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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찌옹수 Sep 14. 2019

좋아하는 일, 잘하는 일 따위는 없다

어떤 직업을 선택할 것인가?[시민의 교양]


자본가와 노동자의 근원적 대립은 사라졌다. 우리는 어떤 직업이든 선택할 수 있다. 임금 노동자, 비임금 노동자, 사업가, 투자가.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중복 선택도 가능하다. 임금노동자는 동시에 투자가일 수 있고, 비임금 노동자 역시 동시에 사업가나 투자가일 수 있다. 물론 사업가가 투자가일 수도 있다. 각각의 직업군이 갖는 특성에 대해서 알아보기 위해 우선 한 가지 직업군만을 선택할 수 있다고 해보자. 당신은 어떤 직업을 선택하겠는가?


좋아하는 일을 할 것인가, 잘하는 일을 할 것인가?


오늘날 사람들은 자신의 직업과 노동에서 보람과 성취를 느끼기 어렵습니다. 그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입니다. 현대사회에서 우리가 직업을 통해 기대할 수 있는 보상은 오직 임금뿐입니다. 이제부터 실제로 우리가 직업을 선택할 때 고려하는 것들이 3가지 있습니다. 성취와 보람, 수익률, 리스크.




성취와 보람


결론부터 말하면 오늘날 직업에서 성취와 보람을 찾는 것은 어렵다. 근대 산업혁명 이후 인류가 생산물을 생산하는 방식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산업화는 단적으로 말하면 공장의 탄생이라고 할 수 있는데, 여기서 공장은 2가지를 특징으로 한다. 분업기계화다. 이 둘은 인간과 생산물의 관계를 변화시켰다.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던 인간과 생산물의 관계는 산업화가 심화됨에 따라 점차 멀어졌다. 이에 따라 생산물로부터 얻을 수 있었던 노동에 대한 성취와 보람도 함께 멀어진다. 예를 들어보자.


여기 X가 있다. X는 중세에 신발을 만드는 장인이었다. 고객이 찾아와서 신발을 주문하면 X는 신발을 만들기 시작한다. 소의 가죽을 벗기고 잘 말린 다음, 모양을 따라 잘라낸다. 신발의 형태를 잡고 바느질을 해서 고정한 후에 약품 처리를 거치면 신발이 완성된다. 고객이 대가를 지불하고 신발을 가져간다. 신발은 누가 만들었는가? 당연히 X가 만들었다. X는 2가지에서 기쁨을 느낀다. 첫째는 판매에 따른 보상이다. 자신이 시간과 노력을 쏟은 만큼 정당한 대가가 지불되므로 여기서 느끼는 만족감이 크다. 둘째는 이로 인해 느끼는 성취와 보람이다. 완성된 신발은 온전히 X의 정성으로 탄생했다. 신발은 X의 노력에 대한 증거이자 결과물이다. 생산물과 X의 관계는 매우 밀접하다. 많은 시간이 흘렀다. 근대 산업화 이후에 X는 다시 태어났다. 이번에도 신발을 만드는 사람이 되었다. 나이키 공장에 취업했고 생산라인 중에서 중간 조립 부분에 배치를 받았다. 기계가 안창에 풀칠을 해서 깔창을 붙이면, X가 넘겨받아서 손으로 눌러 창 바닥을 고르게 하는 작업을 맡았다. X는 하루 종일 이 일을 반복한다. 중세 때에 비하면 운동화는 놀라운 효율성으로 대량 생산되고 있다. X의 손을 거쳐 간 운동화는 수를 세기 어려울 정도다. 어느 날 X가 쇼핑 중에 나이키 매장에 들렀다. X는 다양하고 화려한 운동화를 보면서 이것들이 내가 만든 운동화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생산물인 운동화는 생산의 주체인 X를 밀어낸다. 운동화는 X를 소외한다. 이것이 마르크스가 말했던 노동의 소외 현상이다. 근대 산업화 사회에서는 기쁨 하나가 사라진다. 그것은 성취와 보람이라는, 노동을 통해 얻는 기쁨이다. 생산물이 나를 소외하는 환경에서 성취와 보람을 느낄 대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X는 직업에서 성취와 보람 대신 급여로 만족을 얻는다. 이제 무슨 일을 하는지는 상관이 없다. 직업 선택에서 높은 급여가 최우선의 고려 대상이 된다. 하지만 여기서 두 번째 소외가 나타난다. X는 급여에서도 소외된다. 중세의 X는 자신이 투여한 노동과 시간에 정확하게 상응하는 대가를 받았다. 그러나 근대의 X는 그렇지 않다. 그대의 X는 자신의 노동과 시간을 투여한 생산물을 우선 자본가에게 빼앗긴다. 생산된 나이키 운동화 전체는 나이키 소유자의 것이다. 나이키 소유자는 시장으로부터 운동화 전체에 대응하는 대가를 받는다. 그리고 그 일부를 X에게 임금의 형태로 지불한다. X는 생산의 대가에서도 소외되는 것이다.


중세 노동 = 생산물 & 대가

근대 노동 ≠ 생산물 & 대가


이러한 상황은 일반적으로 '노동에 의한 인간 소외'로 알려져 있다. 노동의 결과물인 생산물과 대가가 노동자를 소외하는 상황을 말한다. 노동 소외 과정에서 노동자의 인간적 가치는 상실되고, 노동자는 무기력과 좌절 상태에 처한다. 여기서의 노동은 육체노동을 비롯해서 사무 노동까지 포함한다. 노동에 의한 인간 소외가 발생하는 원인은 생산 환경의 거대화와 기계화에 있다. 결론적으로, 자본가가 생산수단을 독점하고 노동자는 거대한 생산수단의 부품으로 전락하는 산업화 이후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가 일에서 성취와 보람을 느낀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그래서 노동자는 임금에서 노동의 보람을 찾고자 하지만, 그것마저도 나의 노동에 대한 온전한 대가라기보다는 나의 노력과 시간 투여의 일부분만을 대신 받는 것이다. 임금에서도 노동자는 소외된다.


그렇다면 오늘날 자신의 직업에서 성취와 보람을 느끼는 사람은 전무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자신의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서 발생한 생산물의 대가를 자신이 온전히 소유하거나, 생산수단을 소유해서 그것의 거시적인 방향성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들은 성취와 보람을 느낄 수 있다. 전자는 비임금노동자가 해당될 것이고, 후자는 사업가가 해당될 것이다.


투자가                △

사업가                ○

비임금노동자       

임금노동자           ×


우선 전문직 종사자 등과 같은 비임금 노동자는 자신이 하는 일의 전체 과정을 조망할 수 있고, 자신이 투여한 시간과 노력에 따라 대가를 받는다. 따라서 임금노동자에 비해 직업에 대한 만족도가 높다. 또한 수익에서도 자신의 노동과 시간 투여가 그 대가와 일치하므로 임금노동자에 비해 만족도가 높아진다. 다만 타인의 노동력을 이용하는 사업가나 투자가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수익이 크지 않다. 다음으로 사업가 역시 비임금노동자와 동일하게 자신의 일에서 성취나 보람을 느낄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생산수단 전체의 방향성을 결정할 권한이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또한 기업 전체의 생산물의 가치로부터 소외되어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타인의 노동력을 이용하므로 수익과 보상이 크다. 즉, 사업가, 비임금노동자는 임금노동자에 비해 상대적으로 노동으로부터 소외되지 않기 때문에 직업에서 성취와 보람을 얻을 수 있다.




수익률


임금노동자는 그래서 다른 직업군에 비해 높은 수익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직업에서 얻을 수 있는 성취와 보람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수익에서도 다른 직업군에 비해 임금노동자가 가장 적은 보상을 얻는다. 이것은 앞서 다뤘던 생산수단의 소유 여부 때문이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하는지 생산수단을 중심으로 한 직업군의 관계를 통해 확인해보자. 생산수단 소유자는 노동자들을 고용해서 가치를 발생시킨 후에 자신이 가져간다. 그리고 그중 일부를 임금의 형태로 노동자에게 돌려준다. 노동자 X가 하루에 10 단위의 가치를 생산하고 전체 노동자가 10명이라면, 해당 기업이 생산하는 가치의 총단위는 100 단위일 것이다. 여기서 생산수단의 소유자인 자본가 Y가 50 단위를 가져간다면, 나머지 50 단위는 10개로 쪼개져서 노동자들에게 5 단위씩 돌아간다. 노동자 X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의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서 10 단위를 발생시킨 후 그 대가로 5단 위만을 받는 것이다. 즉, 사업가 Y는 50 단위를, 임금노동자 X는 5 단위를 소유하게 된다.


100 : 총생산

50 : Y
5 : X1, X2, X3, X4, X5, X6, X7, X8, X9, X10


그런데 투자가 Z의 등장으로 인해, 단순했던 노동자와 자본가의 관계는 복잡해진다. Z는 Y의 기업과 비슷한 10개의 기업에 투자하고 있는 투자가다. Z가 투자하고 있는 10개의 기업이 창출하는 이익의 총단위는 400이 된다. 여기서 투자가인 Z가 250 단위를 가져간다면, 나머지 250 단위는 10개로 쪼개져서 사업가들에게 25 단위씩 돌아가게 된다. 결론적으로, Z는 250 단위를, Y는 25 단위를 소유하게 된다. 임금 노동자가 창출하는 전체 가치는 사업가와 투자가의 수익으로 전환된다. 임금노동자는 사업가나 투자가에 비해서 낮은 수익을 얻을 수밖에 없다.


500 : 총이익

250 : Z
25 : Y1, Y2, Y3, Y4, Y5, Y6, Y7, Y8, Y9, Y10
5 : X1, X2, X3, X4, X5, X6, X7, X8, X9, X10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개념이 있다. 절대적 수치만 보면 Z가 250 단위, Y가 25 단위, X가 5 단위로 그 수익면에서 Z가 단연 압도적이다. 그렇다면 Z가 가장 합리적인 사람일까? 꼭 그렇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그가 이러한 수익을 얻기 위해서 기존에 투자한 자본이나 가치의 크기를 여기서는 확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Z가 250 단위의 수익을 얻었지만, 실제로는 그가 투자한 자본이 이보다 컸다면 수익의 절대적 크기와 무관하게 그는 손실을 본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절대적인 수익의 크기만 볼 것이 아니라, 투자 대비 수익의 크기인 '수익률'에 대해서 이해해야 한다.


수익률은 '투자수익률'을 줄여 말한 것으로, 투자한 자본금에 대한 기대이익의 비율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Z가 연간 250 단위의 수익을 얻기 위해 기존에 투자했던 자본금이 2,500 단위라고 한다면 그의 수익률은 연 10%가 된다. Z의 성과를 평가하는데 기준이 되는 것은 결과물인 '250 단위'가 아니다. 투자금 대비 수익률인 '10%'다. 여기서 잠시 수익률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수익률을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투자의 적합성을 평가하는 1차적인 척도가 수익률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척도에 익숙해지는 것은 자본주의를 이해하며 살아가기 위해서 도움이 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가 창출되는 방식은 기본적으로 자본의 자기 증식이고, 이를 위해서는 자본의 투자가 필수적이다. 부동산, 주식, 화폐, 자원 등을 가릴 것 없이, 모든 자본의 투자는 수익률로 평가된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 Y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사업가 Y는 친구 사업가들이 있다. 그들은 각각 Y2와 Y3이다. Y는 운동화 공장에 4억을 투자했고, Y2는 카페에 6억을 투자했고, Y3은 건물에 8억을 투자했다. 그럼 각각 수익률은 어떻게 되나? 연간 수익률은 투자금 대비 수익이므로, 운동화 공장을 구입한 Y는 연 25%의 수익을 얻고, 카페를 구입한 Y2는 대략 연 17%의 수익을 얻고, 건물을 구입한 Y3은 연 12.5%의 수익을 얻는다. 이제 누가 가장 성공적인 투자를 했는지 알 수 있다. 매월 같은 수익을 발생시키지만, 운동화 공장을 구입한 Y가 가장 투자금이 적었기 때문에 성공적인 투자라고 할 수 있다. (현실에서는 현재 한국에서는 10%의 수익률이 넘는 투자 대상을 찾기가 쉽지 않다)


사회 전반의 투자수익률은 일반적으로 인플레이션과 관련이 있다. 그리고 인플레이션은 시장의 성장이나 통화량의 팽창과 연결되어 있다. 먼저 결과만 고려하자. 수익률은 금리와 연동되어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즉, 투자수익률이 높은 시기에는 은행 금리도 높게 형성된다. 반대로 투자수익률이 낮은 시기에는 은행 금리도 낮게 형성된다. 그리고 대부분의 투자 대상들은 언제나 은행 금리를 기준으로 이보다 높은 수익률을 보장할 때만 실제 거래가 이루어진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은행 금리와 확연한 차이를 보이는 것은 또 아니다. 은행 금리를 약간 상회할 뿐이다.


은행 금리 < 부동산, 주식, 사업 …


생각해보면 그럴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보자. 은행 금리가 2%인데 부동산 수익률이 20%라면, 모든 사람들은 은행에서 돈을 찾거나 빌려서 부동산을 수입하려고 경쟁할 것이다. 고수익을 보장하는 부동산부터 시장에서 빠르게 사라지게 된다. 그리고 점차 낮은 수익률을 보장하는 부동산까지 팔리는데, 정해진 기준은 없지만 은행 금리보다 높은 어딘가에서 멈춘다. 예를 들면 수익률 5%나 6%에서 멈추는 식이다. 은행 금리인 2%까지 수익률이 내려오지 않는다. 왜냐하면 환금성과 리스크 때문이다. 환금성은 자산의 가치를 현금화할 가능성을 말한다. 부동산은 환금성이 낮다. 그래서 은행 예금과 비슷한 수익을 발생시킨다면 사람들은 부동산에 투자하지 않을 것이다. 주식도 마찬가지다. 주식은 환금성은 좋으나, 리스크가 크다. 그래서 사람들은 은행 금리보다 더 큰 수익을 보장하지 않는다면 투자를 꺼릴 것이다. 즉, 환금성이나 리스크를 감수할 만큼의 수익이 보장될 때에야 비로소 투자가 이루어진다.


자본주의 시장에서 모든 자본은 수익률이 높은 생산수단으로 모인다. 사업가에게나 투자가에게나, 수익률은 투자 대상을 선정하는 가장 우선적인 기준이 된다. 그런데 이러한 수익률을 극대화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그것은 '레버리지 Leverage'라고 알려진 방법이다. 지렛대 Lever를 이용하면 무거운 물건도 적은 힘으로 들어 올릴 수 있는 것처럼 레버리지는 사업이나 투자의 수익을 확대하는 경향이 있다. 레버리지는 쉽게 말해서 빚은 이용하는 방법이다. 은행이나 타인의 돈을 이용해서 사업과 투자를 하는 것으로, 투자를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방법을 사용한다. 예를 들어보자.


Y는 부동산에 투자하려고 한다. 이 부동산은 1억 원짜리 매물로 연 10%의 수익률을 보장한다. 그리고 Y는 전 재산이 1억 원이다. 이 부동산을 구입하는 방법은 2가지이다. 첫 번째는 자기 돈 1억을 온전히 투자해서 구입하는 방법이다. 두 번째는 부동산을 담보로 은행에서 5,000만 원을 대출받아 구입하는 방법이다. 금리는 연 2%다. 어떤 방법이 더 좋은 방법인가?


우선 첫 번째 방법의 수익률 계산은 쉽다. 1억 원을 온전히 투자했으므로 수익률은 연 10%다. 매년 1,000만 원의 수익이 남는다. 두 번째 방법은 계산하기가 좀 까다롭다. 우선 부동산 수익이 연 1,000만 원인 것은 동일하다. 그런데 이 수익은 모두 내 것이 아니다. 은행에서 대출받은 5,000만 원데 대한 이자를 내야 한다. 연 금리 2%이므로 1년에 100만 원이다. 즉, 나에게는 매년 900만 원이 남는다. 수익률은 얼마인가? 실제로는 5,000만 원 투자한 것이므로, 투자금 대비 수익은 18%가 된다. 만약 아직 투자하지 않은 5,000만 원으로 같은 수익률을 보장하는 부동산을 하나 더 구입한다면, Y는 1억을 투자해서 매년 1,800만 원을 남기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은행의 빚을 이용하면 같은 돈을 투자해도 다른 수익률이 발생한다.



수익률과 레버리지에 대한 이해는 사업가와 투자가에게 가장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사항이다.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투자를 진행할 수는 없다. 이제 수익률과 레버리지가 어떻게 자산을 변화시키는지를 구체적으로 알아보려고 한다. 여기 재산에 차이가 있는 A, B, C 3명이 있다. A의 재산은 1억 원이고, B는 재산이 없고, C는 1억 원의 빚이 있다. 이들은 매월 50만 원을 저축할 수 있다. 우선 A는 수익률이 10%인 투자 상품에 투자하려 한다. 그런데 가지고 있는 1억 원만 투자하는 것이 아니라, 레버리지를 위해 은행에서 연 5%의 이자로 1억 원을 추가 대출받아서 투자한다. B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C는 현재 대출받은 1억 원의 빚을 갚아나갈 예정이다. 이자는 연 5%다.



사실 A, B, C의 재산이나 소득의 격차는 현실에 비해 매우 적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실제 현실이다. 실제 한국의 현실에서 재산을 소유하고 있고 레버리지를 이용하는 투자가는 적지 않다. 현재 빚이 있거나 혹은 레버리지를 이용하지 못하는 노동자들이 이들의 소득을 따라잡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수익률과 레버리지에 대해서 이해해야 한다. 이를 이용해 내가 실제로 투자를 진행하기 위해서뿐만이 아니다. 더 중요하게는 자본주의 이념의 한계를 직시하기 위해서다. 어떤 과정에서 빈부의 격차가 심화되는지, 어떤 원리로 자본이 스스로를 증식하는지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개인의 부가 노력을 통해 축적되는 것이라는 자본주의 이념이 왜 허구적인지를 이해할 수 있다.


정리하면


앞서 노동자는 사업가나 투자가에 비해서 직업에서 성취와 보람을 얻을 수 없음을 알아보았다. 노동자는 대신 임금으로 보상받는다. 문제는 노동자의 임금이 사업가나 투자가의 이익에 비해 매우 적다는 것이다. 사업가와 투자가가 높은 수익률의 투자 상품을 구입하고, 레버리지를 이용해서 수익률을 극대화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자본가와 노동자 간의 부의 격차는 점차 심화된다.



어떤 직업군을 선택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가? 확실한 것은 적어도 임금노동자는 아니다. 그들은 자신의 일에서 성취와 보람을 얻기 어렵고 수익도 낮다. 그렇다면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임금노동자가 되기 위해 애쓰고 경쟁하는 것일까? 다만 성취나 수익의 실체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일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임금노동자를 선택하는 것도 어떤 면에서는 합리적이다. 최근 변화하고 있는 경제 환경과 리스크를 고려했을 때, 임금노동자라는 직업군이 가진 이점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리스크


리스크는 '위험'으로 번역되기도 하지만, 이보다는 '불확실성'으로 번역하는 것이 수익률과 관계를 이해하는데 더 도움이 된다. 그리고 이러한 불확실성은 시장에서 정교하게 가격으로 환산되어 있다. 즉, 리스크가 높으면 그만큼 수익률도 높아진다. 반대로 리스크가 낮아지면 수익률도 낮아진다. 왜 그럴까? 어떤 필연적인 이유가 있는 걸까? 그런 건 아니다. 세상에는 수익률이 높지만 리스크는 낮은 투자 대상들도 존재한다. 문제는 그런 대상에 대한 수요는 매우 크므로 시장에서 빠르게 사라진다는데 있다. 그래서 세상에는 3가지만 남게 된다.



현실적으로 우리는 2가지를 놓고 고민한다. 주식, 펀드, 채권, 부동산, 은행 예금 등에 대한 투자를 고려할 때, 우리는 ①과 ② 중에 하나의 경향성을 선택하게 된다. 당신은 투자에서 어떤 성향에 가까운가?


① 리스크를 감수하고 높은 수익을 추구한다.

② 수익은 낮지만 리스크가 낮은 확실한 이익을 선택한다.


이러한 경향성이 반드시 투자 상품을 선정하는 데만 필요한 것은 아니다. 일상적인 삶 속에서도 개인은 무수히 많은 선택의 순간에 하나의 경향성을 따라 선택한다. 직업 선택에서도 마찬가지다. 직업을 선택할 때도 어떤 사람은 불안정하지만 수익이 큰 직업을 선택하려 하고, 다른 사람은 수익은 적지만 안정적인 직업을 선택하려 한다. 당신은 삶의 선택에서 그리고 직업의 선택에서 어떤 방향성을 기준으로 판단해왔는가? 우리가 앞서 나눴던 직업군을 수익률과 리스크의 관계에 따라 배열하면, 일반적으로 수익률과 리스크가 높은 ①에 해당하는 직업군은 투자가나 사업가가 될 것이다. 반대로 수익률과 리스크가 낮은 ②에 해당하는 직업군은 비임금노동자나 임금노동자가 될 것이다. 투자가나 사업가가 ①에 가까운 것은 자기 자본에 대한 직접적인 투자가 있고, 그만큼 더 큰 이익을 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투자한 기업이나 창업한 기업의 수익이 저하되고 문제가 발생할 시에는 투자한 자금의 손실이 생기고 그에 대한 법적, 도의적 책임이 따른다.



비임금 노동 잦나 임금노동자가 ②에 가까운 것은 자기 자본에 대한 직접적인 투자가 자본가에 비해 거의 없고, 그만큼 적은 이익을 취하기 때문이다. 노동자는 자본을 투자하는 대신 시간과 노력에 대한 기회비용만을 부담하는 까닭에, 기업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에도 자기 자본에 대한 손실이 없고 번적, 도의적 책임을 지지 않는다. ①과 ② 중에서 어떤 직업군이 더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리고 실제로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해왔는가? 어떤 직업군을 선택할 것인지에 대한 판단은 2가지 원인에서 기인한다. 개인의 성향 그리고 경제적 환경이 그것이다.


조지프 슘페터 Joseph Alois Schumpeter (1883~1950)

우선 개인의 성향에 따라 선택하는 직업군이 달라질 수 있다는 주장이 있다. 즉, 자본가의 성향을 가진 사람이 있고 노동자의 성향을 가진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19세기 말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활동한 경제학자 조지프 슘페터 Joseph Alois Schumpeter (1883~1950)는 기업가가 갖춰야 할 덕목으로 '기업가 정신'을 제시한다. 그것은 사업에서 발생할 수 있는 위험을 부담하고 환경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말하는데, 기업에게 요구되는 필수 덕목이라고 하겠다. 그가 제시하는 위험을 감수하는 기업가의 모습은 우리가 상식적으로 기대하는 투자가와 사업가의 모습에 정확하게 부합한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투자가와 사업가가 선천적으로 리스크를 감수하려는 성향이 강한 사람들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보통의 노종자는 반대로 안정석을 추구하는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믿는다. 이러한 생각은 맞을 있고 틀릴 수도 있다. 개인의 성향이 실제로 선천적 본성에 기인하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즉, 어떤 사람은 위험이나 불확실성을 감수하려는 의지가 기업가로서의 자본가의 선천적 특성이라고 믿는다. 반면 다름 사람들은 이에 반대한다. 이들에 따르면 충분한 자본력을 갖춘 자본가는 리스크를 감수할 심리적 여유를 확보할 수 있기 때문에 겉으로 노동자에 비해 리스크를 감수하는 경향이 강한 젓처럼 보인다느 것이다. 말하자면 자본가라는 지위는 혹은 노동자라는 환경이 개인의 리스크 감수 성향을 후천적으로 규정한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어떤 직업군을 선택할 것인가에 대한 판단은 그 사회의 경제적 환경에 따라 변화하기도 한다. 2가지 경제상황을 생각해볼 수 있다. 인플레이션 Inflation으로 시장이 확대되는 상황과 디플레이션 deflation으로 시장이 축소되는 상황. 먼저 통화가 팽창하고 수요가 확대되는 상황을 생각해보자. 이러한 환경에서는 기업의 이익이 감소할 가능성이 증가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따라서 사업가와 투자가가 가장 큰 이익을 얻는다.  합리적인 개인이라면 사업가나 투자가가 될 것이다. 반대로 통화가 축소하고 수요가 위축되는 상황을 생각해볼 수 있다. 이러한 환경에서는 기업의 이익이 감소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사업가나 투자가의 이익은 감소하고 불확실성은 극대화된다. 그렇다면 이때 합리적인 개인은 어떤 직업군을 선택하게 되는가? 이전까지는 합리적인의 의심스러웠던 임금노동자가 불확실한 사회 현광에서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 된다.


정리하면, 직업 선택에서 고려해야 하는 3가지 측면은 보람, 수익, 리스크가 그것이다. 우선 성취와 보람 면에서는 사업가와 투자가가 이를 향유할 수 있고, 노동자가 배제됨을 보았다. 노동자는 그 대신 임금으로 보상을 받는다. 하지만 보상으로서의 수익에서도 노동자는 소외된다. 사업가와 투자가는 노동자의 노동력을 이용할 수 있는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레버리지를 통해 수익률을 극대화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직업으로서 임금노동자를 선택하는 것은 가장 비합리적인 판단이었음이 드러난다. 그들은 성취감에서 배제되고 수익도 낮다. 하지만 이들의 선택을 단순히 어리석은 선택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성장하지 않은 사회에서는 기업의 불확실성이 증가하고 자본가의 손실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상대적으로 적지만 안정적인 수익을 보장받을 수 있는 임금노동자를 선택하는 것이 이익을 극대화하는 가장 합리적인 선택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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