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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찌옹수 Sep 21. 2019

언어는 무엇인가?

내 생각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


나의 내면을, 혹은 나의 생각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은 일상적인 통념 중 하나이다. 이런 통념이 가능한 이유는 바로 타자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속내를 말로 표현했을 때, 불행히도 타자가 나의 말이 가진 절박함을 수용하지 않을 수도 있고, 아니면 아예 나의 말을 오해해서 이상하게 이해할 수도 있다. 이런 경험이 반복되다 보면, 우리는 나의 내면 혹은 나의 생각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데 만약 타자가 없을 때도 나는 내 생각을 언어로 표현하기 힘들다는 느낌을 갖게 될까? 아마 그런 일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항상 언어를 통해서 이루어 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홀로 생각할 때, 우리는 자신이 사용하는 언어를 의식할 수 없었던 것이다. 자신이 사용하는 언어를 의식하려면, 타자의 개입은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별다른 의식 없이 사용하고 있는 우리 국어를 의식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반드시 국어를 공유하지 않은 외국인을 만나야 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이처럼 타자가 가정되지 않는다면 나의 생각을 말로 표현하기 힘들다는 느낌조차 사실 갖기 어렵다. 바로 이 문제에 주목하면서 메를로-퐁티 Maurice Merleau-Ponty (1908~1961)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메를로-퐁티 Maurice Merleau-Ponty (1908~1961)
말하는 사람은 말하기에 앞서 생각하지 않으며 말하는 동안에도 생각하지 않는다. 말하는 사람의 말이 생각 자체인 것이다. …… 생각은 내적인 것이 아니다. 또한 그것은 세계와 말의 밖에 있지도 않다. 그 점에서 우리를 속이는 것, 표현 앞에 대자적으로 존재한다는 생각을 우리로 하여금 믿게 하는 것, 이것은 이미 구성된 것이자 이미 표현된 생각들이며, 이것들을 우리는 말없이 스스로에게 회상시키고 이것들에 의해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내적 삶의 환산을 제공한다.
≪지각의 현상학≫


메를로-퐁티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말하는 사람은 말하기에 앞서 생각하지 않는다

여기서 '말하기'란 겉으로 표현되어 타자가 들을 수 있는 말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거기에는 말을 통해 표현 가능한 생각하기 작용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실 매우 중요한 통찰이다. 우리의 생각 자체가 언어를 통해 가능하다는 것, 따라서 일종의 말하기에 지나지 않느다는 것. 이 때문에 메를로-퐁티의 지적처럼 "말하는 사람의 말은 생각 자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흔히 생각을 먼저 하고 나중에 그것을 말로 표현한다고 착각하고 있다. 우리는 이렇게 믿곤 한다. 친구에게 돈을 빌려야 한다고 생각하고 나서 그에게 "돈 좀 빌려줄 수 있니?"라고 말하게 된다고 말이다. 바로 이 대목에서 메를로-퐁티는 친구에게 돈을 빌려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말을 통해서만 가능했던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이런 그에게 "표현 앞에 대자적으로 존재한다는 생각이 있다고 우리가 믿는 것"은 하나의 착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말하기에 앞서 생각이 순수하게 존재한다는 느낌이 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메를로-퐁티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말을 통해서만 가능했던 생각을 떠올리는 순간, 우리는 자기도 모르게 이것을 말과는 무관한 순수한 생각이라고 오인하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오해는 생각 자체 혹은 타인에게 말하기 등이 모두 동일한 말하기의 사례라는 것을 망각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의 생각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은 그 질문 자체가 이미 잘못 제기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미 어떠한 종류의 생각이든 이미 말로서 등장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위의 질문은 "나의 생각을 타자가 오해하지 않을 수 있게 표현할 수 있을까?"라고 바뀌어야 한다. 이제 우리는 이 대목에서 언어의 문제에 대한 동양철학자의 견해를 함께 읽어볼 필요가 있다. 동양에서는 언어 혹은 말의 기능을 어떻게 이해했던 것일까?


통발은 물고기를 잡으려는 수단이기 때문에 물고기를 얻었다면 통발은 잊는다. 올무는 토기를 잡으려는 수단이기 때문에 토기를 얻었다면 올무는 잊는다. 말言은 뜻意을 잡는 수단이기 때문에 뜻을 얻었다면 말은 잊는다. 나는 어디서 말을 잊은 사람을 얻어서 그와 말을 나눌 수 있단 말인가?
≪장자≫, <외물外物>


타당한 말이다. 물고리를 잡았다면 통발을 제거해야 하고, 토기를 잡았다면 올무를 벗겨내야 한다. 여기서 통발이나 올무는 말을, 그리고 물고기나 통발은 뜻을 상징한다. 표면적으로 장자의 이야기는 말을 경시하고 뜻을, 다시 말해 생각을 중시해야 한다는 취지로 독해될 수도 있을 것이다. 상당수 학자들이 바로 이러한 경향의 해석에 빠져들곤 했다. 하지만 장자가 고민했던 것은 말과 생각 사이의 관계가 결코 아니다. 그를 괴롭히고 있었던 것은 타자와의 의사소통이 낳는 난점과 관련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마지막 대목을 보면 장자가 "나는 어디서 말을 잊은 사람을 얻어서 그와 말을 나눌 수 있을까?"라고 한탄한 것을 살펴볼 수 있다. "말은 뜻을 잡는 수단이기 때문에 뜻을 얻었다면 말은 잊는다"라는 구절은 "내가 건네는 말을 통해서 타자가 내 속내를 알았다면 그는 나의 표현 방법에 신격 쓰지 않을 것이다"라는 의미였던 셈이다.


실연으로 인해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는 내가 어떤 사람에게 "하늘이 오늘 유난히 푸르네"라고 말했다고 해보자. 타자가 만약 나의 상황과 나의 의도를 알고 있다면 이렇게 답할 수 있을 것이다. "좋은 사람이 곧 나타날 거야"라고 말이다. 그런데 만약 제삼자가 우리 사이의 대화를 들었다면, 그는 매우 황당무계한 선문답이라고 혀를 찼을 찌도 모른다. 하지만 누구든지 이런 타자를 만나서 이야기하고 싶지 않을까? 내가 건네는 말로 내 생각, 다시 말해 내 의중까지를 알아주는 타자를 만나는 것 말이다. 이것은 장자 그리고 우리가 모두 공유하는 소망이라고 할 수 있다. 장자가 "나는 어디서 말을 잊은 사람을 얻어서 그와 말을 나눌 수 있을까?"라고 물었던 것은 바로 이런 소망을 나타낸 것이다. 사실 나만의 말하기라고 할 수 있는 나의 생각을 타자에게 말로 표현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이와 갈리 타자가 나의 생각과 의도를 제대로 간파하고 이해한다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잘 이야기했다고 확신하더라도, 타자는 언제든지 나의 확신을 좌절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비트겐슈타인 Ludwig Wittgenstein (1889~1951)

우리는 언제나 의사소통에서 야기되는 절망에 노출되기 쉽다. 다시 말해 세계나 인생에 대한 나만의 고뇌를 타자에게 말로 표현할 때, 우리는 좌절할 위험에 쉽게 노출된다는 말이다. 사실 우리가 고독한 유아론에 빠지기 쉬운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윤리적인 문제, 종교적인 문제, 그리고 미적인 문제에 대해서, 즉 자신에게 진정으로 중요한 문제들에 대해 우리는 남을 어렵게 설득하려고 하기보다 오히려 침묵으로 일관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 모두가 타자와의 의사소통을 완전히 거부하면서 살아갈 수는 없는 법이다. 바로 여기서 청년 비트겐슈타인 Ludwig Wittgenstein (1889~1951)의 고뇌가 시작된다. 그는 타자에게 말할 수 있는 것과 그럴 수 없는 것을 구분하려고 했다.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한다는 것은 어마나 소비적인 일인가? 쓸데없는 오해나 받지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성적인 청년은 말할 수 있는 것만을 말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 또한 얼마나 결벽증적인 태도인가? 타자에게 받을 오해와 몰이해를 견디지 못할 정도로 이 청년은 소심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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