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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찌옹수 Aug 21. 2019

진실은 어떻게 전달되는가? [그람시]

"대중과 함께 움직이고 인도하라!"

마르크스 이후 이미 자본주의, 국가기구와 관련된 진실 혹은 진리는 다 드러났다고 할 수 있다. 자본은 동일한 인간을 노동자와 소비자로 분열시켜 잉여가치를 얻는다. 노동자로서 한 인간은 돈을 벌기 위해 취업해서 상품을 만든다. 이렇게 임금을 받은 노동자는 번데기가 나비가 되듯이 소비자로 변신한다. 그리고 자신이나 동료 노동자가 만든 상품을 구매한다. 동자가 소비자가 되고, 소비자가 다시 노동자가 되는 다람쥐 쳇바퀴의 삶을 인간에게 강요하면서 자본은 잉여가치를 획득하는 것이다. 반면 국가는 어떠한가? 국가가 국민을 위해 예산을 집행한다고 생각하지만 국가의 예산은 모두 국민의 주머니에서 나온 것일 뿐이다. 수탈과 재분배, 그리고 다시 이어지는 수탈과 재분배, 이것이 바로 국가기구의 메커니즘이다. 문제는 자본주의 시대에 국가는 가장 많은 세원을 제공하는 자본가 계급의 이익을 옹호하게 된다는 점이다. 여기서 자본가와 국가기구 사이의 비열한 밀월, 대부분의 이웃들이 알려고 하지 않은 밀월 관계가 존재하는 것이다.


마르크스 이후 많은 지식인들은 이 가공할 만한 밀월 관계를 조목조목 폭로했다. 그럼에도 대다수 사람들은 그들의 목소리를 외면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조롱하기까지 했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 국가와 자본과 싸우기가 두려워 지레 투쟁을 역설하는 지식인들을 멀리했던 것일까. 그렇지만 어느 경우 그들은 자본과 국가의 편에 서서 진보적 지식인과 그의 생각에 짜증을 내거나, 조롱하고, 심지어는 공격하기까지 한다. 그러니 진실을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진실이 항상 통용되지 않는다는 통찰일 테니 말이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대다수 사람들은 자신의 친구인 진보적인 지식인을 적으로 생각하고, 반대로 자신의 적인 자본과 국가를 친구로 생각하는가? 이것이 바로 그람시 Antonio Gramsci (1891~1937)가 투옥된 감옥에서 1929년에서부터 1936년까지 숙고했던 문제였다. (그는 20년 4개월 4일의 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건강이 악화돼 병원에서 숨졌다). 한마디로 그는 진실이 왜 대다수 민중에게 전달되지 않는가를 고민했던 것이다.


그람시 Antonio Gramsci (1891~1937)

그람시의 숙제를 해결한다면, 진보적 지식인에게는 자신의 진리가 민중에게 전달되어 억압적 사회를 전복시킬 수 있는 대중적 역량을 이끌어낼 희망도 생기게 될 것이다. 푸코가 심각하게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그보다 50년 앞서 그람시는 투리의 감옥에서 고민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무솔리니 정권을 두렵게 만들었던 그람시의 영민함이었다. 당시 그를 기소했던 검사가 "20년 동안 이 두뇌가 기능하지 않도록 해야만 한다"라고 말했던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오랜 숙고 끝에 그람시는 진실을 말하려는 자들이 반드시 명심해야 할 사항들을 하나둘 알려주기 시작한다.


새로운 문화를 창조한다는 것은 단지 한 개인 자신만의 독창적인 발견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가장 특수하게는 비판적 형식으로 이미 발견된 진리들의 확산, 말하자면 그것들의 '사회학', 그리고 그런 진리들을 중추적인 행동의 기초, 즉 지적인 질서와 도덕적 질서를 조절하는 계기로 만든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많은 민중이 정합적으로 생각하게 된다는 것, 즉 정합적으로 동일한 방식으로 현존하는 실재 세계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는 것은, 지금은 소수 지성인들의 소유물로만 남아 있는 진리, 과거 몇몇 '천재들이' 발견한 진리보다 훨씬 더 중요하고 '독창적인' '철학적'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 상식 common sense은 불균질적인 관념들의 혼돈스러운 집합체이기에, 어떤 사람도 자신이 원하는 걸 이곳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옥중서진 Lettere dal carcere≫


분명 새로운 이론, 혹은 진리를 발견하는 것은 소수 지성인들의 천재성에 기인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새로운 사회와 새로운 문화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람시의 말처럼 "진리들의 확산" 혹은"진리들의 사회화"가 없다면, 새로운 사회 난 문화는 백일몽에 지나지 않는다. 역으로 다음처럼 말할 수도 있다. 새로운 사회나 문화를 만들 정도로 진리들이 확산되었기에, 우리는 진리를 발견하는 천재성을 발휘한 그 소수의 지성인들을 기억하는 것이라고. 그래서 그람시는 진리의 발견보다 진리의 확산이 "훨씬 더 중요하고 독창적인 철학적 사건"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람시는 문화 헤게모니 Egemonia culture, 즉 지배와 억압의 진실을 맹목적으로 수용하도록 만든 문화권력을 직시했던 철학자였다. 피지배자가 아니라 지배자의 이익에 종사하는 문화적 관념들이 개개인의 일상생활과 사회생활에 스며들어서 상식의 일부분으로 자리를 잡는 순간 문화 헤게모니는 관철된다. 그렇다고 해서 상식은 무조건 나쁜 것이라고 말해서는 안된다. 그람시의 말대로 다양하고 이질적인 관념들이 퇴적층처럼 쌓여 있는 것이 바로 상식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문화 헤게모니의 잔재도 있고, 자유로운 삶은 지향하는 긍정적인 요소도, 그리고 사랑과 행복을 꿈꾸는 희망적인 요소도 아울러 존재하고 있다. 예를 들어 자발적 복종이란 관념을 생각해보자. 이 상태는 자발, 혹은 자유라는 관념과 아울러 복종이란 관념이 뒤죽박죽 섞여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여기서 자발, 혹은 자유라는 관념 자체가 정합적인 사유를 통해 복종이란 관념을 축출할 수 있는 뇌관이 될 수도 있다. 그러니 무반성적이고 비정합적인 행동을 낳는 무의식적인 습과 체계로 작동한다고 해서, 상식 자체를 부정해서는 안된다. 정말 빈대 한 마리 잡자고 초가삼간 다 태우는 꼴이 날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뒤죽박죽 혼돈스러운 '상식'을 반성해서 존재하는 세계를 정합적으로 생각할 때 바로 '양식 good sense'이 등장한다. 이처럼 상식을 양식으로 성숙시키는 것, 그람시는 이것이 바로 철학의 소임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옥중서신≫에서 그람시는 "철학은 지적인 질서이지만, 종교나 상식은 지적이지 않다. …… 철학은 종교와 '상식 common sense'의 비판이자 지양이다. 이런 의미에서 철학은 '상식'과는 대조적으로 '양식'과 일치한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천재적인 철학자  한 명이 고독하게 상식 속에서 발견한 합리적 진실들, 혹은 진리들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억압적 사회에 살고 있다는 진실이 대부분의 민주에게 전달되어 공유되지 않는다면, 억압이 없는 세계를 직시하는 정합적인 생각과 아울러 그것을 지향하는 행동은 출현할 수조차 없기 때문이다. 이제 그람시에게 남은 문제는 철학자가 양식을 대다수 사람들과 공유하는 방법이다. 먼저 그람시는 지성인과 대중 사이의 괴리가 왜 일어나는지 고민하기 시작한다.


인식에서부터 이해나 느낌으로의 이핼, 그리고 그 역으로 느낌에서 이해나 인식으로의 이행. 대중은 '느끼지만' 항상 인식하거나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지성인들은 '인식하지만' 항상 이해하거나 특히 항상 느끼는 것은 아니다. …… 지성인들의 오류는 우리가 이해 없이도 심지어는 느낌이나 열정 없이도 인식할 수 있다고, 다른 말로 지성인은 민중-민족으로부터 구별되고 분리되어야, 즉 민중의 기본적인 정념들을 느끼지 않아야, 지성인일 수 있다고 믿는다는 데 있다.
≪옥중서진 Lettere dal carcere≫


갑자기 감성, 오성, 이성이란 칸트적 도식이 등장했다고 당혹할 필요는 없다. 지금 그람시는 인식, 이해, 느낌이란 용어를 그냥 일상적인 의미로 사용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정치, 역사, 문화를 중시했던 그람시의 정신을 떠올릴 수 있는 예를 하나 들어보자. 비정규직의 문제가 좋을 것 같다. 비정규직은 불안한 신분이라는 느낌, 비정규직은 여러 법적 보호를 받지 못해서 안정성이 없다는 이해, 비정규직은 노동시장을 유연화하려는 자본과 국가의 책략이라는 인식. 이처럼 느낌은 '나'가 개입되어 주관적인 성격을 강하게 드러낸다면, 인식은 '나'라는 주관을 괄호 안에 넣어두고 순전히 구조적이고 객관적인 성격을 강하게 드러낸다. 느낌과 인식 사이에 있는 이해는 주관적인 성격과 객관적인 성격을 동시에 갖고 있을 수밖에 없다. 이렇게 느낌에서 이해로, 그리고 이해에서 인식으로 이를 때, 대중 누구나 지성인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비정규직이란 불안한 삶의 조건에서부터 노동시장 유연화 전략을 인식하는 데 이르는 순간, 지성인은 탄생한다는 것이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런 처절하고 집요한 성숙 과정을 망각하는 순간, 지성인은 대중과 유리되고 만다는 점이다. 자본과 국가의 헤게모니에 휘둘리는 대중의 삶을 산 밑의 척박한 삶에 비유한다면, 인식에 이른 지성인의 삶은 산 정상의 삶에 비유할 수도 있겠다. 산 밑의 느낌의 세계, 산 중턱의 이해의 세계, 그리고 마지막으로 산 정상의 인식의 세계! 산 밑의 삶을 제대로 조망하기 위해 산 정산에 올라왔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산 정상에 고독하게 살기 위해 산에 오른 것이 아니다. 이제 충분히 산 밑의 삶을 조망했다면 다시 내려가야 한다. 그리고 능숙하고 친절한 가이드처럼 자신이 올라갔고 내려왔던 그 길을 따라 대중을 산 정상으로 이끌어야만 한다. 그람시가 "인식에서부터 이해나 느낌으로의 이행, 그리고 그 역으로 느낌에서 이해나 인식으로의 이행"을 이야기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이런 반복적인 과정, 혹은 변증법적 과정을 통해 지성인은 대중성을, 그리고 대중은 지성을 확보하게 될 것이다. 마침내 대중적 지성과 지성적 대중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대중적 지성인은 비정규직의 문제나 파트나임 제도의 문제는 자본의 노동시장 유연화 전략의 일환이라고, 뭘 그렇게 새삼스럽게 설레발을 치냐고 냉정하게 말하지 않는다. 자본이 만든 불안하고 척박한 노동 조건에 던져진 대중의 불안과 정말을 함께하려는 애정 때문이다. 당연히 대중은 대중적 지성인에게 더 많은 신뢰를 보내게 될 것이다. 그들의 입장에서 대중적 지성인의 말은 느끼기 쉽고 동시에 이해하기 쉽다. 마침내 대중적 지성인은 대중을 인식으로 이끌 수 있다는 희망을 품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니 애써 오른 정상에서 산 밑을 바라보며 이쪽으로 올라오라고 공허하게 외칠 일이 아니다. 모든 이들과 함께 올라오기 위해 지성인은 다시 대중이 있는 곳으로 내려가야만 한다. 그리고 그들 앞이 아니라 그들 옆에서, 수다를 떨면서 웃으면서 노래하면서 한 걸음 한 걸은 함께 걸어 올라야 한다. 상식이 아니라 양식이 지배하는 세계는 바로 이런 지난한 과정을 통해서만 탄생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그람시가 지성인들에게 말한 가르침이었다. 자리 自利에 만 매몰되지 않고 이타 利他로 나아가는 대승적 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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