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의 마음이 동양의 심心과 만날 때까지
마음이 없다면 눈이 있어도 볼 수가 없다.
心不在焉 視而不見
이 구절은 ≪대학大學≫에서 등장한다. 과거 우리 조상들도 "마음이 콩밭에 가 있다"라고 이야기하곤 했다. 이 2가지는 모두 같은 맥락의 말이다. 내 앞에 아름다운 꽃이 피어 있음에도 만약 나의 마음이 어제 일어났던 사건을 기억하려고 한다면, 그 꽃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처럼 동양에서는 기본적으로 마음이란 것이 마치 물처럼 움직이는 유동적인 것으로 사유되었다. 동쪽으로 흘러가면 서쪽으로 흘러갈 수 없는 물의 경우처럼, 사람의 마음도 어딘가로 흘러가면 다른 곳으로는 흐를 수 없다고 본 것이다. "그것에는 마음이 가지 않는다"라는 우리의 일상적 표현도 마음에 대한 동양의 사유 전통을 무의식적으로 반복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서양의 경우 마음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을까? 철학적 사유 경향들의 저수지라고 비유할 만한 칸트 Immanuel Kant (1724~1804)의 철학에서는 마음이란 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을까?
우리의 의식은 마음의 두 기본 원천에서 발생한다. 하나의 원천은 표상을 받아들이는 능력(인산의 수용성)이다. 또 하나는 원천은 이런 표상을 통해서 대상을 인식하는 능력(개념의 자발성)이다. 전자에 의해서 대상이 우리에게 주어지고, 후자에 의해서 (마음의 규정으로서의) 대상의 표상에 관계해서 생각하게 된다. 그러므로 직관과 개념은 우리의 모든 인식의 지반이다.
≪순수이성비판≫
내 앞에 예쁜 꽃이 피었다는 것을 인식하려면, 꽃의 인상이 우선 감성의 직관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져야 한다. 이렇게 주어진 인상을 우리는 개념을 통해 판단하게 된다. '내 앞에 예쁜 꽃이 있다'라고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점은 칸트가 생각하고 있는 인식의 순서이다. 만약 감각 인상을 수용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생각할 수조차 없다는 것이 바로 칸트의 입장이었다. 감각이 먼저이고 마음은 나중이라는 주장인 셈이다. 하지만 칸트의 생각은 마음이 예쁜 꽃으로 간 경험을 사후적으로 재구성했기 때문에 생긴 일종의 착시효과가 아닐까? 마음이 가지 않았다면, 우리는 어떤 것을 감각할 수조차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 만약 어제 만났던 사람과 있었던 불쾌한 경험을 생각하고 있다면, 칸트는 자신이 걸어가던 산책로에 예쁜 꽃들이 피어있었다는 사실조차 의식하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눈으로는 분명 꽃과 산책로의 흙길을 보았을 테지만, 다시 말해 우리에게 일말의 감각 인상이라도 수용되었을 테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그것의 존재조차 의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감각 인상이 수용된 이후 이에 관한 표상을 통해 대상을 개념적으로 인식하게 된다고 본 칸트의 관점은 재고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감각이 먼저이고 마음이 다음이라는 주장은 이론적인 주장일 뿐, 실제로는 마음이 먼저이고 감각은 다음이니까 말이다. 아마 동양의 철학자들이라면 칸트를 이렇게 비판했을 것이다. 선불교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혜능의 에피소드는 칸트와 같은 입장에 대해 다음과 같은 비유로 비판하지 않았을까?
바람 때문에 사찰의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이를 두고 두 승려가 논쟁을 벌였다. 한 승려는 깃발이 펄럭인다고 하고, 다른 승려는 바람이 펄럭인다고 했다. 둘의 논쟁이 해결되지 않고 반복되자 육조 혜능이 이렇게 말했다. "바람이 펄럭이는 것도, 깃발이 흔들이는 것도 아니다. 너희의 마음이 펄럭이고 있을 뿐이다." 두 승려는 이 말에 깜짝 놀랐다.
≪무문관 無門關≫
이것은 중국 남송시대 무문無門(1183~1260)이란 스님이 편찬했던 ≪무문관≫ 에 등장하는 유명한 에피소드이다. 남종선南宗禪의 창시자 혜능慧能 (638~713)이 불교계에 화려하게 등장한 일화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사찰에 펄럭이는 깃발을 보고 두 스님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한 스님이 깃발이 움직이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면, 다른 한 스님은 바람이 움직이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자 혜능은 다음과 같은 한마디 말로 두 스님의 논쟁을 무력시키고 만다. 움직이는 것은 바람도 아니고 깃발도 아니니, 다만 스님들 마음이 움직이고 있을 뿐이라고 말이다. 이것은 도대체 무슨 말일까? 지금 혜능은 마음이 움직이는 원초적 상황, 너무도 쉽게 망각될 수 있는 마음의 모습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마음이 펄럭이는 깃발에 가 있지 않았다면, 깃발과 바람을 두고 벌어졌던 두 스님의 논쟁조차 애초에 불가능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두 스님이 불경을 읽고 토론하고 있었다면, 다시 말해 마음이 불경과 토론에 가 있었다면, 그들에게는 바람에 나부끼는 깃발이란 없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나 관점은 과연 불교에만 통용되던 생각일까?
주희의 성리학性理學과 쌍벽을 이루던 양명학陽明學의 창시자 왕수인王守仁 (1472~1528)의 다음 이야기도 이와 유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어떤 제자가 바위틈에 자라고 있는 꽃을 가리키며 물었다. "세상에는 마음 바깥에 사물이 없습니다. 그런데 가령 이 꽃은 깊은 산속에서 저절로 피어나 저절로 지곤 하니 그것이 내 마음과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그러자 선생이 말했다. "그대가 이 꽃을 보기 전에 이 꽃은 그대의 마음과 함께 고요한 상태에 있었지만, 그대가 와서 이 꽃을 보는 순간 이 꽃의 모습은 일시에 분명해진 것이네. 이로부터 이 꽃이 그대의 마음 바깥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네."
≪전습록傳習錄≫
왕수인은 평상시 "마음 바깥에 사물은 없다 心外無物"라고 가르쳤던 철학자였다. 이 가르침을 기억하고 있던 제자가 스승의 가르침에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다. 자신이 보지 않아도 깊은 산중의 꽃은 저절로 피고 저절로 지고 있다고 반문하면서 말이다. 이것은 마음 바깥에도 우리와 무관한 사물들이 존재하고 있다고 보는 주장일 것이다. 이에 왕수인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다음과 같이 자신의 관점을 해명해주었다. 바로 지금 이 순간 자신과 함께 꽃을 보았기 때문에, 즉 마음이 이 순간 꽃으로 갔기 때문에 제자가 "꽃은 나와 무관하게 바위틈에서 자라고 진다"라는 생각을 비로소 전재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지금 제자는 마음이 지향하고 있는 꽃이란 대상에서 임의적으로 마음만을 제거해 마치 꽃이 저절로 피고 진다고 주장하게 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만약 지금 꽃을 보지 않았다면, 꽃에 대한 사변도 불가능했으리라는 말이다. 무릎을 칠 만한 탁월한 답변이 아니었을까? 칸트의 입장에서 보면 혜능이나 왕수인의 생각이 매우 난해한 것으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칸트 이후 얼마 되지 않아 서양의 사유 전통에서도 혜능과 왕수인의 마음을 이해하는 인물이 등장하게 되었다.
우리는 이 지향성 Intentionalität, Intentionality들을 제시하면서 이것들에 관해 반복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즉 이 지향성들이 없이는 객관들과 세계는 우리에 대해 현존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객관들은 의미와 존재양상을 지닌 채로만 우리에 대해 존재하며, 이러한 의미와 존재양상에 있어서 객관들은 항상 주관적 작업으로부터 발생하고 있거나 발생해 있는 것이다.
≪유럽학문의 위기와 선험적 현상학 Die Krisis der europäischen Wissenschaften und die transzendentale≫
방금 읽은 구절은 현대 철학자 후설 Edmund Husserl (1859~1938)의 이야기이다. 흔히 후설의 철학을 현상학 phenomenology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물론 인간의 마음과 무관한 대상의 실체에 대해서는 더 이상 탐구하지 않겠다는, 다시 말해 마음에 주어진 현상만을 다루겠다는 그의 철학적 결단 때문에 붙여진 이름일 것이다. 후설에게 우리의 마음은 기본적으로 지향성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 우리의 마음은 무엇인가를 구체적으로 지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지향성들이 없이는 객관들과 세계는 우리에 대해 현존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한 것은 지향성에 대한 후설의 논의가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수많은 도전에 직면하게 된다는 점이다. 그것도 후설의 형상학에 반대했던 다른 외부 사람들이 아니라 그에게서 강한 학문적 영향을 받은 그의 제자들이 먼저 그를 비판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를 비판했던 가장 대표적인 제자가 바로 하이데거 Martin Heidegger (1889~1976)였다. 1933년 나치가 정권을 잡자 유대인이었던 후설은 강연과 출판 등 일체의 공적인 활동을 할 수 없게 되었다. 1933년은 공교롭게도 과거 그의 조교로도 활동했던 하이데거가 나치 정권하에서 프라이부르크 대학 총장으로 부임하던 해이기도 했다. 이 대목에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하이데거가 나치 정권하에서 위기에 빠졌던 철학자 후설을 그대로 방치해두었다는 점이다. 어떤 이유에서든 제자로서는 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1938년 후설은 세상 사람들의 무관심, 아니 정확히 말해 유대인 멸시의 분위기 속에서 쓸쓸히 숨을 거두게 된다. 가장 큰 문제는 그가 집필했던 방대한 연구 초고들, 사절지 4만 5,000매에 달하는 방대한 원고들의 보관 문제였다.
다행스럽게도 1938년 8월, 벨기에 루벨 대학 박사과정 학생인 반 브레다 H. L. van Breda가 논문 작성에 필요한 자료를 얻기 위해 후설의 미망인을 찾아왔다. 이 당시 브레다는 후설의 방대한 연구 자료들이 위기에 빠질 것이라고 직감했다. 이미 같은 해 5월 나치 정권은 유대인 학자들의 저서에 대한 분서焚書를 단행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브레다의 노력으로 4만 5,000매에 달하는 후설의 초고들은 비밀리에 루벵 대학으로 옮겨졌고,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후설 아키브 Husserl-Archiv'의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메를로-퐁티 Maurice Merleau-Ponty (1908~1961)나 레비나스 Emmanuel Levinas (1906~1995)가 이곳 후설 아키브에 있던 출판도 되지 않았던 성숙기의 후설 사상을 보지 않았다면, 메를로-퐁티의 신체의 현상학이나 레비나스의 타자의 현상학은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모습과는 사물 달랐을 것이다. 그렇다면 후설의 위기를 이토록 방관하기만 했고 또한 철학적으로도 자신의 스승과 입장을 달리했던 하이데거는 인간의 마음을 어떻게 이해했던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