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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찌옹수 Oct 14. 2019

마음은 언제 움직이는가? [하이데거]

"마음은 낯선 상황에서만 깨어나 작동한다."

후설 Edmund Husserl (1859~1938)의 제자이자 한때 그의 조교로도 활동했던 하이데거 Martin Heidegger (1889~1976)가 자신의 스승과 그의 유교에 대해 이토록 무관심했던 이유부터 잠시 살펴보도록 하자. 그것은 1926년의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하이데거는 스승의 생일선물로 자신의 연구물을 헌정했다. 하지만 이 선물을 받은 후설은 하이데거의 연구물이 '불충분하다'는 이뉴로 이 원고를 반송해버렸다. 더구나 그 사건 이후 스승 후설은 하이데거의 연구가 현상학의 근본정신을 어기고 있다고 공공연히 제자의 관점을 비판하기도 했다. 그런데 1926년 생일선물로 후설에게 보낸 하이데거의 연구물은 바로 그의 주저 ≪존재와 정신 Sein und Zeit≫의 앞부분을 장식하게 된 내용들이다. 자신의 주저를 '불충분하다'라고 비판했을 뿐만 아니라, 그 후로도 계속 자신의 사유를 비판했던 스승을 비판했던 스승을 고집 센 제자 하이데거는 천천히 자신의 마음속에서 지워나갔던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을 계기로 하이데거는 후설을 더 이상 자신의 학문적 스승으로 삼기보다 오히려 그를 인간적으로 원망하기도 하고 나아가 철학적으로도 거리를 두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후설은 하이데거의 사유를 왜 그토록 비판했던 것일까? 그것은 하이데거가 후설의 지향성 개념을 근본적으로 동요시켰기 때문이었다.


물론 하이데거가 스승 후설의 지향성 개념을 철저하게 부정했던 것만은 아니다. 단지 그는 마음이 무엇인가를 지향하기에 앞서 인간이 '세계-내-존재 in-der-Welt-sin'로서 존재한다는 사실을 더 강조하고자 했다. 이것은 무엇인가를 의식하기 이전에, 다시 말해 우리 의식이 무엇인가를 지향하기 이전에, 인간은 이미 혹은 벌써 세계와 관계를 맺고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이 점을 염두에 두면 ≪존재와 시간≫의 다음 구절이 얼마나 후설을 자극했을지 어렵지 않게 짐작해볼 수 있다.


(우리는) 가까이 손안에 있는 존재자를 '배려함'에서 사용 불가능한 것으로, (다시 말해) 특정한 용도로 사용하기에는 부적절한 것으로 만나게 될 수 있다. 이 경우 작업 도구는 파손된 것으로 판명되고 재료는 부적합한 것으로 드러난다. 도구는 여기에서도 어쨌거나 손안에 있는 것이기는 하다. …… 이런 사용 불가능성의 발견에서 도구는 마침내 우리 '눈에 띄게'되는 것이다.
≪존재와 시간≫


하이데거에 따르면 세계-내-존재로서 인간은 이미 사물들과 '배려함'을 통해서 관계하고 있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아침에 회사나 학교에 들어 우리는 별다른 생각 없이 컴퓨터를 부팅한다. 그리고 아무런 문제 없이 컴퓨터가 켜진다. 이런 컴퓨터와 나 사이의 친숙한 관계가 바로 하이데거가 말한 '배려함'의 관계 혹은 '손안에 있는' 관계이다. 이런 경우 우리는 컴퓨터를 의식적으로 지향하지 않는다. 바로 이것이 하이데거가 강조하고 싶었던 점이다. 이미 너무 친숙한 세계 속에서 사물들과 살고 있다면, 우리는 그 사물들을 의식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우리 마음에 지향성이 전혀 없다는 얘기는 아니다. 단지 하이데거는 지향성이 특수한 경우에만 발생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싶었을 뿐이다. 가령 오늘 어제와 마찬가지로 컴퓨터를 부팅했지만 컴퓨터가 켜지지 않았다고 해보자. 바로 이런 사태를 하이데거는 "가까이 손안에 있는 존재자를 '배려함'에서 '사용 불가능한 것'으로 만나게 된다"라고 해석하고 있다. 바로 친숙하게 사용하던 사물이나 도구가 사용 불가능하게 되었을 때, 그것은 "마침내 우리 '눈에 띄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에야 비로소 마음의 지향성이 작동하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하이데거의 근본적 통찰은 마음의 지향성이 어느 경우에나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제한된 경우에만 발생한다는 데 있었다. 익숙하게 사용하던 도구들이 망가질 때처럼 사물들과의 친국한 관계가 와해되었을 때에만, 다시 말해 친숙한 사물들이 낯선 사물이 되었을 때에만 우리는 그 사물들을 의식적으로 지향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역으로 사물들과 친숙한 관계에 있는 인간, 즉 '세계-내-존재'로서 인간은 사물들을 지향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하이데거의 견해는 다음과 같이 간단히 정리할 수 있겠다. '세계-내-존재'로서 인간은 평상시 사물들을 지향하지 않고 배려할 뿐이다. 인간이 무엇인가를 지향할 때에는 사물들에 대한 배려가 불가능하게 되었을 때뿐이다.


이로써 하이데거는 마음의 지향성을 넘어서 있는 다른 지평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의 스승 후설은 모든 것이 인간의 지향성을 통해서만 의미를 갖는다는 입장을 고수했던 사람이다. 그런 그에게 하이데거가 주장했던 '세계-내-존재'라는 개념은 지향성과는 무관한 형이상학적 전제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후설을 자신의 생일선물로 받은 ≪존재와 시간≫ 초고를 꼼꼼하게 읽은 뒤 '불충분하다'라고 반송할 수밖에 없었다. 후설이 시작했던 현상학의 기본 정신은, 기존 철학이 마음의 지향성과 무관한 본질 혹은 실체 등을 설정했던 것에 반대하려는 데 있었다. 그런데 지금 자신의 제자 가운데 한 명이 '세계-내-존재'라는 개념으로 현상학의 근본정신을 훼손하고 있다고 판단하게 된던 것이다. 후설이 학문적 입장에서 볼 때 얼마나 큰 배신감을 느꼈을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스승의 비판에도 독자적인 길을 갔던 하이데거는 마침내 현상학과는 다른 자신만의 존재론을 구축하게 된다. 이미 죽은 스승을 관에서 깨울 정도로 파격적인 그의 존재론을 경청해보자.


존재 Sein는 '탈은폐하는 건너옴 die entbergende Überkommnis'으로서 스스로를 내보인다. 존재자로서 존재자 Seiende 체는 '비은폐성 속으로 (다가와 그 안에서) 스스로를 간직하는 도래의 방식 die in die Unverborgenheit sich bergende Ankunft'으로 나타난다.
≪동일성과 차이 Identität und Differenz≫


하이데거의 존재론은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로 보일 것이다. 이럴 때는 가장 근접한 예로 설명하는 것이 좋다. 플라톤이 '제작자의 이미지'로, 혹은 루크레티우스가 '비의 이미지'로 사유했던 것처럼 하이데거는 '숲길의 이미지'로 사유한다. 심지어 그는 1950년에 ≪숲길 Holzwege≫이란 책을 출간했을 정도였다. 터널처럼 양쪽에 빽빽한 산림이 우거져 있는 좁고 어두운 오솔길을 홀로 걸어가고 있다. 한참 가다가 숨이 확 뚫리는 것처럼 넓은 공터가 마치 숲 속의 섬처럼 나타났다. 그 공터를 지나면 다시 빽빽한 산림들에 둘러싸인 좁고 어두운 오솔길로 들어가야 한다. 이 공터에 아름다운 히아신스 한 송이가 피어 있다. 자, 이런 장면으로 하이데거의 존재론을 설명해보도록 하자. 여기서 우리는 직접 오솔길을 어거가고 있는 중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언제 끝날지도 예측하기 힘든 좁고 어두운 오솔길을 가다가 갑자기 환한 공터가 등장한다. 이것이 바로 존재다. '탈은폐하여 건너옴'이다. 아니 나의 마음에는 일체의 가림이 없이 공터가 내게 건너온다고 느껴진다. 이런 환한 공터에 수줍게 피어 있는 히아신스 꽃이 바로 존재자다. 그러나 환한 공터가 없었다면 히아신스는 나게 알려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비은폐성 속에서 스스로 간직하는 도래'의 방식이란 바로 그것이다. 공터가 확 트여 있는 것, 이것이 바로 비은폐성이다. 이렇게 환한 공터가 내게 드러나야 그 속에 피어나는 히아신스도 내게 드러난다. 결국 환한 공터가 없었다면 히아신스는 나와 무관한 꽃으로 있었을 것이다. '존재'가 없었다면 '존재자'는 존재자로서 내게 지향되지 않는다. 그러니 착각해서는 안 된다. '히아신스가 존재한다'라고 말할 때의 '존재', 혹은 '히아신스의 존재'라고 말할 때의 '존재'는 존재의 근본적인 뜻이 아니다.


히아신스가 있어서 존재라는 말을 쓸 수는 있으나, 하이데거는 이것은 제대로 존재를 숙고하지 못한 판단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바로 히아신스를 우리에게 보여주었던 공터, 바로 그 '탈은폐하여 건너옴'이 진정한 의미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공터-히아신스-히아신스의 존재'라는 순서로 '존재-존재자-존재자의 존재'라는 존재론적 위상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공터가 없으면 히아신스는 내 마음에 들어오지 않고, 당연히 히아신스가 존재한다는 판단도 불가능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존재'가 없으면 '존재자'는 내 마음에 들어오지 않고, '존재자가 존재한다'는 판단도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존재자를 가능하게 했던 존재의 의미와 '존재자가 존재한다'는 판단에서의 존재의 의미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히아신스가 존재한다'라고 판단하는 순간 우리가 공터를 쉽게 망각하는 것처럼, '존재가가 존재한다'라고 판단하는 순간 우리는 존재를 망각하게 된다.


이런 존재 사유를 접했다면 후설은 배신감을 넘어 당혹감마저 들었을 것이다. 마음의 지향성을 떠나서 일체의 것을 다루지 않으려는 형상학적 태도를 무시하고 강한 존재론, 혹은 존재의 형이상학을 하이데거가 피력하고 있으니 말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하이데거가 지향성을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가 존재자에 대한 지향성뿐만 아니라 존재에 대한 지향성도 긍정한다는 데서 생긴다. 어떻게 존재, 즉 있음 자체를 지향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것은 단지 순수한 사유로만 생각이 가능한 것 아닌가? 아마도 후설은 존재는 자신이 말한 지향성의 대상이 아니라 사유의 대상일 뿐이라고 이야기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저 앞에 사과나무가 존재한다고 하자. 일단은 사과나무를 마음이 지향한 뒤, 우리는 마음의 지향 대상이었던 사과나무가 '존재'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후설의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확신했다. 오솔길이 끝나는 순간, 순간적으로나마 공터가 내 마음에 들어오는 것처럼, 존재자를 있게 하는 존재도 우리 마음은 순간적으로나마 지향하고 있다고 말이다.


하이신스 꽃 Hyacin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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