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국가는 불가피한가?

절대주의와 아나키즘 사이에서

by 찌옹수

동서양 모두 전근대사회에서는 국가의 주권자, 혹은 왕 자신이 신과 같은 절대자이거나 초월적인 절대자를 대리하는 존재로 간주되었다. 물론 이것은 피지배층이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을 막으려는 이데올로기적 장치라고 할 수 있다. 제정일치 祭政一致의 시대에나 통용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역사시대에 들어와서도 이런 이데올로기적 장치는 여전히 다양한 모습으로 변주되어 동서양을 구분하지 않고 작동했다. 서양의 경우 16~17세기를 풍미했던 왕권신수설 王權神授說 divine right of kings도 그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의 경우는 그보다 훨씬 앞서서 더 세련된 형식이 만들어졌다. 바로 동중서 董仲舒 (BC170?~BC120?)가 제안했던 왕도王道 논리다. 왕권신수설은 글자 그대로 왕의 권력을 신으로부터 받았다는 주장이다. 이 이론에 근거하면 당연히 신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왕권에 도전할 수 없게 된다. 마찬가지로 동중서는 '왕王'이란 글자를 분석하면서 동양적 왕권신수설을 주장했다.


동중서 董仲舒 (BC170?~BC120?)
옛날에 글자를 만든 인물은 먼저 가로획을 三처럼 나란히 세 번 쓴 뒤에 한가운데 세로획을 그어 세 획을 이어서 王이란 글자를 만들었다. 가로의 세 획三은 각각 하늘天, 땅地 그리고 인간人을 상징하고, 가운데를 이은 획ㅣ은 세 영역의 원칙을 하나로 통일시킴을 상징한다. 이처럼 글자를 만든 사람은 하날, 땅, 인간을 상징하는 획의 가운데 지점을 찾아 연결시켜서 하나로 통일시키니, 왕이 아니라면 누가 이런 역할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춘추번로 春秋繁露≫, <왕도통삼 王道通三>


왕이란 글자는 '삼三'이란 글자와 그것을 관통하는 한 획ㅣ의 글자로 구성되어 있다. 동중서에 따르면 '삼'이란 글자는 제일 위가 '하늘天', 중간이 '인간人', 그리고 제일 밑이 '땅地'를 가리킨다. 이 때문에 결국 '천지인天地人'을 상징하는 것이 된다. 그는 왕이란 존재는 바로 이 세 가지 요소를 관통하고 연결하는 일종의 제사장과 같은 기능을 가진다고 설명한다. 물론 이 세 가지 요소 가운데 가장 우월한 것은 역시 하늘이었다. 그래서 중국의 왕들을 보통 '천자天子', 즉 '하늘의 아들'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서양의 왕권신수설보다 무엇인가 세련되었다는 느낌이 든다. 비록 하늘이 가장 압도적인 힘을 갖지만, 땅과 인간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요소라는 인식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관례적으로 국가와 주권을 신적인 권위로 정당화하는 논리를 절대주의 absolutism라고 부른다. 국가나 주권이 신적인 존재와 같이 절대적인 것이라고 간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절대주의의 입장을 따를 때 인간은 국가나 주권을 결코 의심하거나 회의할 수조차 없다. 르네상스 이후 서양 근대사회는 신의 초월적 권위가 역화되고 그만큼 인간과 인간이 가진 이성적 능력에 강한 신뢰를 보내게 된다. 이제 주권자나 그가 통치하는 국가를 신과 같은 절대자로 정당화하는 논리는 힘을 잃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근대사회의 국가주의 철학자들은 국가나 주권자들 정당화하는 새로운 논리를 다시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신과 같은 초월적 존재의 힘이 약화되었기 때문에 국가주의 철학자들은 국가의 권위를 더 이상 신에 빗대지 못하고, 이제는 스스로 사유하고 자신의 행동을 결정할 수 있는 인간 개체들에 근거해 국가의 정당성을 논증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의미심장하게 등장했던 것이 바로 사회계약론 theory of social contract이다. 사회계약론은 사실 데카르트의 코기토와 함께 근대철학의 성격을 규정하는 두 가지 중요한 원리라고 할 수 있다. 사회계약론이 중요한 이유는 이 논의가 대의제 representative system라는 형식으로 작동하는 민주주의 democracy의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하는 중요한 논리적 근거로 작동해왔기 때문이다.


로크 John Locke (1632~1704)

로크 John Locke (1632~1704)가 자신의 주저 ≪통치에 대한 두 가지 논고 Two treaties of Government≫에서 언급하려고 했던 것도 바로 이 문제였다. 그에 따르면 국가의 목적은 개인의 자연적인 권리인 자유와 평등을 실현하고 보장하는 데 있다. 그렇다면 국가나 주권자는 그 자체가 더 이상 신성한 목적이 아니라, 단지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실현시키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이처럼 표면적으로 볼 때 근대철학에 들어와서 국가와 주권은 자유로운 개인들의 삶을 위한 단순한 수단으로 전락한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루소의 논의를 함께 살펴보면 국가와 주권은 수단이기는 하지만 거의 절대적인 수단이라는 미묘한 성격을 점유하고 있는 것을 엿볼 수 있다. 국가와 주권은 수단은 수단이지만, 결코 함부로 폐기할 수 없는 절대적인 수단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명목으로만 수단일 뿐 사회계약론을 옹호하던 철학자들에게도 국가는 여전히 신성 불가침성을 가진 것으로 이해되었다고 불 수 있다. 국가가 절대적인 수단이란 주장은 사실 그것이 절대적인 목적이라는 생각과 거의 다를 바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크로포트킨 Pyotr Kropotkin (1842~1921) & 바쿠닌 Mikhail Bakunin (1814~1876)

개인들의 자유로운 선택과 합의에 의해 국가와 주권이 정당화되었다면, 원칙적으로 개인들의 새로운 선택과 합의에 의해 국가와 주권의 논리 자체도 다시 폐기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사회계약론자들은 결코 그 방향으로는 논의를 진행시키지 않았다. 바쿠닌 Mikhail Bakunin (1814~1876)이나 크로포트킨 Pyotr Kropotkin (1842~1921)이 외롭게 외쳤던 아나키즘 Anarchism이 의미를 갖는 것도 바로 이 대목에서이다. 그들은 국가가 인간의 자유로운 삶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원칙적 입장을 일관되게 추구하려고 했다. 만약 구성원들이 원하지 않는다면 국가의 어떠한 측면도 다시 변경되거나 혹은 폐지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어떤 개인도 국가의 법률적 강제력에 저항하며 이러한 의문을 공개적으로 제기할 수 없다는 것을 어린아이라도 아는 일이다. 사실 아나키스트들은 절대적 수단으로써 국가라는 생각 자체가 국가를 절대적인 목적으로 간주하는 것과 같으며, 나아가 국가를 자유로운 개인보다 훨씬 우월한 위치에 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우려했다. 현대 정치철학자 네그리 Antonio Negri (1933~)도 이 점에서 예외가 아니다. 아나키스트로서 그는 다중 miltitude이란 개념을 통해 국가와 주권의 논리를 넘어서는 새로운 삶의 공동체를 모색하려고 평생 동안 노력했기 때문이다.


네그리는 지금까지 자본주의나 정치권력이 자신이 통제하던 사람들 상호 간의 마주침과 연대의 가능성을 애초부터 차단해왔다고 진단한다. 다시 말해 자본과 국가는 사람들이 주체적으로 기쁨을 느끼거나 혹은 슬픔을 느낄 수 있는 여지를 원천적으로 차단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자본과 국가, 즉 권력의 시도는 발달된 네트워크를 토대로 세계화를 시도하면서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세계화와 네트워크화가 의도하지 않게 사람들 사이의 마주침과 연대의 가능성을 우리에게 제공해주었기 때문이다. 네그리가 주목했던 것은 한 번의 마주침을 통해 기쁨의 연대를 구성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누구든 그 연대를 가로막는 일체의 장애와 군력을 결국 극복의 대상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전 지구적 위계의 모든 층위에서 보이고 있는, 권력 부패의 모든 징후와 민주적 대의의 모든 위기는 민주주의적 힘에의 의지 democratic will to power에 직면하고 있다. 이 분노와 사랑의 세계는 다중의 구성적 힘이 놓여 있는 현실적 토대이다. 다중의 민주주의는 '새로운 과학', 즉 이 새로운 상황과 대면할 수 있는 새로운 이론적 패러다임을 필요로 한다. 이 새로운 과락의 제1의 의제는 민주주의를 위해 주권을 파괴하는 것이다. 주권은 그것이 어떤 형태를 띠건 불가피하게 일자의 지배로서 제시되고, 완전하고 절대적인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침식한다 민주주의의 기획은 오늘날 민주주의를 확립하기 위한 전제조건으로 모든 현존하는 주권 형태들에 도전하다.
≪다중: 재국이 지배하는 시대의 전쟁과 민주주의 Multitude: War and Democracy in the Age of Empire≫


네그리의 이야기 가운데 '분노와 사랑의 세계'라는 표현이 중요하다. 마주침을 통해 얻게 된 기쁨의 연대가 '사랑의 세계'라면, 이 기쁨의 연대를 가로막는 기존 정치권력의 세계가 곧 '분노의 세계'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네그리는 이런 기쁨의 연대가 주권 sovereignty 논리를 파괴할 수 있는 '민주주의적 힘에의 의지'를 가능하게 한다고 역설한다. 여기서 주권의 논리란 선거를 통해서 사람들이 자신의 정치적 권력을 한 사람 혹은 다수의 대표자들에게 양도하는 대의민주주의 representation의 이념을 말한다. 만약 정치적 권력을 양도할 수 있다고 여긴다면, 엄격하게 말해 우리는 대표자의 임기 동안 어떠한 정치적 행위도 해서는 안 된다. 주어진 기간 동안 우리는 그 대표자를 주인으로 받아 들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네그리가 집요하게 문제 삼았던 것이 바로 이 대의민주주의의 허구적 논리였다.


권력을 대표자에게 양도하는 순간, 우리는 권력이 없는 존재, 즉 글자 그대로 노예적인 존재로 전략하게 된다. 그리고 권력을 양도받은 대표자는 과잉된 권력을 가진 존재, 즉 새로운 형식의 군주처럼 사람들 위에 군림하게 된다. 자발적인 권력 양도가 논리적으로 '자발적 복종 coluntary servitude'으로 이어지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그래서 대의민주주의는 결코 민주주의적일 수가 없으며, 오히려 진정한 민주주의로 이행하는 것을 가로막는 심각한 장애물로 기능할 뿐이다. 네그리가 "주권은 그것이 어떤 형태를 띠건 불가피하게 일자의 지배로서 제시되고, 완전하고 절대적인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심식한다"라고 진단했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사랑의 연대', 즉 다중을 통해 우리는 자신의 권력이 어느 한때라도 결코 양도될 수 없다는 점, 그리고 이와 아울러 모든 주권의 논리가 사실은 억압의 논리에 지나지 않았다는 점을 자각하게 된다. 다중 속에서 우리는 자신의 삶이 힘과 기쁨으로 넘치는 것을 이미 경험해버렸지 때문이다. 불행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직도 다중을 개념적으로나 경험적으로 음미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대의민주주의, 혹은 사회계약론이 탄생했던 바로 그 첫 순간으로 거슬러 올라갈 필요가 있다. 단추가 잘못 채워진 첫 지점으로 되돌아가지 않으면, 우리는 단추를 올바로 채울 수가 없을 테니 말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정치는 어디로 가는가? <고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