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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찌옹수 Aug 18. 2019

어쩌다 우리 사회가 분노사회가 되었는가

성제준TV가 설명하는 현시대의 분노사회

We have an angry society, don’t we? - J.D. Greear -


뭔가가 이상하다. 어쩌다 우리 한국 사회가 이렇게 분노사회가 되었는가. 요즘 따라 이런 생각이 많이 들곤 합니다. 한병철 교수가 한국사회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사회를 가리키며 한 말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피로사회'이죠. 그런데 현재 돌아가는 상황을 보고 있자면 피로사회가 아니라 일종의 분노사회라고 생각이 듭니다. 뭔가 실질적으로 직접적인 관련되어 있는 것도 아닌데 어감이라든지 단어라든지 하나만 들어가더라도 폭발하는 게 지금 현재의 한국 사회가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어쩌다 국민의 절반 가까이 되는 사람이 이렇게나 분노에 물들게 되었는지 이제 알아야 합니다. 자유를 위해 목숨까지도 바친 우리 선배들의 피와 땀이 위대한 한국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자유에 대해서 그렇게나 많은 것들을 누려왔습니다. 그런데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요?


그것에 대해 답을 주는 학자가 있습니다. 바로 에리히 프롬 Erich Seligmann Fromm (1900~1980)입니다. 이 사람은 좌파인데 막시즘적인 좌파가 아닌 신좌파로 분류되는 사람입니다. <자유로부터의 도피 Escape from Freedom>이라는 책은 1941년도에 나왔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나온 것이죠. 그는 이런 식으로 진단을 합니다.


에리히 프롬 Erich Seligmann Fromm (1900~1980)
이 작가들이 표현한 것과 같은 그리고 많은 신경증 환자들이 느끼는 것과 같은 이런 개인적 고독감과 무력감을 정상적인 보통 사람은 전혀 의식하지 못한다. 그 느낌은 그들이 의식하기에는 너무 무섭다. 그의 일상적인 활동 그가 개인적 관계나 사회적 관계에서 얻는 자신감과 칭찬, 사업에서의 성공, 기분전환 즐기기 교제하기 여기저기 돌아다니기에는 그 고독감과 무력감을 완전히 덮어서 가려버린다. 하지막 어둠 속에서 휘파람을 불어도 빛은 비쳐오지 않는다. 고독감 두려움 당혹감은 그대로 남는다. 사람들이 그것을 영원히 참을 수 없다. 무엇으로부터의 자유라는 무거운 짐을 계속 짊어질 수는 없다. 소극적인 자유에서 적극적인 자유로 나 가아지 못하면 아예 자유로부터 도피하려고 애쓸 수밖에 없다.
<자유로부터의 도피 Escape from Freedom>


어쩌다가 독일이라는 나라에서 파시즘을 추구하고 있는 히틀러라고 하는 이 미치광이가 집권할 수가 있었는가? 독일 국민은 무엇을 생각해서 자기의 자유를 히틀러라고 하는 미치광이에게 내어주었는가? 히틀러가 집권하기 전에 이 온 세상에 누리고 있었던 자유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 자유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무엇인가로부터 벗어난가라는 뜻이죠. Freedom = Free from. 그 벗어난다는 대상의 대표적인 게 타인이죠. 타인으로부터 벗어난다는 자기 자신만의 어떤 완전성을 추구한다라는 것, 그것이 대표적인 자유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자유가 동시에 수반하는 것이 무엇이냐면 책임입니다. 내가 누군가로부터 벗어난다고 한다면 벗어나는 순간 동시에 발생하는 것이 내가 혼자서 짊어져야 된다라는 책임이죠.


에리히 프롬이 당시의 사람들을 보고 이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이런 식의 책임을 진다라는 것, 그 무거운 자유의 짐으로부터 사람들이 벗어나지를 못한다." 그 무거운 자유를 진다는 것이 갖고 있는 의무라는 책임, 그 책임이 너무나 무겁다 보니까 사람들이 그것을 짊어지고자 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그래서 오히려 도피를 해버린다는 것이죠. 사람들은 어디로 도피를 할까요? 에리히 프롬이 지적하는 바에 따르면 기분전환, 즐기기, 교제하기, 여기저기 돌아다니기, 이런 대로부터 끊임없이 도피하고자 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에리히 프롬이 말하길 자유가 오히려 많이 지게 되면은 그 자유로부터 발생하게 되는 책임, 그 책임이 무서워서 사람들은 오히려 도망하게 되는 것이고 그 도망을 가는 곳이 바로 쾌락, 파괴, 향락이 되는 것이죠. 그런데 그 도피의 끝에는 뭐가 있느냐. 에리히 프롬은 이렇게 말합니다.


절대 흔들리지 않을 만큼 강력하고 영원하고 화려하게 느껴지는 힘의 일부가 되어 그 힘의 기운과 영광에 참여하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자신의 자아를 포기하고 자아의 결부된 힘과 자존심을 모두 버리고 개인으로서의 본래 모습을 잃고 자유를 포기한다. 하지만 그 대신 강한 힘 속에 빠져들고 참여함으로써 새로운 안정과 새로 자부심을 얻고 또한 회의에 고통에서도 안전할 수 있다. 피학적인 사람은 제일 주인이 외부의 권 해이든 아니든 주인을 자신의 양심이나 정신적 충동으로 내면화했던 아니든 결정을 내려야 하는 부담에서 해방되고 자신의 운명의 최종 책임을 줘야 하는 부담에서도 해방되고 그리하여 내려진 결정에 대한 회의에서도 해방된다. 그는 또한 내 삶의 의미는 무엇이고 나는 누구인가 하는 의문에서도 해방된다. 이런 의문에 대해서는 그가 달라붙는 강력한 힘과의 관계가 대답해준다. 삶의 의미와 그 자신의 정체성은 그의 자아가 빠져든 보다 큰 전체가 결정해준다.
<자유로부터의 도피 Escape from Freedom>


자유라는 것은 누군가로부터 벗어나는 것이죠. 누군가로부터 벗어나는 그 순간, 우리는 나 혼자가 되었다는 그 고독감 그리고 절망감을 느끼게 되죠. 그것을 견딜 수 있는 책임을 짊어져야 되는 것인데 그 책임에 대해서 현대 사회 사람들은 짊어지지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대신 풀기 위해서 향락과 쾌락으로 빠져들게 되는 것이고 그리고 그 끝에는 뭐가 있다는 겁니까? 나의 자아를 포기해버리죠. 결국에는 나 혼자 남아 있다는 그 고독감을 견디지를 못하고 내 고독감을 대신 짊어줄 내 자아까지도 포기하면서까지 강력한 힘, 전체의 힘(전체주의)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내맡겨버린다는 겁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고독감을 견딜 수 없으니까 전체라고 하는 강력한 어떤 집단속에 나를 쏙 숨겨버리고 나를 거기에 내 던져버림으로써 내가 가지고 있는 고독감에서부터 벗어났다는 착각에 빠져 있다는 것. 그게 바로 에리히 프롬이 20세기 중반에 진단했던 인간의 모습이죠.


이런 식으로 개인의 자유를 포기하고, 집단속의 향락을 추구하며, 집단이라고 하는 전체주의 속에서 자신의 고독감을 숨겨버리고 혹은 숨겨버리려고 한다라는 그 개인의 모습이 나타나는 결과가 무엇이냐? 에리히 프롬이 한 가지 더 지적하는데 그것이 바로 <소유냐 존재냐 To Have or to Be?>라는 책에서 나옵니다. 이런 식의 전체주의 모습이 다음으로 연결되는 것이 소유다. 끊임없이 인간을 소유하려고 함으로써, 끊임없이 인간의 사적 재산을 추구하려고 한다는 것이죠.


정리하면, 인간이 지금 가지고 있는 자유로부터 발생하는 절망감 거기서부터 피하기 위해서 에리히 프롬은 3가지 정도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3가지 요소를 심리학자로서 에리히 프롬이 지적하고 있는 것이 가학증적이다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죠.

1) 집단 속에 자기를 숨기려고 하는 것

2) 쾌락과 황홀감 여기에 빠지려고 하는 것

3) 사적 재산을 끊임없이 소유하고자 하는 것


끊임없이 쾌락과 자기 파괴적, 그리고 자기 가학적인 성질로 뭉쳐있게 됨으로써 사람들은 어떤 것에 관련되어 있는 그 어떠한 작은 것이라도 나오게 되면 폭발하게 되는 것이죠. 끊임없이 불완전하고 끊임없이 불안한 사람들이 모여있는 집단. 자기 자신의 자아조차도 포기하여 모여 있는 집단. 그런 집단이 현재의 우리 사회의 모습이라는 것이죠. 20세기 중반에 에리히 프롬의 세 가지 책 <자유로부터의 도피 Escape from Freedom>, <사랑의 기술 The Art of Loving>,<소유냐 존재냐 To Have or to Be?>이 왜 도대체 현대사회에서 다시 이런 목소리를 내게 됐는지 저는 개인적으로 굉장히 비극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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