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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찌옹수 Aug 12. 2019

책을 읽으면 일어나는 놀라운 일들

한 철학자가 쓴 책의 머리말

맬러머드 Bernard Malamud (1914~1986)

맬러머드 Bernard Malamud (1914~1986)라는 작가의 작품 중 ≪수선공 The Fixer≫이라는 소설이 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읽고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의 책을 인근 도시의 한 골동품상에게서 구입했습니다. 값으로 1 코펙을 지불했는데 벌기 힘든 돈을 그렇게 책 사는 데 낭비했다고 금방 후회했습니다. 얼마 후 몇 쪽을 읽게 되었고, 그다음에는 마치 돌풍이 등을 밀고 있기라도 하듯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당신에게 말씀드리지만, 제가 모든 것을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생각을 접하게 되자마자 우리는 마치 요술쟁이의 빗자루를 타는 것과 같은 경험을 하게 됩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이전과 동일한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너무나 부럽지 않은가? 한 권의 철학책을 넘기자마자 누군가는 "돌풍이 등을 밀고 있기라도 하듯 멈출 수 없었던" 경험을 했던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의 경험을 했던 적이 있다. 장자, 나가르주나, 비트겐슈타인, 알튀세르, 그리고 들뢰즈를 읽으면서 말이다. 지금도 이들과 관련된 자료나 책이 나오면, 당장 읽을 수 없더라도 꼭 구입해놓고는 한다. 그들을 처음 만났을 때 받았던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강렬한 자극이 그만큼 생생했던 것이다. 젊은 시절 겨울밤 도서관을 나오면서 차가운 하늘을 올려다보며, 나는 나의 정신적 키가 한 뼘 정도 커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정말로 그 당시 "나는 이제 더 이상 이전과 동일한 인간이 아니었다"라고 느꼈다. 만약 이들을 만나지 못했다면 나는 철학자가 될 수 있었을까? 아마 그렇지 못했을 것이다.


철학자가 되지 않았다면 지금쯤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어느 후미진 곳에서 억만년의 시간과 씨름하는 지질학자가 되었거나 혹은 깊은 산맥 어느 한편에 모닥불을 벗 삼아 잠을 청하는 외로운 여행가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인적이 드문 낯선 곳에 대한 동경을 접게 했을 정도로 몇몇 철학자들과 그들의 텍스트들은 내게 너무나 강한 희열을 안겨주었다. 기쁨과 행복은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법이다. 지금까지 내가 강의 혹은 책을 통해 사람들과 만나려고 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나에게 영향을 주었던 철학자가 다른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의 매력과 기쁨을 줄지 아직은 알 수 없는 일이다. 어떤 사람들은 임제나 원효 혹은 라이프니츠나 메를로-퐁티 같은 다른 인물들로부터 희열을 얻을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모든 사람들에게는 자신만의 연인이 있듯 그들에게는 역시 자신만의 철학자가 있는 법이다.


나는 다짐했다. 언젠가는 동서양의 수많은 철학자들을 한 권에 담아 사람들에게 알려주어야겠다고 말이다. 무엇인가와 마주쳐야만 사랑에 빠질 수도 있고 혹은 미워할 수도 있을 것이다. 철학자들과 그들의 텍스트를 접하지 않는다면, 자신을 돌풍처럼 밀어붙이는 철학자를 어떻게 발견할 수 있겠는가? 마침내 기회가 주어졌고, 나는 동양과 서양 그리고 과거와 현재를 활기차게 넘나드는 새로운 철학사를 집필하게 되었다. 이 철학사의 흐름 속에서 독자들은 100여 명 이상의 굵직한 철학자들의 사유를 통해 인류의 지적인 정수를 쉽지만 매우 강렬하게 맛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의 철학사는 단순한 철학사적 정보를 제공하는 것으로 결코 만족하지 않는다. 나의 야심은 이보다 더 크다. 그것은 나의 철학사를 통해 독자들이 자신을 달뜨게 만드는 정신적 멘토를 찾고, 나아가 자신만의 철학자를 마치 열광적인 팬처럼 사랑하도록 하는 것이다. 사랑이 강할수록 우리의 앎도 깊어지고, 우리 자신 역시 바로 그만큼 성숙할 테니 말이다.


2010년 2월
광화문 사무실에서
강신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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