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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어디로 가는가? [아감벤]

"정치는 배제에 대한 공포를 우리 내면에 각인시킨다."

by 찌옹수

발터 벤야민 Walter Benjamin (1892~1940)

발터 벤야민 Walter Benjamin (1892~1940)은 1930년대 대부분을 파리 국립도서관에서 보내며 19세기 자본주의 혹은 모더니티의 중심지 파리를 연구한 적이 있다. 나치가 파리를 점령하는 시간이 임박해지자, 한때 독일에서 히틀러의 나치즘을 신랄하게 비판했던 유대인 철학자 벤야민은 서둘러 파리를 떠나야만 했다. 하지만 그는 프랑스와 스페인을 가로지르는 국경선이 폐쇄되자 절망하여 그곳에서 자살하고 만다. 불행한 것은 그의 죽음으로 그가 10여 년 동안 연구했던 방대한 자료들까지 함께 행방불명되었다는 점이다. 다행히도 이 자료들은 파리 국립도서관 바타유 서고에서 발견된다.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철학자가 바로 아감벤 Giorgio Agamben (1942~)이었다. 아감벤의 노력으로 1982년에 벤야민의 연구는 두꺼운 책 한 권으로 묶여 나왔는데, 그것이 바로 ≪아케이드 프로젝트≫라는 책이다.


아감벤 Giorgio Agamben (1942~)

그런데 아감벤이 벤야민에게서 강하게 영향을 받은 부분은 자본주의에 대한 것이 아니라, 정치철학에 대한 관점이었다. 특히 법에는 폭력성이 불가피하게 내재해 있다는 취지의 작은 논문인 <폭력 비판을 위하여 Zur Kritik der Gewalt>, 그리고 정치적 예외 상태는 결코 예외가 아니라 상례라는 점을 밝힌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Über den Begriff der Geschichte>라는 저술이 바로 아감벤의 정치철학을 가능하게 했던 중요한 기초가 되었다. 물론 이러한 벤야민의 통찰에 미셸 푸코 Michel Foucault (1926~1984)생명정치론이 결합되어야 비로소 아감벤의 정치철학이 그 전모를 드러낼 수 있을 테지만 말이다. 이렇게 벤야민과 푸코의 정치철학적 통찰을 계승하면서 아감벤은 슈미트가 설정했던 '적과 동지'라는 범주를 대체하는 새로운 범주를 제안하여 '정치적인 것'을 정의하려고 시도한다.


서양 정치의 근본적인 대당 범주는 '동지―적'이 아니라 '벌거벗은 생명―정치적 존재', '조에 zoe―비오스 bios', '배제―포함'이라는 범주 쌍이다. 정치가 존재하는 것은 인간이 언어를 통해 자신에게서 벌거벗은 생명을 분리해내며, 그것을 자신과 대립시키는 동시에 그것과의 포함적 배제 관계를 유지하는 생명체이기 때문이다.
≪호모 사케르 Homo Sacer≫


슈미트의 적과 동지라는 범주는 사람들 사이에서 설정될 수 있는 것이다. 반면 아감벤이 제안한 정치적 범주 '벌거벗은 생명과 정치적 존재'는 한 개체 차원에서 그어지는 범주, 혹은 개체를 분열시키는 범주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벌거벗은 생명'이 정치적 보호를 받지 못하는 개체의 한 측면을 상징한다면, '정치적 존재'는 정치적 권리와 의무에 의해 보호되는 개체의 또 다른 측면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아감벤이 지적하고 있듯이 고대 그리스에서는 폴리스라는 정치공동체에 속할 수 없었던 사람들을 '조에'라고 불렀고, 반면 정치공동체에 속했던 사람들은 '비오스'라고 불렀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비오스', 즉 '정치적 존재'로 분류되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공포심이다. 그것은 언제든지 정치공동체에서 부여한 의무를 수행하지 못할 경우 '조에', 즉 '벌거벗은 생명'이 될 수 있다는 점에 대한 두려움을 가리킨다. '벌거벗은 생명'과 '정치적 존재', 혹은 '조에'와 '비오스'는 '포함적 배제 관계'에 있다고 이야기하면서 아감벤이 주목했던 것도 바로 이 점이었다.


미셸 푸코 Michel Foucault (1926~1984)

이제 아감벤은 슈미트의 적과 동지라는 논리보다 더 깊은 층위의 정치적인 것의 점주를 해명하려고 시도했던 셈이다. 적이 아닌 동지에 속해 있어도 정치적 존재로서 비오스는 항상 자신의 미래에 대해 불안할 뿐이다. 언제든 자신도 다시 벌거벗은 생명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보는 공포감 때문이다. 그래서 개체는 자신의 내면에서 벌거벗은 생명의 힘이 분출되는 것을 감시하고 억제하려고 노력한다. 권력에 의한 자기 감시 혹은 자기 검열이 바로 이런 방식으로 작동하게 되는 것이다. 푸코의 흔적이 분명하게 엿보이는 대목이다. 해고의 위험에 몸을 사리는 노동자들처럼, 혹은 왕따가 되지 않기 위해서 스스로 먼저 왕따를 공격하는 입장을 취하는 아이들의 경우처럼 말이다. 바로 이것이 아감벤이 말한 '포함적 배제' 관계다. 정치적인 것의 범주를 새롭게 제안하면서 마침내 그는 근대 민주주의의 허구성에 비판의 칼날을 들이대기 시작한다.


만약 근대 민주주의에 고대 민주주의와는 구별되는 무엇인가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 근대 민주주의가 처음부터 조에의 권리 주장과 해방으로서 등장했으며, 끊임없이 벌거벗은 생명 그 자체를 하나의 삶의 방식으로 변형시키려 한다는, 즉 '조에의 비오스'를 찾아내려고 한다는 점일 것이다. 여기에 또한 근대 민주주의 특유의 아포리아가 존재하는데, 근대 민주주의는 인간의 예속화를 표시하고 있는 바로 그곳―'벌거벗은 생명'―에서 인간의 자유와 행복을 실현하려고 한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호모 사케르 Homo Sacer≫


고대 그리스에서 '벌거벗은 생명'들은 항상 살해될 수 있었다. 그들은 폴리스 외부의 존재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근대 민주주의는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와는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근대 민주주의표면적으로는 '벌거벗은 생명'을 자신의 체제 내에 포섭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주자의 인권, 여성의 인권, 심지어는 애완견의 권리마저도 보호한다고 선전하고 있다. 물론 아감벤의 지적처럼 근대 민주주의의 평등이란 이념은 '벌거벗은 생명'의 집요한 투쟁을 통해서 가능했던 것이다. 하지만 아쉬운 점은 '벌거벗은 생명'의 투쟁이 자신들을 '벌거벗은 생명'으로 만들었던 권력의 해체가 아니라 오히려 권력의 지배하에 들어가는 '자발적 복종'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이것은 근대 권력이 작동하는 결정적인 방식이기도 하다.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는 벤야민의 통찰을 연상할 수밖에 없다. 그는 지배 자체는 변하지 않았고 단지 지배의 구체적 양식만이 변해왔을 뿐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고대 민주주의에서 공동체 외부의 '벌거벗은 생명(조에)'과 공동체 내부의 '정치적 존재(비오스)' 사이에 그어져 있었던 적대 관계는 근대 민주주의에서는 외양을 달리하면서 등장한다. 적대 관계는 한 개체 내부에 그어진 '벌거벗은 생명'과 '정치적 존재' 사이의 적대 관계로 이행되었기 때문이다. 푸코의 말대로 개인들을 일종의 정치적 존재로 훈육하는 근대 민주주의가 도래한 것이다. 근대의 주체는 벌거벗은 생명이 되지 않기 위해서 매번 스스로를 검열하는 개체의 노력으로 구성된다. 사실 벌거벗은 생명에 대한 공포감이 개인들의 내면에 각인되어 있다면, 이러한 공포감을 현실화하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슈미트의 적과 동지가 그렇게 쉽게 작동할 수 있었던 것도 결국 동일한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감벤이 말한 것처럼 우리는 벌거벗은 생명, 즉 조에의 권리 주장과 해방의 잠재력을 완전히 잊어서는 결코 안된다. 우리는 '벌거벗은 생명'에 대한 공포심을 이용해 그동안 정치권력이 제안해왔던 '정치적 존재'로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만 한다. 물론 이것은 '벌거벗은 생명'에게는 너무도 가혹한 임무가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부에 숨어 있는 우리 자신의 이 같은 공포감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권력으로부터 당당한 주체, 벌거벗은 생명 자체에서 나오는 삶의 권력을 긍정하는 주체가 결코 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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