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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찌옹수 Jun 24. 2019

폭력은 없을 수가 없다! 최소화할 뿐.

살아 있는 모든 것에 대한 감수성 <철학이 필요한 시간>

메를로 퐁티(Maurice Merleau-Ponty, 1908-1961)의 말은 우리 가슴을 아리게 한다. "우리는 순진무구함과 폭력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폭력의 종류를 선택하는 것이다. 우리가 신체를 가지고 있는 한 폭력은 숙명이다."<휴머니즘과 폭력(Humanisme et Terreur)>에 나오는 말이다. 그렇다 유한자인 우리는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다른 것을 파괴해야만 한다. 돌아보라. 생명을 유지하게 위해 우리는 오늘도 무엇인가를 먹고 있다. 사실 나 한 사람만 태어나지 않았어도, 수천 마리의 닭과 수천 마리의 물고기 등은 아직도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것은 다른 생명체에 대해서만 적용되는 것일까? 나 때문에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냈던 가족들, 그리고 나로 인해 상처 받았던 타인들을 떠올려보자. 결국 살아간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불교에서도 우리의 삶이 고해(苦海), 즉 고통의 바다에 내던져져 있다고 말한다. 삶 자체가 타자에 대한 폭력이라면, 살아 있는 동안 고통의 바다로부터 벗어날 가능성은 없을 것이다. 타자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기고 심지어 죽이면서까지 살아야 하는 이유가 있는가? 이것이 바로 우리의 번뇌와 고통의 기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옷깃을 여미고 메를로 퐁티의 조언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아직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다. 그래도 우리는 "폭력의 종류를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최소한의 폭력을 선택할 수 있다. 물론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적어도 다음과 같은 감수성을 갖출 필요가 있다. 그것은 다른 인간이나 다른 생명체도 나와 마찬가지로 '상처 받을 수 있는 가능성(Vulnerability)', 즉 보호받아야 하는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지적인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감성의 차원에서도 알고 느껴야 한다는 것이다.


대략 1,000여 년 전 명도(明道)라는 호로 더 유명한 정호(程顥, 1032-1085)라는 유학자가 고민했던 것도 바로 이 점이었다. 어떻게 하면 인간이 타자에 대한 감수성을 확보할 수 있을까? 사실 이것은 중국 송(宋) 나라 시절 유학자들의 공통된 화두이기도 했다. 정호의 선배 유학자인 주돈이(周敦頤, 1017-1073)는 창 앞의 잡초를 뽑지 않았다고 한다. 지저분하게 우거져 있는 잡초를 보면서 누군가가 왜 잡초를 제거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내 뜻과 같기 때문이다(與自家意思一般)"라고 말했다. 정호의 가슴에는 주돈이의 대답이 평생의 화두로 남게 된다. 주돈이의 속내에 조금씩 조금씩 접근하다가 마침내 정호는 한 가지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


의학 서적에서는 신체의 일부가 마비되면 '불인(不仁)하다'라고 표현한다. 이것은 인(仁)이란 명칭의 형상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다. 인자(仁者)는 천지만물을 한 몸이라고 여기므로, 어떤 것도 자신의 일부가 아닌 것이 없다. 자신이라고 여기니 어디인들 이르지 못하겠는가? 만일 자신에게 있지 않다면, 자연히 자신과 상관이 없는 것으로, 마치 수족이 마비되어 기(氣)가 통하지 못하면 모두 자신에게 속하지 않는 것과 같다.
<이정집(二程集)>


<황제내경(黃帝內經)>이라는 동양의학 서적을 넘기다 정호는 인(仁)이란 개념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책에서 신체가 마비되어 감각이 없는 상태가 '불인(不仁)'이라고 기재되어 있었다. 맞는 말이다. 사실 누군가 마비된 자신의 다리를 꼬집는다고 해도 우리는 별다른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 마비되어 더 이상 어떤 통증도 느끼지 못하는 다리는 과연 나의 다리라고 할 수 있을까? 정호는 겉으로는 나의 몸에 붙어 있지만 마비된 다리는 나의 것이 아니라고 단언한다. 그렇다면 고통에 빠진 타인을 보았을 때 그와 비슷하게 고통을 느낀다면, 그 사람은 나의 것이라고 할 수 있는가? 정호는 단호하게 그렇다고 이야기한다. 날개를 다친 새, 굶주린 고양이, 심지어 시들어가는 소나무를 보고서 고통을 느낀다면, 새, 고양이, 소나무는 바로 나의 것이다.


정호에게는 인이란 개념은 다른 무엇보다도 고통의 공감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사실 이것은 맹자가 강조했던 측은지심(惻隱之心)의 의미이기도 하다. 맹자는 아이가 우물에 빠지려고 할 때, 이간이라면 누구나 아이를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이 생길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 타자의 고통에 공감할 수 있다는 것은 측은 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 다시 말해 인(仁)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지만 사람은 천차만별이다. 자신의 몸에서 느끼는 고통만 느끼는 사람도 있고, 가족 성원의 고통만 느끼는 사람도 있으며, 민족의 고통만 느끼는 사람도 있다. 그렇지만 사람이든 다른 종의 생명이든 모든 타자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인 것처럼 느끼는 사람도 있다. 바로 이 사람이 성인(聖人)이다.


그래서 성인에게 있어 자신과 모든 타자는 하나의 몸으로 묶일 수 있다. 고통을 느끼는 범위만큼이나 나의 것이니까 말이다. 이것이 바로 정호가 '일체만물(一切萬物)'라고 묘사했던 경지이다. 이것은 '모든 만물을 하나의 몸으로 본다'는 뜻이다.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다리는 죽은 다리일 수밖에 없다. 나아가 타인이 고통스러울 때도 그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한다면, 우리에게 타인은 죽은 사람일 수밖에 없다.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결론이 도출된다. 그것은 삶이란 고통이자 고통에 대한 감수성이라는 통찰이다. 결코 희망판 메시지는 아니다. 삶이 고통이라니 말이다. 마침내 정호는 타자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이야말로 공자나 맹자가 가르치려고 했던 비밀이었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된 것이다. 그가 제자들로 하여금 고통에 대한 감수성을 길러 주려고 했던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맥박을 짚어보면 인(仁)을 가장 잘 체득할 수 있다. 병아리를 보라!
<이정집>


정호의 가르침은 구체적이지만 매우 상징적이다. 우선 맥박을 잡아보라고 시킨다. 만약 다리의 맥을 짚었을 때 다리의 맥박이 느껴진다면, 혹은 손의 맥을 짚어서 손의 맥박이 느껴진다면, 다리와 손은 나의 것이다. 반면 맥박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그래서 더 이상 나의 것일 수 없다. 이어서 정호는 제자들에게 공감의 논리를 자신의 신체뿐만 아니라 외부 생명체로까지 확장하라고 권고한다. 조용한 봄날 정원을 위태롭게 걸어가는 여린 병아리를 보라! 병아리는 상처 받을 수 있는 가능성, 다시 말해 고통받을 수 있는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약한 존재다. 그래서 병아리는 취약한 삶, 돌보아야 할 삶, 고통을 함께해야 할 타자의 삶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공감(共感)의 정신! 정호는 마침내 주돈이가 왜 정원의 잡초들을 제거할 수 없었는지를 이해하게 된 것이다. 잡초의 뜻이 "내 뜻과 같다"는 주돈이의 말은 그가 잔혹하게 뽑힌 잡초의 고통에 공감할 수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주돈이는 잡초도 한 몸으로 느끼는 성인의 경지에 이를 수 있었던 셈이다. 잡초를 한 몸으로 느끼는 순간, 혹은 병아리를 한 몸으로 느끼는 순간, 주돈이와 정호는 자신도 하나의 잡초이고 병아리라는 사실을 자각했던 것은 아닐까? 자신들도 언제든지 잡초처럼 뽑히거나 혹은 병아리처럼 쉽게 병들어 죽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는 타자에 대한 폭력으로서 존재한다는 메를로 퐁티의 탄식이 묘한 공명을 일으키는 대목이다. 최소한의 폭력을 행사하려는 겸손함,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주돈이, 정호 그리고 메를로 퐁티를 관통하는 핵심 정신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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