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찌옹수 Aug 15. 2019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에 대한 철학자의 대답

무기력한 삶을 살 것인가? 자유를 관철하는 삶을 살 것인가?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에 대한 한 철학자의 대답

석가가 들어오면 조선의 석가가 되지 않고 석가의 조선이 되며, 공자가 들어오면 조선의 공자가 되지 않고 공자의 조선이 되며, 무슨 주의가 들어와도 조선의 주의가 되지 않고 주의의 조선이 되려고 한다. 그리하여 도덕과 주의를 위하는 조선은 있고 조선을 위하는 도덕과 주의는 없다. 아! 이것이 조선의 특색이냐, 특색이라면 특색이나 노예의 특색이다. 나는 조선의 도덕과 조선의 주의를 위하여 곡하려 한다.
- 신재호, <낭객의 신년만필>, 동아일보, 1925년 1월 2일


대학교 신입생들에게 철학을 강의할 때 내가 첫 시간에 반드시 이야기하는 것이 있다.


여러분은 지금 결단의 순간에 서 있습니다. 스무 살로 1학년을 보낼 것인가, 아니면 한 살로 1학년을 보낼 것인가? 결정을 해야만 합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고개를 갸우뚱거리지만, 나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지금까지 여러분은 가정, 학교, 그리고 대중매체를 통해서 훈육되었습니다. 당연히 여러분의 자아는 구성된 자아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물론 이것은 무력한 여러분으로서는 불가피한 일입니다. 모든 제도 교육의 목적이 그렇지만, 교육은 기본적으로 교육을 받는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교육을 수행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능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여러분을 위한다는 귀에 솔깃한 이야기도 절대 빼먹지는 않을 겁니다. 이제 제가 여러분이 한 살로 살아야 한다고 강조하는 이유를 짐작하시겠습니까? 이제 여러분은 자신의 자아를 여러분 스스로 만들 기회를 잡은 겁니다. 물론 이것은 여러분이 삶의 주체가 되는 결단을 의미합니다."


나의 이야기를 잠잠히 경청하던 학생들은 어떻게 하면 그럴 수 있는지 되물어본다. 이 경우 나는 어김없이 다음과 같이 말해준다.


"새로운 삶의 주체로 거듭나기 위해서 여러분은 과거에 배웠던 모든 가르침, 그 기억을 버려야만 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기억을, 여러분의 삶을 긍정할 수 있는 새로운 기억을 하나씩 다시 쌓아야만 합니다. 사실 새로운 기억들이 만들어지지 않는다면, 낡은 기억들을 밀어내서 버릴 수 있는 방법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이제 거의 모든 것을 직접 온몸으로 경험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겁니다. 처음에는 불쾌한 경험과 유쾌한 경험이 교차할 겁니다. 불쾌한 경험은 우리를 위축시키지만, 유쾌한 경험은 우리를 달뜨게 만듭니다. 불쾌한 경험은 우리를 무기력하게 만들지만, 유쾌한 경험은 우리에게 활기를 부여합니다. 그렇지만 항상 불쾌한 경험과 유쾌한 경험이 동일한 비중으로 일어난다고 비관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여러분은 불쾌한 경험을 피하고 유쾌한 경험을 지향하는 삶의 의지가 강해지게 될 테니까요. 이런 식으로 반복하다 보면, 유쾌한 경험이 많아지고 그에 따라 유쾌한 기억도 차곡차곡 쌓일 겁니다. 마침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무겁고 불쾌한 과거 기억들은 점점 여러분의 내면에서 자취를 감추게 될 겁니다."


그렇다. 인간은 기억의 지배를 받는 존재다. 문제는 기억에 다음과 같은 2 가지 종류가 있다는 사실이다. 첫 번째우리의 삶을 우울하고 비참하게 만들어 삶을 체념하도록 만드는 기억, 즉 불쾌한 기억이다. 에너지 보존의 법칙을 한번 생각해보자. 우울하고 무거운 삶을 영위할 때, 우리는 그만큼 자신의 삶이 가진 활력을 다른 사람들에게 빼앗기고 있는 셈이다. 유년 시절 부모에게서 받은 경제적 혹은 정서적 상처, 생활 도처에서 경험할 수밖에 없는 정치적 억압, 대중매체를 통해 얻은 자본주의적 감성, 학교 혹은 여타 조직을 통해 반복적으로 주입되는 보수적 교훈들. 이런 기억들의 지배를 받을 때, 우리는 하염없이 무기력해진다. 당연한 결과지만 우리의 무기력을 대가로 소수의 누군가는 이와 반대로 과도한 활력, 과도한 지배력을 얻게 될 것이다. 그래서 불쾌한 기억은 노예의 기억, 그러니까 자유와 당당함을 빼앗긴 사람의 기억이다.


다행스럽게도 우리에게는 불쾌한 기억 이외는 다른 종류의 기억도 존재한다. 바로 이것이 유쾌한 기억이다. 유쾌한 기억은 우리의 삶을 즐겁고 유쾌하게 만들어 도전적인 삶은 영위하도록 만든다. 자신의 힘이 커졌다는 느낌, 그리고 더 커질 것 같다는 느낌을 주니까 말이다. 물론 이 기억은 자기 삶의 당당한 주인이 아니라면 누릴 수 없는 것이다. "스무 살로 1학년을 보낼 것인가, 아니면 한 살로 1학년을 보낼 것인가?" 대학 신입생들에게 던진 나의 질문은 사실 우리 모두에게 던지고 싶은 질문이기도 했다. 불쾌한 기억을 지속하며 살 것인가, 아니면 유쾌한 기억을 만들며 살 것인가? 국가, 자본, 관습 등의 지배를 받고 살 것인가, 아니면 자유를 관철하는 주인의 삶을 살아낼 것인가? 전자에 대해 단호하게 'No!'라고, 그리고 후자에 대해 활기차게 'Yes!'라고 외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결단을 통해서만 우리에게 정말 주인, 혹은 주체로서의 삶이 허용될 테니 말이다.


만약 소망스러운 삶을 영위하고 싶다면, 우리는 이런 암울한 기억부터 하나하나 극복해나가야 한다. 오직 이 경우에만 우리는 삶의 기쁨, 유쾌함, 명랑함을 되찾을 희망을 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역사라는 학문이 존재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 아닐까. 역사야말로 바로 다름 아닌 기억의 학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기억과 마찬가지로 역사에도 서로 상이한 2가지 성격의 부류가 존재한다. 유쾌한 기억을 가능하게 하는 역사가 있고, 반대로 우울한 기억을 조장하는 역사가 있다. 대개의 경우 전자가 인문주의자들의 저작물에서 발견된다면, 후자는 국가나 대학 등 제도권에서 쓰인 역사에서 주로 발견된다. 김수영의 시나 최인훈의 소설에서 우리가 유쾌한 기억을 지키고 만들려는 선배들의 집요한 의지를 발견하데 되는 것도 우연만은 아니었던 셈이다. 반면 대개의 제도권 역사는 이런 인문주의를 폄하하거나 왜곡하는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지금은 인문학과 문학이 위기에 처한 시대라고 한다. 대학에서는 인문학과들이 심하게 천대받고 있고, 심지어 인문학 전공자들이 취업에 불이익을 받고 있다. 한마디로 인문학은 밥벌이가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물론 돈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도록 만들어 보편적 매춘을 강요하는 자본주의 탓이 크다. 그렇지만 더 중요한 것은 자본주의의 압박에 굴종하는 우리의 모습을 정당화하거나 재촉하는 불쾌한 기억 아닌가. 바로 이것이다. 제도권 역사가 우리 내면에 각인하려고 했던 불쾌한 기억이 이제 인문주의자들이 품어왔던 유쾌한 기억을 압도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바로 이것이 인문학과 문학이 위기에 빠지게 된 본질적 메커니즘이다. 돈벌이가 되도록 인문학을 개조하는 것, 그러니까 인문학을 상품으로 만드는 것으로 인문학의 위기가 타개되지 않는다. 돈의 노예가 되어서야, 다시 말해 인간으로서 자긍심을 잃어버려서야, 인문학자와 문학자가 어떻게 인간에게 유쾌한 기억의 전망을 줄 수 있다는 말인가.


철학사도 마찬가지 아닌가. 인문주의적 철학사와 제도권의 철학사! 철학의 역사를 한번 살펴보자. 그 안에는 인간의 사랑과 자유를 노래하는 수많은 철학자들도 있지만, 동시에 개개인의 행복보다는 국가와 같은 공동체의 안정 혹은 자본주의 등 기존의 질서를 정당화하려는 철학자들도 있다. 전자의 철학자를 중심으로 인문주의적 철학사를 구성할 수 있고, 아니면 후자의 철학자를 중심으로 제도권의 철학사를 구성할 수도 있다. 유쾌한 기억의 싹을 소망스럽게 품고 있는 철학사와 불쾌한 기억을 탁하게 유포하려는 철학사! 인문학적 감수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다시 말해 인간의 소망스러운 미래를 낙관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전자의 철학사를 구성하려고 시도할 것이다. 이것은 물론 내 경우에도 예외가 아니다. 하지만 미래의 희망을 위해 유쾌한 기억을 복원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유쾌한 기억을 위해 암울한 기억을 조장하는 철학자들의 논리와 맞서 싸울 수 있어야만 한다.


어떤 형식으로 이루어지든, 논쟁은 논쟁 당사자의 승패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논쟁에서 더 중요한 것은 논쟁에 참여하지 않고 논쟁을 지켜보고 있는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을 자기편으로 만들 수 있느냐의 여부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암울한 철학자들의 내적 논리의 허약함, 그리고 인간에 대한 그들의 비관적인 전망을 폭로해야만 한다. 오직 그럴 때에만 대다수의 우리 이웃들이 암울한 철학자들의 논리에 말려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강신주, <철학 vs 철학>, (pg.1311~1315)
작가의 이전글 책을 읽으면 일어나는 놀라운 일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