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는 어디로 가는가?

새로운 정치철학의 패러다임, 푸코의 '생명 정치'

by 찌옹수

물속에 살고 있는 물고기는 자신이 물속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 어렵다. 이것은 국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사실이 아닐까? 우리도 국가 속에서 살고 있지만 국가 속에서 갈고 있다는 사실을 별로 의식하지는 않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국가는 이미 철저하게 우리의 습성으로 내재화되어 있기 때문에, 이것을 반성한다는 것조차 불가능한 일일 수도 있다. 우리는 자유로운 결정으로 어떤 국가 속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어떤 국가에 태어나서 훈육된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자명한 국가를 거리를 두고 반성할 수 있는 주체가 되는 특정한 순간이 있다. 물론 이것은 자유로운 사색의 결과라기보다는 오히려 삶에서 오는 충격과 당혹스러움을 통해 강제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국가에 대한 반성은 국가가 우리 삶에 결코 이롭지 않다는 구체적인 개인 경험에서 대안적 사회를 꿈꿀 때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국가 논리를 이해하고 그것에서 벗어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점검하기 위해서,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 루소 Jean-Jacques Rousseau (1712~1778)가 피력한 권력의 계보학을 상기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루소 Jean-Jacques Rousseau (1712~1778)
"주종 관계란 사람들의 상호 의존과 그들을 결합시키는 서로의 욕구가 있지 않으면 성립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을 복종시킨다는 것은, 미리 그를 다른 사람이 없이는 살아가지 못하는 처지에 두지 않는 한 불가능한 일이다. 이것은 누구나 알 수 있다."

그에 따르면 권력관계, 즉 주종 관계는 기본적으로 폭력과 이에 근거한 결핍의 발생을 통해서만 작동한다. 문제는 결핍된 자들이 이런 결핍을 자신의 탓으로 돌린다는 점에 있다. 마치 자신은 본성상 결핍된 존재인데, 이런 결핍은 오직 다른 사람을 통해서만 채워질 수 있다고 믿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그렇게 결핍을 채워주는 사람이 바로 애초에 결핍을 만들어낸 장본인이기도 하다. 여기서 분명 해지는 것은 주종 관계의 내적 논리이다. 주종 관계는 원초적인 폭력, 즉 원초적인 수탈을 통해서 피통치자들을 결핍 상태로 만들고, 수탈한 것을 제한적이나마 수탈당한 자들에게 재분배함으로써 피통치자들의 결핍 상태를 심화시키면서 유지하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국가가 탄생하게 되었고, ≪자본론≫에서 마르크스가 이야기한 상황이 마침내 도래하게 된 것이다. "어떤 인간이 왕이라는 것은 다만 다른 인간이 신하로서 그를 상대해주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들은 그가 왕이기 때문에 자기들은 신하가 아니면 안 된다고까지 믿고 있다." 이렇게 국가 속에서 살아가는 대다수 사람들은 원초적 폭력, 즉 원초적 수탈이라는 사건을 망각하고 있다. 그들이 기억하는 것은 단지 통치자로부터 유래하는 재분배, 즉 시혜뿐이기 때문이다. 사실 논리적 순서에서 재분배는 항상 두 번째로 오는 것이지만, 그들은 이것을 첫 번째로 오는 것이라고 잘못 믿고 있는 것이다.


자발적 복종 상태에 있는 피통치자들은 지도자의 시혜 행위 혹은 은혜에 대해 그것을 반드시 갚아야만 하는 부채로 간주하게 된다. 이러한 역사적 과정 때문에 지금도 국가 안에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종류의 저항 혹은 불복종을 국가에 대한 배은망덕한 부도덕 행위라고 보는 경해가 남아 있게 된 것이다. 국가의 은혜와 보호를 받았으면서 왜 그 고마움을 모르냐는 것이다. 바로 이런 채권과 채무의 관계에서 정치적인 윤리 문제가 탄생하게 된다. 수탈과 재분배라는 국가의 교환 논리에 포획되자마자, 우리는 채무의 주체로서 구성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이와 같이 구성된 주체로부터 벗어나 구성하는 주체로서 자유를 다시 영위할 수 있을까? 바로 이것이 푸코 Michel Foucault (1926~1984)가 평생 동안 풀려고 노력했던 과제였다. 그의 강의록 ≪자기와 타자의 통치 Le gouvernement de soi et les autres≫에는 이런 그의 속내가 매우 분명하게 잘 드러나 있다.


미셸 푸코 Michel Foucault (1926~1984)
인생의 시작부터 사물화 되어버린 오류. 왜곡. 악습. 의존성의 심층부에 훈육이 가해진다. 그 결과 인간 존재가 여전히 머무르고 있을지도 모르는 젊음의 상태나 유년기의 어떤 단계로 되돌아가는 것이 관건이 아니라, 즉각적으로 결함 있는 교육 및 신앙 체계에 사로잡힌 인생 속에서 결코 나타날 기회가 없었던 '속성'을 참조하는 것이 관건이 된다. 자기 실천의 목표는 자기 자신 내에서 결코 나타날 기회가 없었던 속성과 자기 자신을 일치시키면서 자기를 해방하는 행위이다.
≪자기와 타자의 통치: 콜레주 드 프랑스 강의 1982~1983년≫


주인이 자신을 돌봐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집 지키는 개는 주인과 그의 재산을 잘 지켜야만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미 집 지키는 개는 자신이 어떤 존재였는지, 그리고 자신이 어떤 식으로 훈육되어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는지를 망각하고 있는 것이다. 개의 내면과 신체의 수준에서 권력이 관철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도 이런 식으로 권력에 의해 훈육되어 있다는 것이 바로 푸코의 생각이었다. 그렇다면 어떤 식으로 해서 인간은 권력으로부터 구성된 주체가 아니라 스스로를 구성하는 주체로 다시 태어날 수 있을까? 푸코는 권력의 훈육이 완성되기 이전의 유년 상태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훈육 과정을 통과했음에도 훈육되지 않은 채 불쑥 드러나곤 하는 우리 삶의 '속성'들에 시선을 집중시킨다. 그 순간 바로 그것을 꽉 잡아야 한다! 푸코는 훈육의 권력이 미치지 않았던 그런 속성을 권력과 싸울 때 이용할 수 있는 게릴라 진지로 삼으려고 했던 것이다. 물론 이런 게릴라전의 최종 목표는 내 실존에 각인된 권력을 완전히 추방하고, 스스로 자신의 실존을 구성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푸코의 생명 정치는 바로 이런 맥락에서 출현했던 것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우리 대부분은 정치라는 것이 몇몇 대표자들의 일이라고 치부하는 정치적 무관심에 깊이 길들여져 있다. 물론 이것은 대의 민주주의 이념을 우리가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에 벌어진 불가피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논리적으로 대의민주주의 제도하에서 우리는 대표자들의 권력 행사를 무기력하게 관조할 수밖에 없다. 이미 대표자들에게 일정한 기간 동안 자신의 권력을 모두 양도해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이런 무기력에 빠져 있는 동안 권력은 대부분의 사람들을 자신의 권력 형식에 맞게 훈육하고 길들이는 일에 모든 노력을 다 쏟아붓는다. 과연 어떻게 하면 우리는 대의민주주의 제도의 허구성을 공격하고, 자신을 훈육시키는 권력의 힘에 맞서 삶의 권력을 다시 회복할 수 있을까? 그러기에 앞서 우리는 주권적 권력이 어떤 논리로 작동하는지부터 성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주권적 권력이 선택한 정치제도가 바로 대의민주주의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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