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찌옹수 Oct 17. 2019

마음은 언제 움직이는가? [메를로-퐁티]

"마음은 몸과 무관하게 움직일 수 없다."


후설하이데거를 매몰차게 공격했다. 하지만 상대를 공격하다 보면 결국 상대를 닮는다고 했던가? 어느 사이엔가 후설은 지향성 개념을 더 철학적으로 정당화해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오직 그럴 떼에만 제자들에게 더 이상 학문적 오해와 배신의 상처를 받지 않을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후설은 마음의 지향성 개념을 하이데거가 지적했던 것처럼 제한적으로 볼 수도 없었다. '후설 아키브'의 유고들에는 그런 후설의 고뇌와 노력이 담겨 있었다. 이 유고들의 특징은 호기 현상학의 정신, 즉 "마음의 능동적인 지향성"이라는 발상이 좀 약화되고, 오히려 "생활세계 lebenswelt"를 강조하는 경향이 대두하고 있다는 데 있다. 그래서 후설 초기의 현상학을 '선험적 현상학'이라고 부른다면, 유고에 나타난 후설의 후기의 현사학을 '생활세계의 현상학'이라고 부르고 있다. 예를 들어 어느 아름다운 여인을 지향하고 있다고 할 때, 내 마음은 자신의 신체를 통해 영위해온 기존 생활세계의 역사에 일정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역사마다 혹은 사회마다 아름다운 여인에 대한 실제 규정이 달랐던 것도 이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생활세계의 현상학'이라고 불리는 후설 말년의 연구는 인간의 능동적 지향성에는 구체적인 생활세계의 흔적들이 개입되어 있다는 점을 해명하는데 추점을 맞추고 있다. 다시 말해 인간 마음의 능동적 지향성 이면에는 수동적 수용성이 내재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강연과 출판 금지 때문에 말년의 후설 연구 결과물들은 유고 형식으로 '후설 아키브'에 보관되어 있었다. 바로 이곳을 들른 젊은 프랑스 철학자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메를로-퐁티였다. '후설 아키브' 가운데 메를로-퐁티는 아직 공개되지 않은 후설의 유고들, '생활세계'를 고민하고 있던 후설의 말기 저작들을 숙고하면서 자신만의 독특한 철학적 통찰을 길러나갔던 것이다. 결국 그는 '생활세계', 즉 삶의 핵심에는 신체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결론 내리게 된다. 인간의 의식적인 지향 경험 이면에 신체의 활동이 존재한다는 메를로-퐁티의 통찰, 혹은 신체의 현상학은 바로 이런 과정을 통해 탄생했던 것이다.


심장이 유기체 안에 있는 것처럼 고유한 신체는 세계 안에 있다. 그것은 시각적 광경을 살아 있게 계속 유지하고 생명을 불어넣으며, 내적으로 풍부하게 하고 그것과 더불어 하나의 체계를 형성한다. 내가 나의 아파트를 걸어 다닐 때, 그 아파트가 나에게 자기 모습을 드러내게 되는 여러 가지 국면들이 제각각 여기서 또는 저기서 보인 아파트를 표상한다는 것을 내가 모른다면, 나 자신의 운동을 내가 의식하지 않고 나의 신체를 그 운동의 단계들을 통해서 동일한 것으로 내가 의식하지 않는다면, 그 국면들은 동일한 사물의 다양한 측면들로 나에게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분명히 나는 그 아파트를 생각으로 훑어볼 수도 있고 상상할 수도 있으며 또는 종이 위에 그릴 수도 있다. 그러나 그때라고 해도 나는 신체적 경험의 매개가 없으면 대상의 통일성을 파악할 수 없다.
≪지각의 현상학 Phénoménologie de la perception≫


우리는 어떤 아파트를 의식적으로 지향할 수 있다. 이때 나는 아파트를 단순한 평면이 아니라 입체적인 것으로 지각한다. 심지어 "나는 그 아파트를 생각으로 훑어볼 수도 있고 상상할 수도 있으며 또는 종이 위에 그릴 수도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모든 의식적 지향이 가능한 이유는 신체적 경험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메를로-퐁티가 주목했던 것은 바로 이 점이다. 나의 신체는 동쪽에 서있다. 그러니 서쪽 방향으로 나는 아파트를 본다. 나의 신체는 서쪽에 서 있다. 그러니 동쪽 방향으로 나는 아파트를 본다. 나의 신체는 남쪽에 서 있다. 그러니 나는 북쪽 방향으로 아파트를 본다. 나의 신체는 북쪽에 서 있다. 그러니 나는 남쪽 방향으로 아파트를 본다. 심지어 나의 신체는 아파트 바로 밑에 서 있을 수도 있다. 그러니 나는 아파트를 올려다볼 수 있다. 이런 다양한 신체적 경험이 거듭 쌓였을 때에만, 우리의 의식은 하나의 아파트를 통일된 입체로서 지향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아파트 남쪽에서 그 아파트를 지향하고 있을지라도, 우리가 그것을 하나의 입체로서 경험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다양한 신체 경험들이 종합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의식적으로 지각하고 있는 것은 순수하게 우리 마음에 들어오는 것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우리의 신체 경험을 전제하고 있는 것, 어쩌면 신체 경험을 추상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메를로-퐁티가 "지각된 광경은 순수 존재를 갖지 않는다"라고 말했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지각된 광경은 순수 존재를 갖지 않는다. 내가 보는 그대로 정확하게 지각되는 광경은 개인적인 나의 역사의 한 계기이다. 또한 감각은 재구성이기 때문에 나에게 사전에 구성된 것들의 침전을 전제하고, 감각하는 주체로서 나는 자연적인 능력들로 가득 차 있다. 이는 정말 놀라운 일이다. 따라서 나는 헤겔의 말처럼 '존재 속의 구멍'이 아니라, 만들어졌지만 파괴될 수도 있는 함몰이자 주름이다.
≪지각의 현상학≫


지금 카페 안에 들어오고 있다고 지각되는 친구는 순수 존재를 갖는 것이 아니다. 메롤로-퐁티의 말대로 나의 의식적인 지각에는 "육체가 가진 자연적 능력"이나 "개인적인 나의 역사"가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눈이 없다면 혹은 시력이 급속하게 약화되었다면, 우리는 친구를 지각할 수 없거나 다르게 지각하게 될 것이다. 나아가 친구와 어울렸던 역사가 전제되어 있지 않다면, 나는 카페 안에서 그를 기다릴 이유도 없으며 심지어 들어오는 사람이 친구라는 사실조차 분명히 알 수 없을 것이다. 이처럼 표면적으로 볼 때는 매우 투명한 것처럼 보이는 우리의 지각에도 불투명한 것들, 즉 육체와 역사가 개입되어 있다는 것 바로 그의 핵심적인 통찰이다.


'존재의 구멍'이란 개념은 헤겔이 ≪미학강의 Vorlesungen über die Ästhetik≫에서 사용했던 것이다. 이 책에서 그는 청년들이 낭만적인 열정과 활동이 "현존하는 질서에 구멍을 내고 세계를 변혁하고 개혁하려는" 경향을 갖는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이 당시 헤겔에게서 '존재의 구멍'이란 바로 새로운 것을 도래시킬 수 있는 인간의 순수한 자유를 의미했던 것이다. 하지만 메를로-퐁티에게 인간은 순수할 수 없는 존재였다. 인간은 신체가 가진 자연적 능력과 개인적인 역사로 얼룩져 있기 때문이다. 그가 인간을 "함몰이나 주름"이라고 비유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인간에게 내재하는 함몰이나 주름이 "만들어졌지만 파괴될 수도 있다"는 그의 생각이다. 결국 인간에게 자유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절대적이고 순수한 자유라기보다 기존의 함몰이나 주름 위에 새로운 함몰이나 주름을 만들 수 있는 가능성으로서의 자유라고 할 수 있겠다.


여기서 한 가지 아쉬움이 생긴다. 그것은 우리가 새롭게 만들 함몰이나 주름이 과연 앞으로의 우리 삶에 긍정적인 기억으로 작동할 것인지 여부와 관련된 안타까움이다. 정리 해고되어 노숙자로 전락한 사람은 비참한 생활에 맞게 자신의 주름을 만들고, 어린 문학도는 군대에 들어가 가혹한 명령체계에 부합되는 주름을 만들 수 있다. 반대로 소심했던 어느 남자가 사랑하는 애인을 만나 이전과는 달리 자신을 긍정하는 주름을 만들고, 수영을 못하던 사람이 선원생활을 하면서 바다에 어울리는 주름을 만들 수도 있다. 그렇지만 전자의 주름은 우리를 안타깝게 하고, 후자의 주름은 우리의 얼굴에 미소를 머금게 하지 않는가? 이 점에서 우리에게는 인간에게 만들어진 함몰이나 주름에 대한 가치를 명확히 평가할 수 있는 기준, 나아가 그를 토대로 새로운 함몰이나 주름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 아쉽게도 메를로-퐁티는 더 진전된 논의를 우리에게 보여주지 않는다.


어쩌면 이것은 그에게는 너무 가혹한 요구인지도 모를 일이다. 후설이 창시한 현상학의 정신을 계승했던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사태, 혹은 그만의 원초적 체험을 해명하고 분석하는 데 집중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불운한 주름을 해체하고 소망스러운 주름을 만들어야 한다는 우리의 요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진지하게 성찰된다는 점이다. 푸코들뢰즈가 바로 그들이다. 먼저 그들은 주름에 대한 가치 평가를 시도한다. 물론 가치 평가의 기준니체스피노자가 제안했던 것처럼 우리의 '힘에의 의지'가 증가했는가, 혹은 기쁨을 통해 코나투스가 증가했는가의 여부였다. 푸코나 들뢰즈가 니체나 스피노자를 다시 읽어내려 했던 진정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메를로-퐁티가 발견한 "만들어졌지만 파괴될 수도 있는 함몰이자 주름"은 이제 실천철학적 전망 속에서 새롭게 각광을 받게 된 셈이다.

작가의 이전글 마음은 언제 움직이는가? [하이데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