 불안감을 느끼도록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어머니의 관심과 사랑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아이가 어머니의 사랑이 철회될 수도 있고 혹은 사라질 수도 있다는 불안감을 점차 의식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메커니즘을 통해 기존의 '쾌락―자아'는 '현실―자아'로 변형된다. 이때 '현실―자아'라는 것은 결국 현실원리 Realitätsprinzip, reality principle를 수용한 자아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현실―자아'란 직접적인 욕구 충족을 뒤로 미룰 수 있는, 혹은 미룰 수밖에 없는 주체를 가리킨다. 앞서 언급한 아이는 이제 제사를 모두 마칠 때까지 자신의 배고픔을 참을 수 있게 된다. 아니 반드시 참아야만 한다. 이것은 어머니의 욕망, 즉 "내 아이가 제사가 끝난 뒤에 음식을 먹기를 바라는" 어머니의 욕망을 아기가 수용한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안정적인 생존을 위해 '현실―자아'는 어머니가 사랑할 만한 대상이 되려고 노력해야 하기 때문이다. 오직 그럴 때에만 어머니의 관심과 애정이 지속적으로 확보된다는 것을 아 아이도 이미 알게 된 셈이다.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는 《에크리 Écrits 》에 나타나는 라캉의 정의, 즉 욕망에 대한 그의 난해한 정의를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 하나를 얻을 수 있다.


욕망 désir은 충족을 위한 충동도 아니고 사랑을 위한 요구 demande도 아니고, 후자에서 전자를 뺀 차이이다.
《에크리》


여기서 '충족을 위한 충동'이란 것이 곧 욕구를 의미하는 것이다. 제사 음식을 보고 아이의 내면에 발생하는 먹고 싶은 충동이 그 사례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충족을 위한 충동'은 프로이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쾌락원리 Lustprinzip, pleasure principle에 지배를 받는 거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사랑을 위한 요구'는 어머니의 지속적인 관심과 애정을 바라는 요구를 말한다. '사랑을 위한 요구'가 '충족을 위한 충동'보다는 더 간접적이고 더 지속적인 힘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랑을 위한 요구'가 달성되면, 아이는 어머니로부터 지금 당장 없는 것이지만 앞으로 다양한 쾌락을 제공받을 수 있으리라 기대할 수 있다. 하긴 어머니의 사랑을 받는다면, 아이는 제사음식뿐만 아니라 달콤한 아이스크림, 혹은 쾌적한 잠자리 등을 제공받을 수 있는 법이다. 이처럼 '사랑을 위한 요구'는 충족을 위한 충동'과는 달리 현실원리에 지배된다.


라캉은 욕망이 '충족을 위한 충동'도 아니고 그렇다고 '사랑을 위한 요구'도 아니라고 명확히 한다. 그의 말대로 '사랑을 위한 요구'에서 '충족을 위한 충동'을 빼고 남은 것이 바로 욕망이기 때문이다. 제사음식을 먹고 싶은 '충족을 위한 충동'을 '사랑을 위한 요구'로 억누르면, 그때에만 우리는 제사음식에 대한 욕망이 발생한가는 것이다. 그러니까 라캉의 지적에 따른다면 욕망이란 것은, 배고픔을 채우려는 자신의 욕구를 주체가 현실원리를 수용하면서 미룰 때 발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욕망이 '쾌락원리'와 '현실원리' 사이의 차이, 혹은 욕구의 주체와 사회적 금기 사이의 차이라고도 정의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여기서 현실원리라는 것은 어머니라는 최초의 타자를 매개로 해서 수용된 사회적 규범 혹은 사회적 금기와 다름없는 것이다. 성적 욕망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성적 욕망도 단순히 성적인 욕구를 채우는 것과는 구별될 필요가 있다. 라캉에 따르면 이성에 대한 성적인 욕망도, '사랑을 위한 요구'에서 '성적인 욕구', 즉 직접적인 충족에 대한 욕구를 뺀 차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경우 '사랑을 위한 요구'도 어머니를 대표로 하는 현실 원리와 다름이 없다.


아우구스티누스 Augustinus, 쇼펜하우어 Schopenhauer

불행히도 프로이트와 라캉 이전에는 성적인 욕망이란 것이 성적인 욕구와 별다른 차이가 없는 것으로 사유되었다. 이것은 인간의 에로티즘을 동물적인 충동으로 사유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고백록 Confessiones》에서 아우구스티누스 Aurelius Augustinus (354~430)는 자신의 의지를 통제할 수 없는 에로티즘이 모든 고통의 기원이라고 고백했다. 그는 육체적이고 동물적인 에로티즘을 극복하고 신에 대한 정신적인 사랑으로 개종하려고 했던 인물이다. 이것은 물론 육체보다 영혼의 우월성을 유독 강조했던 플라톤 철학의 유산이기도 했다. 하지만 18세기에 들어와서 에로티즘을 단순히 육체적인 것이 아니라 종족 보존을 위한 삶의 의지로 긍정하려는 사유 경향이 일부 대두되었다. 아마도 쇼펜하우어 Arthur Schopenhauer (1788~1860)가 그 대표적인 사상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에로티즘이 개체의 단순한 욕구가 아니라 개체에 내재된 종을 보존하겠다는 맹목적 의지의 발현쯤으로 이해한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인간 욕망을 동물적 충동과 같은 것으로 사유하고 있다는 맹점은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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