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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얼마나 새로운 매체인가? [리오타르]

영화는 전복적인 쾌락을 제공할 수 있다

by 찌옹수

리오타르: "영화는 전복적인 쾌락을 제공할 수 있다."

메를로-퐁티 Maurice Merleau-Ponty (1908~1961)

어둠 속에서 밝음은 더 밝아 보인다. 어두운 동굴을 지나서 출구가 보여주는 광명처럼 말이다. 영화관은 일종의 동굴이고, 스크린은 광명을 보여주는 출구와 같다. 그러니 스크린에 비친 등장인물들의 몸동작, 즉 행동은 그만큼 우리에게 지워지지 않는 강한 상처를 새기기 마련이다. 꼬맹이들이 영화관을 나오자마자 바로 주인공의 행동을 흉내 내는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그래서 영화에서 행동을 배운다는 메를로-퐁티 Maurice Merleau-Ponty (1908~1961)의 통찰은 매우 중요하다. 그렇지만 모방되는 모든 행동이 좋은 것만은 아니다. 체제는 체제 나름대로 체제에 도움이 되는 행동과 그런 행동을 구분할 것이고, 개개인은 자신의 삶에 도움이 되는 행동과 그렇지 않은 행동을 구분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 영화에 관한 메를로-퐁티의 통찰에는 가치 평가의 문제가 누락되어 있었던 것이다. 지배자를 위해 좋은 영화는 억압받는 사람에게 나쁜 영화일 수밖에 없고, 반대로 지배자들에게 나쁜 영화는 억압받는 사람에게는 유익한 영화일 수 있다.


리오타르 Jean-François Lyotard (1924~1998)

영화라는 매체는 노예의 행동을 가르쳐줄 수도 있고, 아니면 주인의 행동을 가르쳐줄 수도 있다. 이 점에서 영화와 관련해서 메를로-퐁티는 순진했다고 할 수 있다. 우리 시대 체제의 내적 논리에는 자본의 맹목적 충동이 자리 잡고 있다. 결국 자본주의 체제에 순응하는 행동을 가르칠 수도 있고, 아니면 그에 저항하는 행동, 다시 말해 자본주의 논리와는 무관한 행동도 가르쳐줄 수도 있다. 리오타르 Jean-François Lyotard (1924~1998)가 중요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를 통해 우리는 속칭 할리우드나 영화제 수상작으로 대변되는 주류 영화와 그 반대로 체제의 흐름을 교란시키거나 파열시키는 비주류 영화 구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리오타르는 전자를 '영화 Cinema'로, 후자를 '반영화 acinema'라고 부른다. 그렇다고 해서 리오타르가 정치적 신념에 입각해서 반영화를 옹호하고 있다고 속단해서는 안된다. 반영화에 대한 리오타르의 입장은 반영화가 일깨우는 감각이 인간 개개인의 진정한 희열에 더 가깝다는 그의 통찰에 근거하니까 말이다.


켜진 성냥은 소비된다. 일하러 가기 전에 커피 물을 데우고자 당신이 성냥으로 불을 켠다면, 이 소비는 비생산적이 않다. 그것은 '상품-성냥', '상품-노동력', '봉급-돈, '상품-성냥'으로 이어지는 자본의 순환에 속하는 움직임이다. 그러나 아이가 보기 위해 쓸데없이 성녕을 켤 때는 아이는 단지 움직임을 좋아하는 것이다. 차례차례 바뀌어가는 색채를, 켤 때 정점에 오르는 빛을, 작은 성냥개비의 소멸을, 쉬익 하는 소리를 좋아하는 것이다. 따라서 아이는 아무것도 만들어내지 않는 비생산적 차이를 좋아하는 것이다.
≪영화:이론, 강연≫, <반영화>


하위징아 Johan Huizinga (1872~1945)

하위징아 Johan Huizinga (1872~1945)는 1938년에 출간된 자신의 주저 <호모루덴스>에서 인간은 근본적으로 놀이하는 존재라고 역설했던 적이 있다. 수단과 목적의 분리가 노동이라면, 수단과 목적의 일치가 바로 놀이라고 할 수 있다. 대개의 경우 어른들이 성냥을 켤 때는 일종의 노동이라고 할 수 있다. 리오타르의 말처럼 "커피 물을 데우기" 위해 어른들은 성냥을 켜니까 말이다. 반대로 아이의 경우에는 그냥 성냥을 켠다. 리오타르의 말대로 아이들은 "쓸데없이 성냥을 켜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어른의 켜진 성냥은 사라지지만, 그 대가로 따뜻한 커피 물이 남는다. 반면 아이의 켜진 성냥은 아무것도 만들지 않고 허무하게 사라지고 만다. 그렇지만 성냥이 켜지고 꺼질 때까지 아이는 세상 누구도 부러워하지 않을 정도로 행복에 젖어들게 된다.


수단과 목적을 나뉜 노동의 세계, 즉 자본의 세계에서는 현재 주어진 계기는 단지 수단으로 보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 향유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수단은 항상 미래에 실현할 목적을 위해 소멸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미래에 실현된 목적은 바로 그 순간 또 다른 미래의 목적을 위해 소명되어야 할 수단으로 변신한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다람쥐 쳇바퀴처럼 수단과 목적의 회로에 갇힌 순간, 우리에게 행복은 항상 유보되고 연기될 수밖에 없다. 반면 수단과 목적의 회로에서 벗어나는 순간, 우리가 매 순간 만나는 것들은 모두 놀이와 향유의 계기가 된다. 불꽃놀이로 스크린을 불태우는 영화, 즉 반영화를 리오타르가 꿈꾸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를 통해 관객들은 노동의 세계, 자본의 세계, 혹은 생산적 차이의 시계에 억압된 그 내밀한 희열의 순간을 복원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물론 체제에 포획된 주류 영화는 그 희열의 순간을 복원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물론 체제에 포획된 주류 영화는 그 희열의 순간, 비생상적 차이의 놀이를 계속 배제하고 억압하려 할 테지만 말이다.


영화는 소비할 수 있는 생산품이 되는 대신에 진정한 것, 다시 말해 헛된 것, 대용의 것, 강렬한 희열을 주는 것을 만들어 낸다. …… 예술가가 자본주의 산업 속에서 만들어내는 영화, 그리고 흔히들 말하듯이 비정상적인 움직임, 헛된 방출, 순전한 소비를 위한 차이 등을 제거함으로써 만들어진 영화는 통일되어 있으며 번식력 있는 육체, 즉 생식력 있고 집중된 전체로 구성되어 자기가 운반하는 것을 상실하지 않고 전달하게 된다.
≪영화:이론, 강연≫, <반영화>


들뢰즈 Gilles Deleuze (1925~1995)

어두운 영화관의 밝은 스크린은 켜진 성냥불, 혹은 밤하늘을 수놓는 폭죽과 같은 것이다. 그 순수한 낭비, 그 순수한 희열, 그 비생산적 차이를 포착해서 관객을 성냥을 켠 아이로 만들 수 있다면, 영화는 정말 전복적인 도구로 기능할 수 있을 것이다. 리오타르의 말처럼 이럴 때 "영화는 헛된 것, 대용의 것, 강렬한 희열을 주게" 될 것이다. 이런 영화가 그가 강조했던 '반영화'일 수 있다. 들뢰즈 Gilles Deleuze (1925~1995)의 말을 빌리자면 반영화는 잠재적 영화, 혹은 우리를 정주민이 아니라 유목민으로 만드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미 자본의 세계에 거의 완전히 훈육된 어른들에게 리오타르나 영화 예술가들이 꿈꾸는 반영화는 난해한 예술 영화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확히 어른들은 어린 시절 느꼈던 그런 순수한 희열의 세계가 다시 찾아오는 걸 무서워하는지도 모른다. 반영화가 열어놓은 세계가 자본주의에 정착해 살고 있는 자신의 삶을 동요시킬까 두려운 것이다.


아무리 저항해도 노동의 세계에도 잃어버린 놀이에 대한 향수가, 그러니까 자본의 세계에도 비생산적 차이에 대한 향수가 녹아 있는 것은 아닌가. 예를 들어 아이를 낳기 위한 섹스라고 하더라도, 섹스를 하는 순간 아이를 낳으려는 생각은 사라지고 강렬한 순간적 희열만이 마치 아이가 황홀하게 켜는 상냥 놀이처럼 남을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간혹 반영화가 아닌 영화, 즉 주류 영화를 보러 갔을 때, 영화 전체가 아니라 영화의 한 장면만 기억나는 경우가 있다. 주류 영화에 포획된 반영화적 요소, 즉 순수한 희열의 세계에 노출된 탓이다.


리오타르의 말처럼 주류 영화는 "비정상적인 움직임, 헛된 방출, 순전한 소비를 위한 차이 등을 제거함으로써 ……자기가 운반하는 것을 상실하지 않고 전달하려고"한다. 아예 노골적으로 아이들의 성냥 놀이와 같은 숏은 철저하게 배제하고, 커피 물을 끓이려고 켜진 어른들의 성냥과 같은 숏만을 나열할 수 있다. 아니면 불가피하게 아이들의 성냥 놀이와 같은 숏들을 쓸 수밖에 없다면, 주류 영화는 그런 숏들을 자신이 말하려는 취지에 종속되도록 강제할 수도 있다. 리오타르가 연출이란 기본적으로 "(사전적) 배제와 (사후적) 삭제"라고 말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러나 아무리 비생산적 차이의 섹스를 부정한다고 하더라고, 그 부정의 대상으로서 섹스의 희열은 우리 삶 어느 부분에 기록될 수밖에 없는 것 아닐까. 마찬가지로 전체 영화의 취지에 맞지 않는 숏들이 영화 어딘가에 숨어 있기 마련이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덧없이 흘러가는 흰 구름, 혹은 밤바다에 뜬금없이 펼쳐지는 폭죽놀이, 아니면 멋진 여인의 살짝 열린 입술 등등. 어쩌면 그나마 우리가 어두운 영화관에서 주류 영화를 보는 것도 영화의 중심으로 환원되지 않는 그런 장면들을 기대했기 때문은 아닐까. 억압된 것의 회귀! 삭제와 배제된 것의 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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