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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

철학이란 무엇인가?

by 찌옹수



철학이란 무엇인가? 굵직한 철학적인 쟁점들을 살펴보는 위대한 여행을 떠나기 전, 우리는 이 질문을 먼저 숙고할 필요가 있다. 흔히 철학을 공부한다고 하면, 소크라테스, 공자, 나가르주나, 원효, 스피노자, 칸트, 비트겐슈타인, 그리고 들뢰즈의 책을 읽고 이해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생각에 따르면 결국 철학을 공부하기 위해서 우리는 철학과에 진학해서 특정 철학자나 사유 경향을 배워야만 한다. 물론 그 과정에서 석사 학위논문이나 박사 학위논문을 쓰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그렇다면 스피노자를 연구해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은 철학자가 된 것일까? 그냥 그는 스피노자 전문가가 된 것은 아닐까? 만일 스피노자를 공부하면서 철학함을 배웠다면, 그는 철학자가 되었을 것이다. 반대로 스피노자의 철학을 배웠다면 그는 스피노자 전문가가 되었을 것이다. 철학함을 배우는 것과 철학을 배우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이다. 그래서 자신의 주저 ≪순수이성비판 Kritik der reinen Vernunft≫에서 칸트 Immanuel Kant(1724~1804)도 "철학을 배우지 말고, 철학함을 배우라"라고 역설했던 것이다.


칸트 Immanuel Kant (1724~1804)

"철학함을 배운다!"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 다시 칸트에게 도움을 구해보도록 하자. 어떤 강의에서 칸트는 말했다고 한다. "철학함을 배운다는 것은 자기 이성을 스스로 사용할 수 있음을 배운다는 것이다." ≪논리학 강의록 Die Vorlesungen über Logik≫이란 책에 들어 있는 말이다. 결국 논점은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힘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스피노자를 모방하지 않고, 장자도 답습하지 않고, 심지어 칸트마저 흉내 내지 않고, 자기만의 이성을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철학함이다. 스피노자가 위대한 철학자가 되었던 이뉴는 그가 자기만의 이성을 사용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은 아닐까. 그러니까 스피노자를 제대로 배운 사람은, 스피노자를 앵무새처럼 읊조리는 스피노자 전문가가 아니라, 오히려 자기만의 이성을 사용할 줄 알게 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타인의 생각을 철저하게 부정하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스스로 생각해서 타인의 생각이 옳다면, 옳다고 평가하는 것도 자기만의 이성을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앵무새처럼 과거 철학자들을 맹목적으로 읊조리지 말고,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할 줄 알아야 한다는 점이다. 이것이 바로 '철학'이 아니라 '철학함'이고, 이렇게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철학자'다. 그러나 여기서 근본적인 물음이 하나 생긴다. 언제 우리는 스스로 생각하게 되는가? 지금까지 배웠던 모든 가르침들로는 알 수 없는 무언가와 마주쳤을 때 아닌가? 바로 이 점이 중요하다. 다른 어떤 학설로도 그 미지의 타자나 사건을 알 수 없다는 자각! 이런 무지의 자각을 통해서만 우리는 "자기 이성을 스스로 사용하게" 된다. 아니 정확히 말해 자기 이성을 사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우리는 던져지게 되는 것이다.


"철학이 아니라 철학함을 배워야 한다"는 칸트의 주장이 의미가 있으려면, 우리는 자신이 새로운 사건과 마주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세계는 무한히 다양해지고, 무한히 생성적인 곳이다. 그러니 기존의 철학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될 리 만무한 것이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철학이 아니라 철학함을 굳이 배워야 하는 이유라고 할 수 있다. 기존의 앎으로도 어떤 도움이 되지 않는 난처한 상황은 항상 벌어지는 법이다. 그러니 우리는 자기 이성의 힘으로 그 미지의 사건을 생각해야만 하는 것이다. 부모의 훈시도, 선생의 가르침도, 체제의 규범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먼저 이런 미지의 사건에 직면할 때 우리에게 "모른다" 혹은 "모르겠다"는 자각이 발생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런 무지의 자각이 없다면, 우리는 철학함을 시작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서양철학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소크라테스 Socrates(BC469~BC399)도 그렇게도 자주 '무지의 지'혹은 '자신의 무지에 대한 자각'을 강조했던 것이다.


소크라테스 Socrates (BC469~BC399)
자기가 무언가를 결여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자가 있다면, 그는 자기가 결여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그것을 욕망하지 못하네. …… 그렇지만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여전히 생각하는 자들이 남아 있네. 그렇기 때문에 아직 훌륭하지도 나쁘지도 않은 자들이 지혜를 사랑하네 philosophein.
≪향연 Symposium≫


훌륭한 자는 사태의 실상을 정확히 아는 사람이고, 나쁜 자는 그것에 대해 전적으로 무지한 사람이다. 그런데 이 두 종류의 사람은 모두 알려고 하지 않는다. 훌륭한 사람은 이미 알고 있으니 알려고 하지 않고, 나쁜 사람은 자신이 모른다는 걸 자각하지 못하니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알려고 할까? 누가 알려는 욕망에 사로잡힐까? 훌륭한 자와 나쁜 자 사이에 있는 사람, 즉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여전히 생각하는 사람"이다. 배고픈 것을 절실하게 자각한 사람만이 먹을 것을 찾으려고 하듯이, 무지하다는 것을 절실하게 자각한 사람만이 앎을 욕망하는 법이다. 바로 여기서 소크라테스가 생각하고 있던 철학함, 즉 필로소피 philosophy가 의미를 갖게 된다. "아직 훌륭하지도 나쁘지도 않은 자들", 그러니까 자신의 무지를 자각한 사람만이 '지혜를 사랑하기 philosophein' 때문이다.


서양철학의 기원에는 '무지의 자각'이 있고, 바로 이것을 발견했기에 소크라테스는 서양철학의 아버지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것은 서양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동양의 경우에도 그래도 적용된다. 소크라테스보다 앞서 중국의 공자 孔子(BC551~BC479)도 제자에게 '무지의 자각'을 강조했던 적이 있다.


공자 孔子 (BC551~BC479)
공자가 말했다. "자로야! 너에게 앎에 대해 가르쳐주겠다.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앎이다."
≪논어論語≫, <위정爲政>


자로 子路(BC542~BC480)라는 제자에게 공자는 앎知에 대해 가르침을 내리고 있다.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바로 "앎"이라고 말이다. 자로가 아니더라도 누구든지 제한적으로 아는 것은 분명히 있다. 그렇지만 자신이 정확히 모르는 것을 아는 척하는 것이 문제다. 아니 아는 척하는 것은 그나마 상태가 괜찮은 것이다. 아는 척하는 사람은 스스로 진짜로 알지 못하면서 아는 척한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더 심각한 상태는 모르는 것을 아는 척하는 수준을 넘어서 정말로 안다고 만족해버리는 데 있다. 소크라테스라면 아마 이런 구제불능의 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나쁜 사람"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결국 공자의 가르침의 핵심도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 즉 무지의 자각에 있었던 것이다.


데카르트 René Descartes (1596~1650)

놀라운 우연의 일치 아닌가? 아니 어쩌면 기적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동양과 서양의 경우 최초의 철학자라고 할 수 있는 소크라테스와 공자는 모두 '무지의 자각'을 '' 혹은 '철학함'의 동력이라고 강조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무지의 자각은 데카르트 René Descartes(1596~1650)의 '방법적 회의 doute méthodique'와는 다른 것이다. 분명 영민한 데카르트도 철학의 핵심이 무지의 자각이라는 걸 간파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무지의 자각과 무지의 제스처가 어떻게 같을 수 있다는 말인가. 정말로 하늘을 "나는 모른다"라고 절규하는 것과 방법론적으로 "나는 모른다"라고 추정해보는 것 사이에는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나는 것 아닐까. "정말 모르겠다"는 자괴감과 절망감이 깊을수록, 모르는 것을 알려고 하는 우리의 욕망, 혹은 지혜에 대한 우리의 갈망은 커지는 법이다. 그러니 무지의 제스처를 대신해서 무지의 자각이 우리를 사로잡아야만 한다.


소크라테스와 공자 이후 모든 철학자들은 '무지의 자각'이란 절망스러운 심연을 통과한 사람들이다. 철학자들의 위대함과 깊이를 판단하고 싶은가? 해당 철학자들이 얼마만큼 깊고 통렬하게 자신의 무지에 절망했는지 헤아리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다른 누구도 그 무지의 심연을 채울 수 없기에, 그들은 자기만의 이성을 사용해서 그 심연을 차곡차곡 메워갔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앎'이자 '철학함'이다. 무지를 앎으로 채울는 철학자들의 노력은 자기 앞을 가로막고 있는 늪에 차곡차곡 돌덩이들을 집어던져 그곳을 메우려는 노력에 비유할 수 있을 것 같다. 언젠가 늪은 메워지게 될 것이고, 그곳에는 질서 정연하게 쌓인 돌덩이들만이 남게 될 것이다. 앎을 욕망했던 철학자의 경우도 마찬가지 아닐까. 바닥을 헤아릴 수 없는 무지의 심연을 자기만의 이성으로 채우게 되면, 그곳에는 바로 그들만의 철학이 남게 되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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