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에서 방편으로, 혹은 용기에서 애정으로
프랑스 구조주의에 대한 한 가지 커다란 오해가 있다. 그것은 구조주의가 일종의 결정론적 담론이란 생각과 관련된다. 이런 오해는 20세기 서양철학의 중심이었다고 할 수 있는 프랑스 철학의 철학사적 논리를 간과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종의 착시효과라고 할 수 있다. 구조주의는 실존주의가 후기구조주의로 귀결하기 위해 반드시 건너야만 했던 교량과 같은 것이었다. 돌아보라. 20세기 프랑스 철학계는 다음 3 단계를 거치게 된다. 첫 번째 단계가 사르트르 Jean-Paul Charles Aymard Sartre (1905~1980)로 대표되는 실존주의 existentialism 였다면, 그다음 단계는 레비-스트로스 Claude Lévi-Strauss (1908~2009)와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 등으로 유명한 구조주의 structuralism였고, 세 번째 단계는 데리다 Jacques Derrida (1930~2004)나 들뢰즈 Gilles Deleuze (1925~1995)로 상징되는 후기구조주의 post-structuralism였다. 이 3 단계를 자유와 구조라는 개념으로 요약해보자. 인간이 절대적으로 자유롭다는 신념에 따라 그 자유를 실천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렇지만 그 자유는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담벼락에 부딪히게 된다. 바로 이 담벼락이 우리 인간을 감금하는 거대하지만 동시에 세밀한 구조다. 바로 이 구조에서 인간은 진정한 자유의 가능성을 증명해야만 했다. 어떻게 담벼락처럼 우리를 막고 있는 구조를 돌파할 것인가? 이것이 바로 '구조를 넘어서는 자유'를 모색했던 후기구조주의 철학자들의 고민거리였다.
푸코의 삶과 사상만 보더라도, 그는 사르트르와 함께 인간의 자유를 위해 억압체제와 싸웠던 실존주의 시기, 감금과 훈육의 논리를 통해 우리가 어떻게 구조에 포획되는지를 보여주었던 구조주의의 시기, 마지막으로 그런 구조를 넘어서려는 자유를 꿈꾸었던 후기구조주의 시기를 모두 통과했던 철학자였다. 후기 구조주의자로서 말년의 푸코 사상을 가장 잘 보여주는 개념이 바로 '파르헤지아 parrhesia'라고 할 수 있다.
파르헤지아는 모든 것을 말하는 것이다. 실제로 그것은 "모든 것을 말하는" 문제를 넘어선다. 파르레지아에서 근본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가 말하고 싶을 때, 말하는 데 필요한 형식이라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우리가 말하고 싶을 때, 말하는 데 필요한 형식이라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우리가 말하고 싶은 대로 말해야만 하는 것을 말하도록 이끄는 솔직함, 자유, 그리고 개방성이다. 파르헤지아라는 용어는 라틴어로는 리베르타스 libertas로 번역되는 화자의 선택, 결단, 그리고 태도와 연관되어 있다. 그래서 파르헤지아의 모든 것을 말하기는 화자의 자유를 뜻하는 리베르타스로 번역되는 것이다.
≪주체의 해석학 L'herméneutique de sujet≫
아무것도 숨기지 않고 진실을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것, 이것이 바로 '파르헤지아'다. 대학이란 제도에 포섭되어 사변적이고 관조적인 경향이 강한 근대와 현대 서양철학자들과는 달리 고대 그리스 로마 시절 철학자들, 특히 헬레니즘 시대 철학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철학자의 덕목은 바로 이 파르헤지아였다. 푸코가 헬레니즘 철학자들이 숭배했던 파르헤지아 개념에서 구조를 벗어날 수 있는 자유의 계기를 본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억압적 구조에 대한 진실을 알고 있으면 무엇하겠는가. 그걸 솔직하고 당당하게, 한마디로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없다면, 진실은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니까 말이다. 그렇지만 압력과 불이익에 맞서 진실을 말한다는 것이 어떻게 쉬울 수 있겠는가. 당연히 파르헤지아의 주체에게 가장 요청되는 덕목은 '용기'일 수밖에 없다. 1983년에서 1984년 동안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강의했던 것을 묶은 책 ≪자기와 타자의 통치: 진리의 용기 Le gouvernement de soi et des autres II: Le Courage de la vérité≫에서 푸코가 '용기'를 집요하게 분석했던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자유로운 발화, 진리 말하기, 그리고 진리를 말하는 용기라는 테마는 용기의 진리라는 테마와 연결되어 있다."
온갖 불이익과 억압, 그리고 내적 검열에 맞서 용감하게 진실을 말하는 순간, 그 사람은 과거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 수밖에 없다. 현대 사회에서 쟁점이 되는 내부 고발자의 경우를 생각해보라. 그는 더 이상 조직이나 구조에 속할 수 없게 될 것이고, 결국 전혀 다른 삶을 영위하게 될 것이다. 바로 이 순간 구조에서 훈육된 주체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영위하는 주체가 탄생하는 것이다. 파르헤지아 개념, 그리고 용기라는 덕목을 강조하면서 푸코는 후기구조주의적 주체, 즉 "구조에 맞서는 자유"를 모색하고 있었던 셈이다. 불행히도 푸코의 파르헤지아 개념에서 우리는 낭만적 주체만을 발견하게 된다. 용감하게 진실을 말하지만 그 결과 온갖 불이익과 압력에 휘둘려 파괴될 수도 있는 주체, 다시 말해 오디세우스 Odysseus와 같은 여린 주체만으로 세계와 구조를 변화시킬 수 있을까. 중요한 것은 진실, 혹은 진리를 타인과 공유하면서 강고한 연대를 만드는 것 아닐까. 진실의 연대를 구성하려면, 다음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 자신이 발견한 진리, 혹은 자신이 자각한 진리를 타인이게 어떻게 전달해서 타인도 나와 마찬가지로 진리를 용감하게 말할 수 있는 주체로 만들 수 있을까?
타인에게 진실을 전달할 때, 중요한 것은 그가 진실을 감당할 만큼 성숙하지 않거나 용기가 없을 경우도 있다는 점이다. 이런 경우 화자가 진실을 모두 솔직하게 말해버리면, 타인은 진실은커녕 화자에게도 반감과 불쾌감을 가지기 쉽다. 예를 들어 순진한 꼬맹이에게 인간 탄생의 진실, 섹스의 진실을 이야기한다고 해보자. 무언가 동물적이고 점액질적인 느낌에 꼬맹이는 충격에 빠져버릴 수 있고, 심지어는 그 충격으로 자라서도 성적인 불구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 진실을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어떻게 하면 타인의 수준에 맞게 내가 알고 있는 진실을 그에게 전달하느냐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수준에 맞게 전달된 진실을 타인도 천천히 능동적인 주체로 만들고, 끝내는 진실의 공동체에 합류하도록 유도할 수 있다. 불교, 특히 대승불교에서 방편 方便, upāya을 강조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스스로 주인이 되는 자리 自利의 길 이외에도 타인을 주인으로 만드는 이타 利他의 길도 있기 때문이다.
대승 大乘, mahāyāna이란 커다란 수레를 의미한다. 자신도 타고 타인도 탈 수 있는 큰 수레가 바로 대승이다. 반면 소승 小乘, Hīnayāna은 자신만 탈 수 있는 작은 수레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수레에 탄다는 건, 삶의 주인이 된다는 것, 푸코의 말을 빌리자면 주체로 탄생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문제는 훨씬 더 빨리 움직이고 또 지면보다 높은 수레에 올라타기를 두려워하는 타인도 있으리라는 점이다. 맨바닥에서는 수레에 타고 있는 삶이 상당히 위태로운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긴 스스로의 삶을 결정하는 것보다 타인의 명령이나 아니면 훈육된 채로 사는 것이 더 편하다고 느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때 수레에 타고 있는 사람은 수레에 오르는 걸 두려워하는 사람에게 유혹하는 말을 할 수밖에 없다. 이곳이 좋은 곳이니 올라오라고 말이다. 이것이 바로 '방편'이다.
자비의 공동체, 혹은 자유로운 개인들의 공동체, 불교의 용어를 빌리자면 불국토 佛國土, buddhakṣetra로 유혹하는 방편을 ≪임제어록 臨濟語錄≫에서는 '공권 空拳', 즉 '빈주먹'에 비유했던 적이 있다. 이것은 절벽인 줄 모르고 나아가려는 꼬맹이를 말리기 위해 빈주억이지만 "애야! 이 손안에 맛있는 사탕이 있다"라고 유혹하는 것과 같다. 빈주먹에는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자기 엄격성보다는 거짓말을 해서라도 꼬맹이를 위험에서 구출하겠다는 사랑이 담겨있지 않은가. 자신만을 사랑한다면, 당당하게 진실을 이야기하면 된다. 그러니 용기의 진리이든 진리의 용기이든 이것은 오직 자신의 내면과만 관계하는 것이다. 스스로 당당하면 되니까 말이다. 그렇지만 타인을 사랑하는 순간, 방편을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사랑이다. 중요한 건 이렇게 될 때에만 우리는 진실, 혹은 진리의 주체에 머물지 않고, 진실의 공동체를 구성할 수 있다는 점이다. 연대와 유대가 없이, 어떻게 국가나 자본이란 거대한 압력에 효과적으로 대응해서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