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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어디로 가는가? [슈미트]

"정치적인 것은 개체들을 적과 동지로 구분한다."

by 찌옹수

슈미트 Carl Schmitt (1888~1985)

1927년에 작은 책 한 권, 즉 ≪정치적인 것의 개념 Der Begriff des Politischen≫이란 책이 출간되어 독일 학계를 발칵 뒤집어 놓는다. 예외 상태, 즉 비상사태를 선언할 수 있는 최고 주권자의 정치권력을 긍정하고, 독재를 긍정했던 정치철학자 슈미트 Carl Schmitt (1888~1985)가 우리 앞에 등장한 것이다. 슈미트가 나치 독재와 일정 정도 관련을 맺은 것도 다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래서 루카치 Lukács György (1885~1971)도 자신의 대작 ≪이성의 파괴 Die Zerstörung der Vernunft≫에서 ≪정치적인 것의 개념≫이란 책을 "히틀러와 (당시 외무부 장관을 지냈던) 로젠베르크가 고안해낸, 일종의 인종차별적인 사이비 학문의 서론"이라고 비판했다. 루카치의 비판은 타당하지만 그것은 사후적인 규정에 불과하다. 사실 1933년 5월 1일 나치 정당에 가입했을 때 슈미트의 당원 번호는 서열상 200만 번을 넘을 정도로 미미했고, 현실적으로도 슈미트는 나치 정권하에서 경쟁하던 동료 법학 교수들의 공격으로 인해 1년 만에 당직뿐 아니라 교수직도 박탈당하게 되었다. 정권의 비밀이 공개된다는 것은 정권으로서는 여간 불쾌한 일이 아니었던 셈이다.


루카치 Lukács György (1885~1971)

그런데 ≪정치적인 것의 개념≫이란 작은 책자가 출간 당시뿐만 아니라 지금까지도 지속적으로 인구에 회자되고 있는 진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이 책에서 그가 '정치적인 것'을 범주적으로 독립시키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성악의 대립이 그래도 간단히 미추美醜또는 이해利害의 대립과 동일시되지 않고, 또한 곧바로 그와 같은 대립으로 환원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면, 적과 동지의 대립은 더구나 이상의 대립들과 혼동하거나 혼합해서는 안된다. …… 적이란 바로 타인, 이질자이며, 그 본질은 특히 강한 의미에서 존재적으로 어떤 타인이며 이질자라는 것으로 족한 것이다. …… 모든 종교적, 도덕적, 경제적, 인종적 또는 그 밖의 대립은 그것이 실제로 인간을 적과 동지로 분류하기에 충분할 만큼 강력한 경우에는 정치적인 대립으로 변화하게 된다.
≪정치적인 것의 개념≫


마키아벨리 Niccolò Machiavelli (1469~1527)

슈미트는 '적과 동지'라는 범주가 선악, 미추, 이해라는 범주와는 구별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 점에서 그는 정치를 윤리에서 독립해서 사유했던 마키아벨리 Niccolò Machiavelli (1469~1527)의 정치철학을 계승하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순수이성비판≫에서 칸트는 과학적인 것의 범주로 '참과 거짓 眞僞'을 정립했고, ≪실천이성비판≫에서 윤리적인 것의 범주로 '선과 악 善惡'을 정립했다면, ≪판단력비판≫에서 미적인 것의 범주로 '아름다움과 추함 美醜'을 정립했다. 칸트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경제적인 것의 범주는 아마 '이로움과 해로움', 즉 이해 利害라고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엘리아데 Mircea Eliade (1907~1986)라면 종교적인 것의 범주로 '성스러움과 세속적임', 즉 성속 聖俗을 제안했을 것이다. 칸트, 경제학, 그리고 엘리아데의 지적에 따르면 우리는 동일한 현상이라도 최소한 다섯 가지 정도 이상의 범주들로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슈미트는 바로 여기에 '정치적인 것'의 범주를 하나 더 덧붙였던 사람이다. '적과 동지'라는 범주를 말이다.


엘리아데 Mircea Eliade (1907~1986)

그런데 슈미트에 따르면 위의 나머지 다섯 가지 범주들은 항상 '정치적인 것'으로 사유될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종교적, 도덕적, 경제적, 인종적 또는 그 밖의 대립들"은 심각해지면 적과 동지라는 정치적 대립으로 곧바로 격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대목에서 슈미트는 예외 상태를 규정할 수 있는 초법적인 독재자의 역량을 긍정하게 된다. 만약 다양한 계층들의 이해관계가 국가를 적과 동지라는 이분법으로 분열시킬 때, 독재자는 외부에 적을 설정함으로써 내부인 모두를 동지로 변화시킬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을 때 국가는 내란에 휩싸일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놀라운 것은 외부에 적을 설정하는 순간, 동시에 내부 분열이 순식간에 미봉된다는 점이다. 우리의 경우 박정희 朴正熙 (1917~1979) 독재정권이 오랫동안 유지될 수 있었던 것도 북한 정권을 불변하는 적으로 설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외부에 적을 설정하는 경우, 독재자와 국민은 하나의 동지로 묶이게 된다. 만약 일부 국민이 독재자에게 불만을 제기한다면, 그들은 곧바로 북한과 같은 적의 존재로 규정되면서 공격받게 될 것이다. 한마디로 '이적행위자'로 낙인찍힌다는 것이다. 자신의 동지를 공격하는 사람은 결국 적과 마찬가지의 부류로 간주되니 말이다. 나치가 유대인과 집시들을 공격함으로써 독일 민족을 하나의 국민으로, 혹은 하나의 동지로 강하게 결속시켰던 것도 다 이유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슈미트에 따르면 국가는 다른 무엇보다도 가장 '정치적인'기구이다. 국가도 적과 동지라는 범주에 의해서만 계속 존속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논리적으로 모든 국가가 최소한 하나의 국가를 적대적인 국가로 규정할 수 있을 때에만 존속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적을 상정하지 않으면 국가의 성립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슈미트가 국가가 존속하는 한 세계평화라는 것은 영원히 목가적 이념에 불과하다고 진단했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다.


정치적인 것의 개념적 징표로부터 국가 세계의 다원론이 생긴다. 정치적 통일체는 적의 현실적 가능성을 전제로 하며, 이와 동시에 공존하는 다른 정치적 통일체를 전제로 한다. 따라서 무릇 국가가 존재하는 한은 항상 복수의 국가들이 지상에 존재하며, 전 지구와 전체 인류를 포괄하는 세계 국가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다. 정치적 세계란 다원체 Pluriversum이지 단일체 Universum가 결코 아니다. …… 오늘날 강대국 사이의 전쟁은 세계전쟁으로 쉽게 발전하기 때문에 따라서 이 전쟁의 종결은 세계평화를 의미하고, 또한 동시에 철저하고 궁극적인 탈정치화라는 목가적인 최종 상태를 의미할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곧 사라지게 될 착오에 불과하다.
≪정치적인 것의 개념≫


슈미트는 전체 인류를 포괄하는 세계 국가라는 것은 결국 꿈에 지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모든 인류가 동지가 된다면 이것은 결국 '적과 동지'라는 범주의 폐기이자 동시에 정치적인 것의 폐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적도 설정되지 않는다면 정치적인 것이 성립될 수 없고 어떤 국가도 존립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결코 세계를 하나의 동지로 이루어진 평화적 집단으로 만들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고 보는 것이다. 이 때문에 슈미트는 "정치적 세계란 다원체이지 단일체가 결코 아니다"라고 단언할 수 있었던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가 두 차례에 걸쳐 발발했던 세계대전으로 세계평화가 도래할 것이라는 착각을 여지없이 공격하고 있는 대목이다. 바로 이 부분에서 슈미트의 비관론이 날카로움을 발한다. 그는 국가란 어떤 식으로든지 서로 대립과 갈등을 조장하면서 그것을 자신의 주요한 양분으로 삼아 존속하는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사실 슈미트의 생각 이면에는 인간이란 존재가 끊임없이 적과 동지라는 정치적 범주를 통해서 편 가르기를 할 것이라는 비관이 깔려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국가의 억압과 국가 사이의 전쟁을 막기 위해서, 우리는 슈미트의 지적을 다시 한번 진지하게 성찰해볼 필요가 있다. 물론 그것은 '적과 동지'라는 범주 자체를 무력화시키는 방법에 대한 고민일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의 모습은 불행하게도 너무나 정치적이지 않은가? 학연, 지연, 혈연 등은 언제든지 '적과 동지'라는 정치적인 대립으로 점화될 수 있는 기폭제이다. 학벌을 가로지르고, 지연을 가로지르며, 그리고 혈연을 가로지르지 못한다면, 우리가 어떻게 적과 동지라는 범주를 폐기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렇지만 슈미트의 통찰이 옳다면 우리는 국가의 고질적인 억압과 국가 간의 반복되는 전쟁을 원천적으로 막을 수 있는 방법을 추상적으로나마 추론해볼 수 있다. 물론 핵심은 '정치적인 것'의 범주인 '적과 동지'를 해체하는 데 있다. 모든 짝 개념이 그렇지만, '정치적인 것'을 폐기하기 위해서는 '적'이란 범주나, 아니면 '동지'라는 범주를 제거하면 된다. 구체적으로 말해 자신을 포함한 모든 사람을 '동지'로 보거나, 자신을 포함한 모든 사람을 '적'으로 보면 된다. 후자의 경우에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자신마저 적으로 삼는다는 것은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자신을 적으로 삼는 태도는 일종의 자살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현실적으로 '동지'라는 범주를 폐기하는 후자의 방법은 일체의 부정이 없이 자신의 삶을 절대적으로 긍정하는 형식으로 구체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철학사를 살펴보면 모든 사람을 '동지'로 보는 입장을 취했던 대표자로는 서양의 경우 기독교를 창시했던 예수와 동양의 경우 겸애兼愛를 주장했던 묵자墨子를 생각해볼 수 있다. 반면 자신의 삶을 절대적인 긍정의 대상으로 삼은 대표자로는 서양의 경우 에피쿠로스나 슈티르너 Max Stirner(1806~1856), 그리고 동양의 경우 양주장자가 있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에피쿠로스나 슈티르너, 그리고 양주나 장자가 모두 '자유로운 연대'라는 공동체 형식을 지향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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