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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어디로 가는가? <고찰>

대의제를 넘어서 민주주의로, 혹은 치안을 넘어서 정치로

by 찌옹수

≪순수이성비판≫에서 칸트물자체는 알 수 없고, 우리가 아는 것은 모두 표상일 뿐이라고 말했던 적이 있다.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표상이란 말은 무언가를 '대신한다', 혹은 '대표한다'는 뜻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20세기 이후 현대철학에서 표상이란 개념은 그야말로 난도질을 당하게 된다. 특히 대륙 철학에서는 데리다들뢰즈, 혹은 아도르노 등이 선두주자이고, 영미권 철학에서는 비트겐슈타인이나 로티가 대표주자라고 할 수 있다. 한마디로 억압된 물자체가 칸트에 의해 무시되었던 자기 자리를 되찾으려고 했던 것이다. 표상이 동일성의 논리에 지배된다면 물자체는 차이와 타자의 논리를 따른다. 차이와 타자라는 개넘의 부각은 지진과도 같은 전복성을 가지고 있다. 지금까지 튼튼한 대지 위에 있던 건물처럼 영원할 것만 같았던 표상은 흔들리고 균열되어 무너지지 직전에 이른 것이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이 하나 있다. 표상의 위기가 현대철학의 성격을 규정한다면, 대표의 위기는 현대 정치의 본질을 강타하고 있다. 하긴 표상이 대표이고, 대표가 표상이기도 하니 어쩌면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를 일이다. '표상'을 뜻하는 현대 독일어 Vorstellung의 영어 번역어가 representation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라. 표상이면서 동시에 대표라는 뜻 아닌가. 실제로 이 말의 파생어 representative라는 말은 대표자를 의미하기도 한다. 한마디로 우리는 대의민주주의 representative democracy가 위기에 봉착한 시대를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표상의 위기가 대표의 위기로 확산되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사정은 정반대니까 말이다. 헤겔의 말대로 철학은 밤이 되어야 활동하는 미네르바의 올빼미처럼 현실을 반성하는 지적 활동이다. 한마디로 말해 철학은 뒷북을 치기 쉽다는 것이다.


1933년 3월 5일 독일의 총선거가 아마 대의민주주의의 위기를 상징하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총선 결과 독일에서는 바이마르 공화국이 막을 내리고 20세기를 피로 물들이게 되는 나치가 권력을 잡게 된다. 민주주의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대표를 뽑는 선거에서 독일 국민은 반민주주의 결정했던 것이다. 물론 이것은 대표자가 되려고 했던 히틀러와 나치당의 선동에 독일 국민이 휘말려서 생긴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대표자가 피대표자를 대표하기보다는 피대표자에게 환각을 심어주었던 것이다.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지키려면 우리는 '대의제=민주주의'라는 공식 자체를 붕괴시켜야 한다. 심지어 대의제는 민주주의를 왜곡시킬 수 있는 위험한 제도하는 자각도 동시에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결국 모든 것은 대의제에 의해 선출된 대표가 시민들을 대표하지 못해서 생긴 현상이다. 아니 대표하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대표자의 권력으로 피대표자의 민주주의 의지를 훼손하고 왜곡하고 방해하기까지 한다고 말해도 좋을 듯하다.


히틀러가 대표자로 선출된 1933년 3월 5일은 대표자는 피대표자를 반영하지 못한다는 사실, 심지어 대표자는 피대표자의 정신과 삶을 파괴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 확인된 날이다. 대의제 자체의 위기, 즉 대표의 위기가 백일하에 드러난 셈이다. 20세기 중반 서영을 휩쓸었던 해체주의, 혹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유 경향은 대의제의 위기를 철학적 사유에서 확인했던 것이다. 철학을 위기에 빠뜨린 표상주의를 해체하자! 당연히 이것은 물자체를 사유에 담으려는 시도로 이어졌다. 물자체를 타자라고 해도 좋고 차이라고 해도 좋다. 나의 표상에 포착되기 힘든 이런 타자적 계기를 수용한 사유는 아마도 들뢰즈에서 정점을 찍었다고 해야 할 듯하다. 그리고 이번에는 정치철학적 사유에도 반향을 일으키게 된다. 그것은 바로 대의제가 아니라, 직접민주주의를 어떻게 관철시킬 것이냐는 논의다. 구체적으로 말해 대표자에 의해 억압되고 소외되었던 피대표자의 목소리를 어떻게 정치의 장에 울려 퍼지게 하느냐의 문제를 고민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벌거벗은 생명'에 대한 아감벤의 고민도 바로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아쉽게도 대의제를 선택하고 있는 우리나라나 서양에서는 아직도 히틀러적 현상이 반복되고 있다. 권력의지를 가진 기득권층들은 선거를 통해 시민들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어 대표자가 되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 그러고는 대다수 시민들, 자본주의 사회를 구성하는 대다수의 노동자들의 뜻을 반영하기보다는 자본주의와 국가권력의 이익을 대변하는 법률들을 입법한다. 정말 놀랍지 않은가? 피대표자들의 뜻을 반영한다고 공약을 남발하지만, 대표자들은 자신들의 계급적 이익을 위한 입법활동을 거침없이 시도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것이 나치 독일과 무슨 차이가 있다는 말인가? 그러나 행정부의 수장이나 국회에서는 다수결이라는 민주주의 제스처를 통해 오늘도 법을 통과시킨다. 그리고 이렇게 통과된 법은 '합의'에 의해 탄생한 것이라고 선전하다. 그러나 시민들 대다수는 도대체 무슨 법이 통과되었는지, 그리고 그 법이 어떻게 자신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지 알기가 어렵다. 대의제가 계급독재나 입법독재로 변질된 셈이다. 아니 이것은 정확한 진단이 아닌지도 모른다. 대의제 자체의 본질에는 계급독재와 입법독재가 함축되어 있다고 하는 것이 더 옳은 평가일지도 모른다.


존 스튜어트 밀 John Stuart Mill (1806~1873)

대의제가 가장 이상적인 정치 형식이라고 확신했던 존 스튜어트 밀 John Stuart Mill (1806~1873)마저도 가장 경계했던 것이 계급입법 class legislation 아니었던가? 그의 주저 ≪대의정부론 Considerations on Representative Government≫의 한 대목을 읽어보자.

"다른 모든 정부 형태에서도 마찬가지지만, 권력을 가진 자들이 사악한 이익에 몰두한다는 사실이 민주주의에 내재한 가장 큰 위험 중 하나가 된다. 다른 말로 하면 무엇보다도 계급입법, 즉 정부가 일반 이익에 장기간 해를 끼치면서 지배계급의 눈앞의 이익을 충족시키려고 획책하는 것(실제로 그런 효과를 거둘 수 있는지는 두고 보아야 한다)이 가장 심각한 경계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최선의 대의정부를 구성하고자 할 때 이 같은 해악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제어하느냐가 첫째 과제가 된다."


집중된 권력을 가진 대표자가 존재하는 한, 그들이 선거로 선출된 대표자든 아니면 왕위를 계승한 대표자든 간에 지배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계급입법은 불가피한 일이다. 결국 밀은 착각한 것이다. 그의 생각처럼 계급입법은 대의제의 부수효과가 아니라, 대의제 자체의 목적이었다고 해야 한다. 다시 말해 피지배자의 뜻인양 계급입법을 하려고 고안된 제도가 대의제였던 것이다. 이미 이것은 홉스루소 이후 사회계약론이 예견했던 것 아닌가. 시민들이 투표로 자신들의 권리를 대표에게 양도한다는 논리 말이다. 자신의 권리를 양도했으니, 시민들은 권리가 없어진 것이다. 반대로 권리를 양도받았으니, 대표자는 비대한 권력을 가진 지배자가 된 것이다. 투표라는 제도가 들어와 있다는 외면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대표자는 논리적으로 임기 동안 거의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할 수 있다. 아나키스트들이 대의민주주의를 "독재자를 뽑을 수 있는 권리 Right to elect a dictator"라고 조롱했던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만일 대의제가 민주적인 제도라면, 항상 대표자를 피대표자가 회수 recall 할 수 있어야만 한다. 이것은 대표자의 임기 동안에도 피대표자가 자신의 권리를 양도하지 않았다는 걸 전제해야만 한다. 이 경우 놀라운 이율배반이 발생한다. 대표자를 회수할 수 있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선거 때 피대표자들이 자신의 권리를 양도하지 않았다는 걸 의미한다. 당연히 대표자의 과도한 권력 남용은 발생할 수 없다. 이럴 때 사회계약론뿐만 아니라 대의제도 자체가 그 정당성을 상실하고 만다. 반대로 사회계약론과 대의제를 신봉한다면, 우리는 대표자에게 피대표자들의 권리가 집결되었다는 걸 인정하고, 대표자의 임기를 철저히 보장해야만 한다. 그러나 이 순간 계급독재와 계급입법을 막을 방법은 사라지고, 민주주의가 허울뿐인 미사여구로 전락하게 된다. 불행히도 우리나라나 서양 대부분의 국가는 대의제를 밀어붙이고 있다. 대의제에 무게를 두면 둘수록 민주주의의 가치는 훼손되는데도 말이다.


투표가 아니더라도 시민들은 광장에 모여 대표자를 반대하는 시위를 할 수 있다. 그러나 체제는 다양한 하위 법률들로 시위의 권리 자체를 무력화시키려고 한다. 우리의 경우 '도로교통법', 혹은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체제는 오직 선거와 투표가 민주주의의 꽃이라는 논리를 시민들의 뇌리에 주입시키려고 한다. 그러니까 현대의 지배체제는 민주주의라는 외양은 갖고는 있지만, 대의제로 계급독재를 관철하려 한다고 정의할 수도 있다. 대의제로 계급독재를 꿈꾸는 지배계급은 매스컴과 대학 등 담론을 지배하고 있다. 이를 통해 그들은 선거가 민주주의의 꽃이라는 논리, 그리고 자신들이 임기중에 제정한 법률은 반드시 지켜야 민주시민이라는 논리도 최면제처럼 사회에 유포시킨다. 물론 그들은 법률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음 선거 때 새로운 대표자를 뽑아 개정하면 된다고 주장하면서, 짐짓 대의제가 얼마나 합리적이고 민주적이냐는 기염을 토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현실은 어떤가? 새로운 선거가 다가오면 입후보자들은 모두 계급독재에 맞는 사람들로 공천되고, 시민들은 또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질적으로 다르지 않은 후보들 중 한 명에게 투표를 하게 될 것이다. 마치 민주시민인 것처럼 말이다. 당연히 제정된 법률이 폐기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제정된 법률이 폐기되는 것은 현실적으로는 거의 불가능하지만 이론적으로는 충분히 가능하다. 거의 불가능하지만 정말로 제정된 법률이 폐기되는 사건이 벌어진다고 해도 더 큰 문제가 남는다. 이미 대표자의 임기 동안 제정된 법률은 계급 이익을 충분히 달성했을 테니 말이다. 더군다나 새로운 법률들을 만들어도 여전히 계급입법일 가능성이 상당히 농후하다. 물론 또 지배계급의 논리라면 우리는 다시 대표자의 임기가 끝나기를 기다려야만 할 것이다. 결국 바뀌는 것은 하나도 없다. 당연히 투표율은 점점 떨어질 것이고, 정치에 대한 무관심이 시민들 사이에서 독가스처럼 퍼져갈 것이다.


이것이 민주주의 사회인가? 시민들이 계급독재와 계급입법의 거수기 노릇을 하는 것이 관연 민주주의 이념이 관철되는 사회라고 할 수 있을까? 나치 독일 이후 현재까지 모든 인문주의적 정치철학자들의 속앓이는 바로 여기에서 시작된다. 결국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 아니라, 시위가 민주주의의 꽃이었던 셈이다. 아니 정확히 말해 시민들이, 혹은 피대표자들이 대표자를 찾기보다는 스스로 목소리를 높일 수 있는 시위야말로 민주주의의 심장이었던 셈이다. 그러니 현대 정치철학자들은 선거보다 시위, 혹은 대표자의 선출보다 대표자의 소환, 혹은 대표자의 권력 보장보다 대표자의 권력 통제가 민주주의 가치를 실현하는 핵심이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대의제가 아니라 민주주의를 관철하려고 고민했던 가장 대표적인 정치철학자가 랑시에르 Jacques Rancière (1940~)다.


랑시에르 Jacques Rancière (1940~)

랑시에르는 1996년 10월 볼로냐의 그람시 연구소에서 민주정치에 대한 지금까지의 성찰을 11개 테제로 정리해서 발표했던 적이 있다. 11가지 테제는 1997년 2월 철학 잡지 ≪피로조프스키 베스트니크 Filozofski Vestnik≫에 10개로 다시 정리되어 <정치에 대한 열 가지 테제 10 Thèses sur la Politque>로 발표된다. 이 글은 2001년에 잡지 ≪이론과 사건 Theory & Event≫에 <Ten Theses on Politics>로 번역되기도 했다. 이 테제들로 랑시에르는 대의제의 허구성을 폭로하고 민주주의를 숙고하고 있다. 어떻게 하면 계급독재와 계급입법의 도구인 대의제, 민주주의의 꽃이 선거라고 주장하는 대의제로부터 민주주의의 가치를 지키고 실현할 수 있을까? 이런 고뇌가 랑시에르의 테제들에 절절하게 녹아 있다. 10가지 테제 중 일곱 번째를 먼저 보자. 그 테제는 이렇게 시작된다.

"정치 politique는 분명히 치안 police과 대립한다."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폴리스라는 공간에서 번성했다. 여기에서 유래한 두 가지 말이 있다. 하나는 정치를 의미하는 '폴리티크 politique'이고 하나는 치안을 의미하는 '폴리스 police'다. 계급입법으로 탄생한 '도로교통법', 혹은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을 제정했으니, 이런 법률들은 시민들이 만든 것이라는 억지 논리다. 결국 대의제가 계급입법에 이어 입법독재의 마수를 드러내는 대목이다. 이런 논리에 걸리는 순간, 어떤 사회라도 민주주의, 즉 정치는 사라지고 만다. 이것이 바로 랑시에르의 주장이었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민주주의, 혹은 정치를 어떻게 관철시킬 수 있을까? 여덟 번째 테제가 그 실마리가 될 수 있다.


"정치의 중요 기능은 자신의 고유한 공간을 짜는 데 있다. 그것은 정치 주체의 세계와 정치 작용의 세계를 드러내는 데 있다. 정치의 본질은 두 세계를 하나의 세계에 현재 하도록 만듦으로써 불일치 dissensus를 현시하는 것이다."

조금 어렵다면, 이 여덟 번째 테제에 대한 랑시에르 본인의 해설 부분을 읽어보자. "'그냥 지나가시오! 여기에는 아무것도 볼 것 없어!' 치안은 도로 위에 볼 것이 아무것도 없으며, 거기에서는 그냥 지나가는 것 말고는 달리 할 것이 없다고 말한다. 치안은 통행 공간이 그저 통행 공간일 뿐이라고 말한다. 정치는 이 통행 공간을 한 주체―인민, 노동자, 시민―가 드러나는 공간으로 변형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정치는 공간의 모양을 바꾸는 것, 곧 거기에서 할 것이 있고 볼 것이 있으며, 명명할 것이 있는 것으로 바꾸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경찰이 막고 있는 도로가 바로 치안과 정치가, 혹은 대의제와 민주주의가 극명하게 대립해서 불꽃이 일어나는 현장이다. 계급독재가 도로라고 규정하는 공간을 시위하는 공간으로 바꾸는 것, 랑시에르가 말한 정치는 혹은 민주주의란 바로 이런 경단이자 실천이었던 것이다. 만일 경찰의 말대로 시위 공간을 도로라고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대의제라는 계급독재의 지배를 받는 피통치자로 전락한다. 반대로 도로를 시위 공간으로 만드는 순간, 우리는 계급독재에 저항하는 민주시민이 된다. 바로 이 정치적 결단이 중요하다. 체제의 노예로 살 것인가? 아니면 주인으로 살 것인가? 마르크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바로 여기가 로도스다. 여기서 뛰어보라! Hic Rhodus, hic sal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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