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람시 Gramsci (1891~1937), 니체 Nietzsche (1844~1900) ,벤야민 Benjamin (1892~1940)
그람시의 말대로 인식의 정상에 서 있는 지성인은 느낌과 이해의 영역에 매몰된 대중에게 자기가 서 있는 정상으로 올라오라고 외친다. 불행히도 대준이 콧방귀도 뀌지 않는다면, 지성인은 냉소주의에 빠질 수밖에 없다. 냉소주의에 빠지지 않으려면, 그 지성인은 고독한 정상에서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니체가 쓴 책의 주인공)처럼 저잣거리로 내려와야만 한다. 마찬가지로 벤야민도 지금은 모든 것을 조망하는 그런 정상과도 같은 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있어도 무용한 것이라고 선언한다. 그럼에도 "원근법적 조망과 전체적 조망"의 자리, 즉 비판이나 철학의 자리에 머물려고 한다면, 그는 꼰대로 전락할 것이고 세상의 조롱을 받을 것이다. 그 결과 벤야민의 지식인도 냉소주의에 빠지고 말 것이다.
과거와는 달리 무지가 문제가 아니라 너무나 많이 아는 것이 문제가 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계몽주의가 더 이상 힘을 발휘할 수 없는 시대가 도래한 셈이다. 무지를 지식의 등불로 밝히겠다는 것이 바로 계몽주의였다. 그렇지만 지금은 너무나 많은 정보, 너무나 많은 앎, 우리가 수용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고 복잡한 지식이 매일매일 우리에게 쏟아지고 있다. 마치 스마트폰이나 컴퓨터 화면에서 쏟아지는 현란한 빛처럼 말이다. 우리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쏟아지는 지식은 우리를 지치게 하고, 끝내는 지식들을 무관심하게 만든다. 여기서 현대판 무지몽매가 발생한다. 알 필요가 없는 것을 아느라고 정작 알아야만 하는 지식에 대해서는 무지 상태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체제의 지배 논리는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과거에는 알지 못하게 하는 것이 체제의 논리였다면, 이제는 지칠 정도로 많이 알게 해서 냉소주의에 빠지도록 만드는 것이 현대 체제의 세련된 논리이기 때문이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알고 있지만 자기만의 힘으로 바꿀 수 없다는 느낄 때, 우리는 냉소주의에 빠진다. 그러니까 냉소주의에 빠지지 않는 방법은 쉽다. 첫째,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것을 알아서는 안 된다. 한마디로 무식하면 된다. 무식하면 용감해지니, 여기서 차가운 냉소가 아니라 뜨거운 열정이 생길 것이다. 둘째, 혼자라는 생각을 버리고 연대와 사랑의 길로 나아가면 된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많은 사람과 공유하면, 우리는 자신이 무기력하다고 느끼지 않을 테니 말이다. 냉소주의의 치료제로 그람시는 "인식에서 이해나 느낌으로 이행해야 한다"라고 역설했고, 벤야민도 "원근법적 조망 전체적 조망"의 자리를 찾으려는 욕망을 거부하라고 이야기한다.
슬로터다이크 Peter Sloterdijk (1947~)
자신의 주저 ≪냉소적 이성 비판 Kritik der zynischen Vernunft≫에서 슬로터다이크 Peter Sloterdijk (1947~)는 냉소주의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모색했던 적이 있다.
"사물이 우리를 귀찮게 치근거린다면, 이 불편함을 표현할 수 있는 비판이 있어야 한다. 비판은 적당한 거리를 두는 문제가 아니라 적당한 가까움을 유지해야 하는 문제다. '당사자의 당혹'이란 말은 이런 풍토 위에서 만들어져 사람들에게 파고든다."
벤야민이 적당한 거리를 두는 비판을 냉소주의의 징후로 비판했다면, 슬로터다이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렇다면 "적당한 가까움을 유지하는" 비판이 가능한 것 아니냐고 기염을 토하고 있다. 그렇다. 슬로터다이크의 말대로 느낌과 이해의 세계, 삶과 사물의 세계로 내려오는 순간, 누구나 당혹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물리학자도 자기 자동차가 고장 났을 때 당혹감을 느끼고, 윤리학자도 성폭력으로 임신한 청소년과 만났을 때 당혹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바로 이 당사자의 당혹감이 중요하다. 당혹감을 느낀 사람은 당혹감을 제거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것은 당혹감을 주는 문제를 회피하는 것으로 가능하지 않다. 오히려 정면으로 돌파해야만 당혹감은 제거될 수 있다. 어떤 우여곡절이든 자동차의 시동을 걸 수가 있어야 물리학자로서 당혹감은 해소될 것이고, 태아를 죽이는 것과 산모의 삶을 파괴하는 것, 그 딜레마에서 어떤 결정을 내릴 수 있을 때 윤리학자의 당혹감은 해소될 것이다. 어느 경우든 당장 당혹감이 해소되지 않아도 좋다. 당사자는 어쨌든 그 당혹감을 해소하려고 뜨겁게 고민하고 노력할 테니 말이다. 당혹감을 낳은 문제에 과감히 달려들어 그걸 해소하려고 열정적으로 노력할 때, 냉소주의로 싸늘하게 식은 머리는 다시 뜨겁게 타오르게 되는 것 아닐지. 슬로터다이크의 벤야민적 교훈, "적당한 가까움을 유지해야 한다!"는 명령에 충실할 수만 있다면, 어떤 지성이라도 냉소주의의 마수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