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전복적인 쾌락을 제공할 수 있다
켜진 성냥은 소비된다. 일하러 가기 전에 커피 물을 데우고자 당신이 성냥으로 불을 켠다면, 이 소비는 비생산적이 않다. 그것은 '상품-성냥', '상품-노동력', '봉급-돈, '상품-성냥'으로 이어지는 자본의 순환에 속하는 움직임이다. 그러나 아이가 보기 위해 쓸데없이 성녕을 켤 때는 아이는 단지 움직임을 좋아하는 것이다. 차례차례 바뀌어가는 색채를, 켤 때 정점에 오르는 빛을, 작은 성냥개비의 소멸을, 쉬익 하는 소리를 좋아하는 것이다. 따라서 아이는 아무것도 만들어내지 않는 비생산적 차이를 좋아하는 것이다.
≪영화:이론, 강연≫, <반영화>
영화는 소비할 수 있는 생산품이 되는 대신에 진정한 것, 다시 말해 헛된 것, 대용의 것, 강렬한 희열을 주는 것을 만들어 낸다. …… 예술가가 자본주의 산업 속에서 만들어내는 영화, 그리고 흔히들 말하듯이 비정상적인 움직임, 헛된 방출, 순전한 소비를 위한 차이 등을 제거함으로써 만들어진 영화는 통일되어 있으며 번식력 있는 육체, 즉 생식력 있고 집중된 전체로 구성되어 자기가 운반하는 것을 상실하지 않고 전달하게 된다.
≪영화:이론, 강연≫, <반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