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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찌옹수 Sep 22. 2019

언어는 무엇인가? [청년, 비트겐슈타인]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만 한다."

청년 비트겐슈타인 Ludwig Wittgenstein (1889~1951) 은 스승 러셀을 그의 연구실에서 만나 대화를 나눴다. 이 대화에서 청년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적인 문제와 윤리적인 문제가 결국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이것만큼 청년 비트겐슈타인의 정서를 잘 보여주는 사례는 없을 것이다. 그가 논리에 관심을 기울인 이유는 학문적 관심이 아니었던 셈이다. 논리학이 지향하는 명료함을 통해 청년 비트겐슈타인은 명료한 삶 혹은 윤리적 삶을 영위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가 지향했던 논리학은 다분히 주관적인 동기에서 유래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의 나이 33세 때, 그러니까 1921년에 독일어로 (그리고 1922년 영어로) 출간된 ≪논리철학논고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라는 책을 통해 그는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하려고 했다. 이런 구분의 도기는 지극히 윤리적인 것이었다. 그에게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은 윤리적이지 못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 작은 책 한 권으로도 청년 비트겐슈타인은 당시 살아 있는 전설이 되었다. 그렇지만 전설은 항상 공상과 오해 속에서 만들어지는 법이다.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을 구분했지만, 비트겐슈타인은 한 번도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부정했던 적이 없었다. 오히려 그에게 말할 수 없는 것은 다만 삶을 통해서 보여줄 수 있을 뿐인 것으로, 철학적으로 볼 때는 오히려 가장 중요한 부부이었다. 하지만 비트겐슈타인의 책을 읽은 사람들은 그가 말할 수 없는 것을 부정했다고 오해했다. 그들이 바로 논리실증주의 Logical Positivism를 표방하면서 전통 형이상학을 부정했던 빈 Wien 학파이다. 당시 비트겐슈타인의 생각은 이들과 전혀 달랐다. 그는 자신의 책을 출판할 담당자인 폰 피커 Ludwig von Ficker에게 편지를 보냈다.


"(서문에서) 저는 제 연구가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고 쓰고 싶었습니다. 한 부분은 그 책에 있는 내용이며, 다른 한 부분은 제가 쓰지 않는 모든 것에 관한 내용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두 번째가 중요한 부분입니다. 윤리적인 것은 사실상 제 책에 의해 내부로부터 한계가 정해지기 때문입니다."


사실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철학논고≫에서는 말할 수 있는 것만을 말했던 셈이다. 그의 말이 옳다면, 이 책에 등장하는 것을 제외하고 우리는 사실 어떤 것도 말해서는 안 될 것이다. 말해질 수 없는 것은 또한 타자에게 전달될 수 없는 것이며, 단지 보여줄 수 있는 윤리적인 고뇌와 관련된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럼 이제 청년 비트겐슈타인이 말할 수 있는 것이라고 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직접 살펴보도록 하자.


우리는 사실들의 그림들을 만들어낸다. …… 명제는 현실의 그림이다. 명제는 우리가 생각하는바 현실의 모델이다. …… 그림 속에서 그림의 요소들은 대상들에 대응한다. …… 그림은 그 요소들이 일정한 방식으로 서로 관계는 맺는 데서 이루어진다.
≪논리철학논고≫


비트겐슈타인은 명제, 즉 언어는 현실을 보여주는 그림과 같다고 생각했다. 이것을 지금은 보통 그림이론 picture theory이라고 부른다. 다시 말해 언어는 세계의 사실들과 그 관계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에게 언어라는 것은 결국 자신 혹은 타자 모두 지각이 가능한 방식으로 표현된 것이어야만 했다. "자동차가 백화점 건물로 들어가고 있다"는 말을 생각해보자. 여기서 자동차, 백화점, 들어감 등의 말은 정확히 세계의 어떤 구체적 사실들에 대응하는 것으로 보인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런 언어만이 유일하게 타자들에게 말해질 수 있는 것이라고 확신했던 것이다. 이 말을 들었을 때, 상대방은 시선을 자동차에 두면서  내가 보았던 것을 그대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비트겐슈타인은 외부 대상에 대해 그림처럼 묘사할 수 있는 언어만을 진정한 언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처럼 말할 수 있는 것들을 논증하다가 드디어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철학논고≫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사실 이 책의 대부분은 말할 수 있는 것만을 다루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야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이 정말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꺼내게 된 셈이다.


말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이것은 드러난다. 그것이 신비스러운 것이다. 말해질 수 있는 것, 그러므로 자연과학의 명제―그러므로 철학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어떤 것―들 이외에는 아무것도 말하지 말고, 다른 어떤 사람이 형이상학적인 어떤 것을 말하려고 할 때는 언제나, 그가 그의 명제들 속에 있는 어떤 기호들에도 아무런 의미도 부여하지 못했음을 입증해주는 것―이것이 본래 철학의 올바른 방법일 것이다. ……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논리철학논고≫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인간은 말할 수 있는 것을 말하기도 하고,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기도 한다. 이 대목에 이르기 전까지 그는 말할 수 있는 것들을 치밀하게 명제 형식으로 규정했다. 그에게 말할 수 있는 것들은 일종의 자연과학의 명제들이었다. 세계의 사실들과 그 관계들을 그림이나 모형처럼 묘사하는 언어만이 말할 수 있는 유일한 언어였기 때문이다. 이것을 제외한 모든 것은 결국 말할 수 없는 것들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말할 수 없는 것은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면 드러낼 수가 없다. 말할 수 있는 것이 '내부'라면 말할 수 없는 것은 그 '외부'이기 때문이다. 홍운탁월 烘云托月이라고나 할까? 서양의 유화처럼 노골적으로 달을 그리기보다는 오히려 구름을 그림으로써 달이 자연히 드러나도록 하는 동양화 기법처럼 말이다. 물론 비트겐슈타인에게 말할 수 없는 것은 윤리적인 문제, 종교적인 문제, 혹은 미적인 문제 같은 우리 내면과 관련된 것이었다. 이런 내면적인 문제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타자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그것에 대해 오해할 수도 있다.


비트겐슈타인이 ≪논리철학논고≫를 마무리하면서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라고 말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서 있다. 하지만 누군가 이 점에 대해 비트겐슈타인을 공격할 수 있을 것이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침묵해야 한다고 이야기하면서,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을 이야기한 셈이기 때문이다. 이런 비판을 의식했던지 ≪논리철학논고≫ 말미에서 그는 "사다리를 딛고 올라간 후에는 그 사다리를 던져버려야 한다"고도 이야기한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자신의 이야기에 함축되어 있는 진정한 의미를 이해한다면, 누구든지 "말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이것은 드러난다"와 같은 비트겐슈타인의 명제를 이제는 잊어야만 할 것이다. 그것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는 무의미한 명제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렇게 해서 당시 청년 비트겐슈타인은 이미 자신이 철학 작업을 완성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러고는 표연히 케임브리지 대학을 떠났다. 말할 수 있는 것만을 말하고 난 뒤 이제부터는 말할 수 없는 것을 보여주는 삶, 그가 그토록 원했던 명료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 홀연히 도시를 떠났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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