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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얼마나 새로운 매체인가? [메를로-퐁티]

"우리는 영화에서 행동을 배운다"

by 찌옹수

메를로-퐁티: "우리는 영화에서 행동을 배운다"


의식의 순수성이나 절대성을 부정하면서 신체의 중요성을 부각시켰던 현대 프랑스 철학가가 바로 메를로-퐁티 Maurice Merleau-Ponty (1908~1961)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우리의 정신이나 의식은 신체와 몸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점이다. 메를로-퐁티 이후 우리가 '정신의 신체'나 '신체의 정신'이란 표현, 혹은 '정신적 신체'나 '신체적 정신'이란 용어를 사용할 수 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 일 것이다. 바로 여기에 그가 지닌 혁명성이 있다. 서양을 지배했던 해묵은 편견, 그러니까 신체나 육체와 무관하게 독립적인 영혼, 혹은 기독교에서 말한 사후에 불멸하는 영혼이란 메를로-퐁티에게는 애초에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1964년 그가 죽은 뒤 출간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 등장하는 그의 말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정신은 땅에 박힌 말뚝처럼 신체에 박혀 있다. 달리 말하면 정신은 신체의 동굴이고 반대로 신체는 정신을 부풀려놓은 것이다."


<지각의 현상학>에서도 이미 메를로-퐁티는 말하지 않았던가? 나의 의식이란 "나는 그걸 생각하고 있다"는 내면적 성찰보다는 무엇보다도 먼저 "나는 할 수 있다"는 유체적 경험과 관련된다고 말이다. "나는 할 수 있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신체와 육체의 일, 혹은 신체의 행동과 관련된 것이다. 그런 그가 영화를 보고서 얼마나 흥분했을지 미루어 짐작이 가는 일이다. 영화란 남자의 몸, 여자의 몸, 고양이의 몸, 자동차의 몸 등등이 마주치고 교차하고 변형되는 장소, 혹은 운동하는 몸들의 경연장이기 때문이다. 이런 다양한 몸들의 얽힘에서 우리는 신체의 동굴로서 정신 상태를 미루어 짐작하게 된다. 우리는 키스를 하는 남녀를 보고 그들이 연인이라는 것 안다. 혹은 키스를 하는 연인 중 한 사람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면, 최소한 우리는 그 키스가 마지막 키스일 수 있다는 걸 안다. 개를 부드럽게 쓰다듬고 있는 아이를 보면, 우리는 개에 대한 그 아이의 애정을 알게 된다.


육체의 행동이 없다면, 우리는 거기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정신을 읽어 낼 수가 없다. 한마디로 무언가의 영혼이나 정신은 오직 그것의 행동에서만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는 몸의 철학이 그대로 구현되는 극적인 장면을 영화에서 목도했다. 그가 당시 탁월한 문학자였던 말로 André Malraux (1901~1976)에게 실망을 느꼈던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말로 André Malraux (1901~1976)
영화가 우리에게 현기증을 느끼는 사람을 보여주고 싶으면 …… 말로가 자신의 영화 <희망>에서 하려고 했던 것처럼 현기증을 느끼는 내면 풍경을 묘사하려고 해서는 안 될 것이다. 현기증을 외부에서 바라봄으로써, 바위 위에 뒤틀리는 균형을 잃은 신체를 바라보거나 어디서 오는지 전혀 알 수 없는 공간의 전복에 적응하려 <고 애쓰는 비틀거리는 걸음을 바라봄으로써 우리는 현기증을 더 잘 느낄 수 있다.
<의미와 무의미>, <영화와 새로운 심리학>


앙드레 말로는 1937년 스페인 내전 체험을 기초로 르포 형식의 소설 <희망 L`Espoir>을 썼던 적이 있다. 여기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말로는 스스로 이 소설을 토대로 영화를 만드는 작업에 뛰어들면서 사달이 나게 된 것이다. 마침내 1945년 말로가 만든 영화 <희망>이 개봉한다. 평론가들의 극찬을 받은 말로의 영화는 같은 해 루이 들뤼크 (Louis Delluc) 상을 수상하게 된다. 동시대 지성인들의 긍정적인 평가와는 달리 메를로-퐁티의 눈에는 말로의 영화는 영화가 가진 잠재성을 제대로 실현하지 못한 것으로 보였다. 그의 생각에 말로는 훌륭한 소설가일 뿐이지, 훌륭한 영화감독은 아니었던 셈이다. 등장인물의 현기증을 보여주기 위해 말로는 현기증을 느끼고 있는 등장인물의 내면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얼마나 쓸데없는 일인가 "균형을 잃은 신체'나 '비틀거리는 걸음'만 보여주면 관객들은 더 쉽게 등장인물의 현기증에 공감할 테니 말이다. 불행히도 인물의 내면 묘사에 치중했던 소설가의 습관이 그대로 영화에도 관철되고 만 것이다.


등장인물의 행동을 직접 볼 수 없는 소설에서는 등장인물의 내면 묘사가 무척 중요할 수 있다. 그렇지만 영화는 등장인물의 행동을 너무나 쉽게 보여줄 수 있지 않은가? 이것이 영화라는 매체의 힘이 아닌가? 이렇게 스크린에 드러난 행동을 통해 관객들은 아주 쉽게 등장인물의 내면 상태에 공감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소설이 오랫동안 그렇게 해왔던 것처럼 영화는 인간의 사유를 우리에게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영화는 인간의 행위와 행동을 우리에게 제시하며 세계에 현존하는 특별한 방식, 사물과 타인을 다루는 특별한 방식을 우리에게 직접 제공한다. 이것은 우리가 몸짓과 시선과 거동에서 볼 수 있는 것이며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람들 각각을 명백하게 규정해준다.
<의미와 무의미>, <영화와 새로운 심리학>


소설은 인간의 사유, 혹은 인간의 내면을 제시해주는 데 탁월하다. 이와 달리 영화는 우리에게 인간의 행위와 행동, 한마디로 몸의 움직임을 보여주는 데 우월한 매체다. 수영하는 법을 알려주는 책을 읽는 것보다는 동네 형이 수영하는 걸 보는 것이 수영을 배우는 데는 더 좋은 법이다. 수영 교본을 달달 외운 사람은 아마도 물 앞에서 자신이 수영을 할 수 없다는 냉엄한 현실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동네 형이 수영하는 장면을 본 꼬맹이는 비록 두려움을 느끼겠지만 물에 몸을 맡기기가 더 쉬울 것이다. 영화에서 메를로-퐁티가 강조했던 행위와 행동을 접했다면, 아감벤 Giorgio Agamben (1942~)이 그것이 바로 자신이 말한 '제스처'와 같은 것이라고 무릎을 쳤을 것이다. 1996년에 출간된 <목적 없는 수단: 정치에 관한 노트>에서 아감벤은 말하지 않았던가. "영화의 요소는 이미지가 아니라 제스처다."라고 말이다.


아감벤 Giorgio Agamben (1942~)

몸의 움직임으로 실현되는 타인의 행동과 행위는 메를로-퐁티의 지적처럼 "사물과 타인을 다루는 특별한 방식을 우리에게 직접 제공한다." 돌아보라. 키스 장면을 다루는 소설 천권보다는 키스 행동을 보여주는 영화 한 편이 우리에게 더 도움이 되는 법이다. 키스만 그런가. 이별하는 방법, 개와 노는 방법, 산에 오르는 방법, 자동차 핸들을 잡는 방법, 춤을 추는 방법 등등. 영화는 이런 모든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그리고 혁명가의 내면은 어떤지, 근사한 춤을 추는 사람의 희열은 무엇인지,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할 때의 슬픔은 무엇인지 등등, 그 정신과 영혼마저 덤으로 가르쳐주게 될 것이다. 어쩌면 살아가는 방법을 신속하고 정확히 배우려면, 책일랑 던져버리고 영화관에 가는 것이 더 좋을지도 모를 일이다. 메를로-퐁티가 영화를 예찬했던 건 바로 이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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