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정 시대에 너무 잘 맞아떨어지는 사람, 모든 면에서 완벽히 시대에 묶여 있는 사람은 동시대인이 아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 때문에 그들은 시대를 쳐다보지도, 확고히 응시하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 Giorgio Agamben, <벌거벗음> -
'사람'이라는 단어를 '영화로 바꾸어 놓는다.
"특정 시대에 너무 잘 맞아떨어지는 영화, 모든 면에서 완벽히 시대에 묶여 있는 영화는 동시대 영화가 아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 때문에 그 영화들은 시대를 쳐다보지도, 확고히 응시하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어떤 영화를 선택할 것인가? 그것은 선택한 영화들을 통해 과연 무엇을 말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연결된다.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은 쉽다. 어떤 작품을 선택하든지 간에 그 영화를 통해 말해야 하는 것은 저 먼 미래나 흘러간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는 영화를 통해 동시대를 이야기해야만 한다. 무엇인가를 본다는 것, 무엇인가를 경험한다는 것은 점성술처럼 신비로운 것이 아니다. 그저 내가 속한 시대를 좀 더 이해하고 싶은 열망일 따름이다. 그렇다면 동시대 영화를 선택하는 것이야말로 동시대를 말하고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되지 않겠는가? 동시대 영화야말로 정서, 감성, 생각, 이데올로기를 보여 주는 것들이 아니겠는가?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사정을 면밀히 들여다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걸그룹의 다리나 보이 그룹의 복근은 동시대에 속한 것이기는 하다. 하지만 그들이 지닌 매끄러운 표면은 결코 동시대를 바라보도록 이끌지는 못한다. 너무나 매끈하고 아름다운 동시대의 이미지들은 오히려 눈을 멀게 만들어 버린다. 그것은 응시하기를 방해한다. 다리와 복근에 대해 제대로 말할 수 있는 시점은 시간이 지난 뒤에야 가능할 것이다. 매끄러운 표면의 아름다움에 퇴적층이 쌓인 후에야 비로소 지층을 거둬 내고 그것들이 지닌 동시대적인 의미를 생각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시간의 지층을 뚫고 들어가 그 작품의 동 시대성을 기꺼이 발굴 해 내고자 할 것이다.
영화를 통해 동시대를 응시하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동시대를 제대로 응시하기 위해서는 동시대에 묶여 있는 작품들이 아니라 일정한 '시차'를 두고 지층을 거둬낼 수 있는 작품들이 필요하다. 시차야말로 동시대를 들여다볼 틈을 만들어 준다.
강력한 시차를 찾아 영화의 기원으로 내려간다. 1895년. 뤼미에르 형제가 프랑스의 리옹에서 영화를 찍기 시작했다. 이 무렵 영화는 새로운 발명품으로 각광받고 있었다. 미국의 에디슨은 키네토스코프를 발명한다. 이 장비는 만화경처럼 홀로 영화를 감상할 수 있는 상자였다. 뤼미에르 형제 중에서 솜씨가 좋은 동생 루이가 당대의 발명품들에 자국을 받아 시네마토그라프를 발명한다. 이 장비는 촬영기로도 사용될 뿐만 아니라 뒤집어 놓으면 영상기로도 쓰일 수 있다. 다른 발명품들에 비해 작고 가볍다는 것도 장점이었다.
무엇보다 시네마토그라프는 키네토스코프와는 달리 영사를 통해 한 편의 영화를 동시에 여러 사람이 관람할 수가 있었다. 그것은 오늘날의 극장 문화가 되었다. 시네마토그라프에서 발전한 새로운 시스템들이 20세기 기술사와 함께 발달하면서 스크린은 점점 거대해졌고, 영화는 인류의 문화가 되었다. 그렇다면 뤼미에르 형제의 승리로 영화사는 종결된 것인가?
지금의 상황은 다르게 전개되고 있다. 키네토스코프라는 이름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오늘날 키네토스코프는 스마트폰, 노트북, 각종 개인용 멀티미디어 기기 속에서 부활하였다. 거리를 보면 알 수 있다. 지하철에서, 버스에서, 카페에 앉아 21세기 관객들은 시네마토그라프보다 키네토스코프를 더 사랑한다.
영화가 집단적으로 경험되는 것이라는 사실이 유지되고 있기는 하지만, 확산되고 있는 것은 개인이 관람하는 방식이다. 그것은 영화 경험의 변천사를 돌아보게 만든다. 처음에는 집단적 경험과 개인적 경험의 방식 사이에 갈등이 있었다. 이후 집단적 경험, 즉 영화는 혁명의 경험으로 번져갔다. 독일의 비평가 발터 벤야민은 러시아 몽타주 영화를 보며 열광한 후 <기술 복제 시대의 예술 작품>이라는 영화의 새로운 아우라를 예찬하는 글을 쓴다. 그러나 벤야민이 이 글을 선 보인 지 백 년도 지나지 않아, 이 열광은 곧 개인의 경험 시대를 통과하게 된다. 영화의 기원이 이것을 보여준다. 거기에는 영화의 변천사를 이루는 모든 것이 있었다. 오늘날 새로운 것은 알고 보면 익숙한 것들이다. 시차의 발견은 이 모든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끝내 영화를 완성하는 것은 관객들이다. 한 편의 영화는 어떠한 방식으로든지 관객의 시선을 통해 경험될 때 의미를 얻는다. 제 아무리 고전과 걸작의 이름을 달고 있다고 해도 보이지 않는다면, 읽히지 않는다면 무용지물이다. 오늘날 영화에 대한 말들은 그 어느 때보다 범람하고 있지만, 정작 영화를 응시하고 들여다보고 생각하면서 동시대를 사유하는 말들은 사라져 가고 있다. 이 글의 멸망은 시대의 뒤안길로 접어든 영화의 성찰을 다시금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그리하여 영화와 함께 영화의 언어가 타오르는 것이다.
더욱 강력하게 희망하는 것은 이 글을 읽고 난 뒤에는 보는 영화가 새로운 관람의 경험으로 이어지기를 원한다는 점이다. 한 권의 책이 한 편의 영화를 낳고, 한 편의 영화가 또 다른 후대의 이야기를 낳으며, 이렇게 진행형으로 흘러가야 한다. 우리는 그 영화들을 예찬할 따름이다. 서로를 향해 비난하기보다는 축복하고 격려하면서 열정의 에너지를 나누기를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