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찌옹수 Aug 22. 2019

진실은 어떻게 전달되는가? [벤야민]

"사람들을 놀라게 해서 깨워라!"

그람시는 철학과도 같은 인식의 영역보다는 대중의 느낌과 이해에 접해 있는 영역, 즉 문화 영역에 더 큰 관심을 기울였다. 그람시를 때로는 문화철학자로 규정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이미 자본이나 국가가 먼저 알고 있었던 것 아닌가. 자신들의 헤게모니를 관철시키기 위해 그들이 사활을 걸고 있는 영역이 바로 문화니까 말이다. 언론과 예술 분야에서 작동하는 검열이 그 좋은 증거라고 하겠다. 이를 통해 자본이나 국가는 대중을 체제에 순종하도록 훈육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대중이 자신의 삶의 조건을 인식하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그러니 문화에서 헤게모니 싸움은 불가피한 법이다. 이제 더 이상 인식의 정상으로 올라오라는 고독한 정규만으로 세상을 바꾸지는 못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거의 비슷한 시기 독일에서도 그람시와 유사한 통찰에 이른 철학자가 있었다. 고상한 상아탑에서 안주하기보다는 저잣거리에서 대중에게 정치경제학적 진리를 알려주려고 좌충우돌했던 철학자, 바로 벤야민 Walter Benjamin (1892~1940)이다.


흥미로운 건 벤야민에게는 그람시에게서 산의 정상과도 같았던 철학, 인식, 양식의 영역 자체가 가급적 배제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모든 걸 내려다볼 수 있는 그런 조망 자체를 부정하기 때문이다.


바보들이나 비판의 쇠퇴를 애석해한다. 비판의 명맥이 끊어진 지 이미 오래인데도 말이다. 비판이란 정확하게 거리를 두는 문제이다. 비판이 본래 있어야 할 곳은 원근법적 조망과 전체적 조망이 중요한 세계, 특정한 관점을 취하는 것이 아직도 가능한 세계이다. 그런데 지금 온갖 사물들이 너무 긴박하게 인간 사회를 짓누르며 다가오고 있다. '편견 없는', '자유로운 시선' 같은 것은─그저 전혀 그럴 능력이 없다는 것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방식이 아니라면─거짓말이 되었다. 오늘날 사물의 핵심에 가장 본질적으로 가 닿는 시선은 광고라고 불리는 상업적 시선이다. 광고는 자유롭게 관찰할 여지를 없애버리며, 영화의 스크린에서 차가 점점 거대해지면서 우리 쪽으로 흔들리며 질주해오듯이 사물들을 바로 우리 눈앞에까지 들이민다. ≪일방통행로 Einbahnstraße≫


"바보들이나 비판의 쇠퇴를 애석해한다!" 칸트의 비판을 떠올릴 수 있다면 이 말은 "바보들이나 철학의 쇠퇴를 애석해한다!"라고 이해할 수도 있다. 존재니, 생성이니, 주체니, 정신이니, 물질이니, 경제니, 무엇이라고 불리든 모든 것을 한꺼번에 조망할 수 있는 "특정 관점"이 가능해야 비판 활동, 혹은 철학이 가능한 법이다. 그렇지만 벤야민이 보았을 때, 우리 시대를 근본적으로 규정하는 자본주의는 그런 초월적인 전망이나 조망의 여유를 허락하지 않는다. 아마도 가능하다면 그건 케케묵은 책들로 둘러싸인 대학에서나 가능할지도 모른다. 자본주의의 발달과 변형은 우리를 새로운 사물, 새로운 문제, 그리고 새로운 사건의 파노라마 속으로 던져 넣어버린 것이다. 이곳이 바로 벤야민이 살았던 1920년대나 1930년대의 베를린이나 파리였다. 상대적으로 낙후된 이탈리아에서 살고 있던 그람시는 너무나 빨라져서 현기증마저 일으키는 문화 영역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노동조합의 문제를 해결하기도 전에 비정규직 문제가 도래 해버 리거나, 이혼 문제를 해결하기도 전에 독신자 증가의 문제가 발생해버리는 형국이라고나 할까.


광고와 영화로 상징되는 소비문화에 젖어 있는, 그래서 실천자가 아니라 구경꾼으로 전락한 대중에게 억압과 착취의 진실을 전할 수 있을까? 꼰대처럼 정신과 주체, 수탈과 재분배, 혹은 잉여 가치나 이윤율을 읊조리는 순간, 이미 매스컴의 현란한 불빛에 포획된 그들의 느낌과 이해를 깨울 수는 없는 법이다. 벤야민의 영민함은 그가 '이이제이 以夷制夷' 그러니까 '오랑캐로 오랑캐를 제압해야 한다'는 동양적 지혜를 알고 있다는 데서 빛을 발한다. 우리로 하여금 상품을 사도록 유혹하거나 자본주의적 삶을 긍정하도록 만드는 광고, 그리고 우리의 푼돈을 노리거나 우리의 정치적 판단을 후리게 하는 영화의 강력한 힘을 역이용하는 것이다. 그렇다. 몽타주와 클로즈업 등 편집의 힘으로 필요한 사물에게 빛을 부여하는 것이다. 주목과 부각의 방법! 이제 비평처럼 "정확하게 거리를 두는"방법이 아니라, 오히려 보는 사람의 내면을 압도하도록 사물에 "더 가깝게 접근하는" 방법이 필요한 것이다. 광고의 상상력이 상품에 매혹되게 하는 데 있다면, 영화의 상상력은 어떤 이데올로기에 빠지도록 하는 데 있다. 그러니 이런 힘을 가진 상상력을 제대로 이용한다면, 대중으로 하여금 억압과 자유와 관련된 인간의 진실에 매혹되도록 할 수 있지 않은가. 이것이 바로 벤야민의 '이이제이' 전술이다.


벤야민은 그람시보다 더 나아갔던 것이다. 결국 그에게 남는 것은 그람시의 표현을 빌리자면 느낌과 이해의 세계, 그것도 숨 가쁘게 변신하는 현란한 매스컴의 시대였다. 바로 이곳에서 자본과 국가랑 목숨을 건 투쟁을 해야 하는 것, 그것도 자본과 국가가 가장 자랑하는 광고와 영화의 힘을 이용해서 투쟁하는 것, 이것이 벤야민이 스스로에게 부가한 소명이었던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벤야민의 독립영화를 제작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다. 그람시와 마찬가지로 그에게는 펜 한 자루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핵심은 글쓰기에 영화적 편집 기법을 도입하는 데 있다. 그래서 벤야민은 ≪아케이드 프로젝트≫에서 강조했던 것이다.

"이 작업에서는 인용 부호 없이 인용하는 기술을 최고도로 발전시켜야 한다. 그와 관련된 이론은 몽타주 이론과 극히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 이 프로젝트의 방법: 문학적 몽타주. 말로 한건 하나도 없다. 그저 보여줄 뿐."


그렇다. 광고에서 거대한 코카콜라를 네온사인으로 각인하듯, 아니면 미녀의 행복한 미소 속에서 깔끔하게 정돈된 냉장고를 각인하듯, 영웅주의 영화를 통해 좋은 지배자의 이미지를 각인하듯, 벤야민도 글을 통해 대중에게 진실을 각인하려고 했던 것이다. 아니 정확히 말해 스스로 진실을 향해 깨어나도록 유혹하는 것이다.


진리 또란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 아이나 여자처럼) 우리가 검은 천 아래 쪼그리고 앉아 글쓰기라는 렌즈를 들이댈 때는 가만히 사랑스러운 얼굴로 이쪽을 바라봐주기를 거부한다. 소동에 의해서든 아니면 음악에 의해서든 또는 도움을 요청하는 외침에 의해서든 진리는 화들짝, 돌연한 일격을 당한 듯 자기 침잠에서 깨어나기를 바란다. 진정한 작가의 내면에 갖춰져 있는 비상 경보기를 헤아릴 수 있을까? 그리고 '집필한다'는 것은 그런 비상경보기를 켠다는 것과 다름없는 것이다.
≪일반통행로≫


벤야민은 영화처럼 글을 쓰려고 했다. "영화의 스크린에서 차가 점점 더 거대해지면서 우리 쪽으로 흔들리며 질주해오듯이 사물들을 바로 우리 눈앞에까지 들이미는' 것처럼, 벤야민은 설명하거나 논증하는 지적인 글보다는 보여주는 글을 쓰고 싶었던 것이다. 몽타주 이론, 특히 관객들의 감각과 아울러 사유까지도 매혹시키려는 '견인 몽타주' 이론에 따라 영화를 만들었던 에이젠슈타인처럼 말이다. 에이젠슈타인의 영화 <전함 포템킨>에 등장하는 그 유명한 오데사 계단 학살 장면을 떠올려보라. 대열을 맞추어 총을 쏘며 무자비하게 진군하는 군인들의 군홧발, 그리고 어머니의 손을 떠나 계단을 굴러 떨어지는 유모차! 두 숏이 하나의 몽타주로 결합되었을 때, 관객들은 억압의 진실을 가슴에 아로새길 수밖에 없지 않은가. 이렇게 하나의 사태와 또 다른 사태, 혹은 하나의 인용문과 또 다른 인용문, 그리고 하나의 광고 '찌라시'와 또 다른 광고 '찌라시'를 결합시켜 '문학적 몽타주'를 만들려고 했던 사람이 벤야민이었다.


불행히도 모든 몽타주가 관객에게 강렬한 자극을 주는 것은 아니다. 잘 만든 광고나 영화가 있는 것처럼, 잘 쓰인 글도 있기 마련이다. 벤야민이 "집필한다는 것은 비상경보기를 켜는 것"이라고 할 때 말하고자 했던 것도 바로 이것이었다. 독자, 혹은 대중에게 충격을 주어서 진리에 눈을 뜨게 할 수 없다면, 문학적 몽타주를 만들어 무엇하겠는가? 제대로 집필했다면, 독자들은 깨어날 것이고 당연히 저자가 전달하려고 했던 진실도 전달될 것이다. 결국 하나의 몽타주를 만든다는 것은 진리와 독자를 동시에 깨우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진리를 깨우는 것은 독자를 깨우는 것의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다. 다시 말해 진리를 깨운 저자가 항상 독자를 깨우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진리를 깨우지 못한 저자는 독자를 깨울 수 있으리라는 희망마저 가질 수 없다. 그래서일까, ≪아케이드 프로젝트≫에 등장하는 벤야민의 말은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인식은 오직 번개의 섬광처럼 이루어진다. 텍스트는 그런 후에 길게 이어지는 천둥소리 같다."

작가의 이전글 진실은 어떻게 전달되는가? [그람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