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찌옹수 Aug 10. 2019

국가는 불가피한가? <고찰>

사회계약론의 맨얼굴, 국가주의

국가를 철학적으로 사유한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국가기구란 것이 압도적인 무력으로 개체들을 압박할 수 있다는 무의식적 공포가 항상 우리 뇌리를 사로잡고 있기 때문이다. 이점에서 중세사회에서 근대사회로 급변하던 시기는 국가 문제를 사유하는 데 매우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해준다. 이 급변기에 신을 정점으로 이루어졌던 국가질서가 여지없이 붕괴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이 시기에 국가를 정당화하는 논의들이 모두 예외 없이 사회계약론이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회계약론의 바닥에는 '인간=무질서, 국가=질서'라는 묘한 등식이 전제되어 있다. 국가가 존재하지 않으면 인간들은 서로를 약탈하고 살육하리라는 것, 그러니 이걸 막는 국가는 선하다는 것이다.


여불위 呂不韋 BC290~BC235

사실 이런 국가주의는 홉스에게서만 확인되는 것이 아니라, 동아시아에서는 제자백가 시절에도 발견되는 생각이었다. 진秦나라가 전국시대를 통일하려고 할 즈음, 당시 진나라의 재상 여불위 呂不韋 BC290~BC235가 편찬한 ≪여씨춘추呂氏春秋≫ <탕병 蕩兵> 편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등장한다.

"아직 치우 蚩尤가 없던 시절에 백성들은 나무를 벗겨 들고 싸웠다. 이긴 자는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우두머리로도 아직 다스리기에는 충분하지 않았다. 그래서 군주를 세웠는데, 군주로도 다스리기에는 충분하지 못했다. 그래서 천자를 세웠다. 천자는 군주에서 나왔고, 군주는 우두머리에서 나왔고, 바로 이 우두머리란 투쟁에서 나왔다." 

전설적인 군주 치우를 인용하면서, 여불위는 동아시아적 사회계약론, 혹은 국가주의를 피력하고 있다. 인간들 사이의 투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강력한 공권력을 소유한 국가가 불가피하다는 생각이다.


이런 국가주의적 발상을 세련되게 다듬은 것이 서양 근대 초기의 사회계약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로크홉스를 사회계약론적 국가주의를 표방하고 있다고 정의할 수 있다. 사회계약론에는 개개인들은 악이고 국가는 선이라는 해묵은 국가주의가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결국 사회계약론을 표방하면서 마치 개인들이 자유로운 계약 주체인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로크나 홉스는 모두 국가를 정당화하려고 했던 것이다. 두 사람은 모두 기본적으로 자유로운 개인들이 자발적으로 자신의 권리를 주권자에게 양도한다고 이해했다. 물론 홉스의 말대로 그 순간 자유로운 개인들은 주권자의 지배를 받는 '국민'으로 전락하게 될 뿐이다. 바로 이 순간이 '자발적 복종'이라는 허구적 논리와 그에 대한 환각이 발생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자발'에 초점을 두는 순간 개개인은 자신이 자유롭다는 환각에 빠지지만, 그것은 단지 국가에 대한 복종일 뿐이다.


데이비드 흄 David Hume (1711~1776)

사회계약론이 하나의 진리인 것처럼 통용되던 시절, 그것이 단지 하나의 허구에 불과하다고 공격했던 또 다른 철학자가 있었다. 그가 바로 스코틀랜드 출신의 경험론자 데이비드 흄 David Hume (1711~1776)이었다. 그의 <원초적 계약에 대하여 Of the Original Contracts>가 중요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짧은 논문에서 흄은 인간이 결코 자유롭게 계약을 맺기 어렵다는 사실을 '가난한 농민들과 장인들'의 사례를 예로 들며 설명한다. 다른 지역으로 떠나서는 결코 조금도 살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은 어떤 계약이든 달게 수용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다는 것이다. 만약 진정으로 사회계약이 가능하려면, 모든 사람들이 자유롭게 주어진 국가나 사회를 떠나서 살 수도 있어야만 한다. 이 점이 바로 흄으로 하여금 당시 유행하던 다양한 사회계약론들을 허구에 불과한 것으로 공격하게 했던 핵심 근거였다.


나아가 흄은 인간이 어떤 사회에 참여하는 것 자체가 비자발적이라는 사실도 덧붙이고 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어떤 국가나 사회를 자율적으로 선택하는 것이 결코 아니라, 주어진 국가나 사회에 맹목적으로 던져지면서 훈육되는 존재일 뿐이라는 말이다. 흄의 지적이 타당하다면 우리는 자유롭게 자신들이 몸담을 공동체를 선택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경제적 비참함이 극복되지 않을 경우 이러한 이러한 부자유 상태는 영원히 지속될 수밖에 없다.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는 클라스트르의 통찰에서 큰 힘을 얻을 수 있다. 그는 우리에게 아주 오랫동안 인류가 경제적으로 곤궁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자유로운 연대를 실현하고 유지하기도 했던 사실을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요즘도 빵이 커져야만 분배를 할 수 있다는 어설픈 주장이 있다. 하지만 이런 논리는 결국 어떠한 빵도 나누어주지 않겠다는 탐욕스러움의 표출에 지나지 않는다. 나누려는 의지는 빵이 커진다고 해서 갑자기 생기는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분배의 논리에는 더 많이 가진 자와 그렇지 않은 자라는 근본적인 위계 관계가 전제되어 있지 않은가!

작가의 이전글 국가는 불가피한가? [클라스트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