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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찌옹수 Oct 08. 2019

소통은 가능한가? <고찰>

관계는 외재적인가, 아니면 내재적인가?

데카르트 René Descartes (1596~1650)

데카르트 René Descartes (1596~1650)는 고독한 사유주체, 즉 '코기토'를 발견했다. 이것은 결국 인간인 유한하다는 사실에 대한 발견과 동일한 것이기도 했다. 사실 유한성의 발견은 항상 어떤 외부성의 발견과 동시적으로 진행된다는 점에 주목한 필요가 있다. 한계가 있다는 말은 바깥이 있다는 말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이 문제로부터 근대철학의 속앓이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어떻게 하면 유한자로서 인간은 외부와 관련을 맺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우리는 타자와 적절한 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 데카르트 이후 지금까지 지속되어온 서양철학의 속앓이는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타자와의 소통의 문제는 돌아보면 근대철학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중세철학에도 유효했다고 할 수 있다. 바로 유한자와 무한자 사이의 소통 문제다. 중세 시절 무한자가 신이었다면, 근대 이후에는 타자로 바뀐 것뿐이다.


스피노자 Baruch Spinoza (1632~1677)

스피노자 Baruch Spinoza (1632~1677)가 탁월한 이유는 그가 좁게는 데카르트의 고뇌를, 크게는 중세철학의 고뇌를 한 방에 돌파하려고 했다는 데 있다. 세속적 타자와 절대적 타자! 스피노자는 인간에게 가능한 이 2 가지 타자와의 소통 가능성을 모색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여전히 그의 관심사는 세속적 타자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에피쿠로스'쾌락'의 원리를 제안했던 것처럼, 스피노자는 기쁨의 원리를 제안한다. 타자와 마주쳤을 때 '기쁨'을 느낀다면, 우리는 그 타자와의 관계를 지속해야만 한다. 반대로 타자와 마주쳤을 때 기쁨을 느끼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타자와의 관계를 지속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스피노자 특유의 기쁨의 윤리학이 시작되고 있다.


라이프니츠 Gottfried Wilhelm Leibniz (1646~1716)

스피노자와 함께 대륙 합리론을 양분했던 라이프니츠 Gottfried Wilhelm Leibniz (1646~1716)도 절대적 타자와 세속적 타자를 동시에 문제 삼고 있다. 그렇지만 타자와의 소통 가능성을 사유할 때 라이프니츠는 세속적 타자와 현실적 관계가 아니라 절대적 타자의 은총을 더 중시한다. 스피노자는 세속적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 절대적 타자와의 관계를 모색했다. 반면 라이프니츠는 타자와의 관계나 무관계는 모두 사전에 신에 의해 예정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신은 모든 개체들에게 자신을 제외한 전체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잠재성을 부여했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우리가 누군가와 처음 만나 관계를 지속한다고 해도, 라이프니츠는 이것이 우리의 자유에 의해 가능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단지 구체적인 삶에서 신이 부여한 관계의 한 가지 잠재성이 지금 실현되고 있을 뿐이라고 본 것이다. 우리가 라이프니츠를 읽을 때 스토아학파가 생각나는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스토아학파에게서도 우주의 현실적인 모습은 모두 감춰진 실패가 차례대로 풀리는 것처럼 진행된 결과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스피노자가 '관계의 외재성 externality'이라는 테마를 따르고 있다면, 라이프니츠는 '관계의 내재성 internality'이란 테마를 취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우리는 타자와 마주쳤을 때 기쁠지 혹은 그렇지 않을지를 사전에 미리 결정할 수 없다. 반면 라이프니츠에게 기쁨의 관계나 슬픔의 관계는 모두 내재화된 관계가 실현되어 드러난 것에 불과한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도 타자의 문제를 고려할 수 있을 것 같다. 타자란 정확히 말해 관계의 외재성에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결국 관계의 외재성이란 테마를 따른다면,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입장은 한마디로 웃기는 발상일 뿐이다. '역지사지'는 관계의 내재성이 전제되어야만 가능할 테니 말이다.


관계의 내재성과 외재성 사이의 간극을 보여주는 더 명료한 예로 생수를 생각해보자. 생수병에는 1,000원이란 가격표가 붙어 있다. 정상적인 경우라면 이 생수는 1,000원에 사고 팔릴 것이다. 관계의 내재성이 적용되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사막과도 같은 극한적 조건에서라면 1,000원이란 내재된 가치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수분 부족으로 죽어가는 사람에게 이 생수병은 1억 원이란 가치가 창출될 테니 말이다. 바로 이것이 관계의 외재성이다. 계보학, 혹은 발생론적 입장에서 사실관계의 외재성은 관계의 내재성에 선행한다고 할 수 있다. 1,000원의 가치가 내재되어 있다고 생각되는 생수나 1억 원의 가치가 내재되어 있다고 생각되는 생수나 모두 생수를 필요로 하는 타자의 상황에 의존한다. 극단적으로 너무나 맑은 샘물이 곁에 있다면 생수는 아무런 가치도 없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결국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관계의 외재성이 타자에 의해 결정되면 관계는 내재해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이다. 혹은 타자가 도입되는 순간, 그래서 관계의 외재성이 분명 해지는 순간, 관계의 내재성을 일종의 맹목적 신화라는 사실이 폭로된다고 말할 수도 있다. 철학에서 다루는 본질이나 의미 등의 개념은 모두 관계의 내재성을 전제하고 있다. 결국 이런 내재적 본질이나 본성, 혹은 절대적 의미 등을 해체하려면, 우리는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관계의 외재성, 혹은 타자라는 계기를 담론에 도입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철학사적으로 니체의 '계보학'이나 데리다의 '해체'는 관계의 외재성이란 테마를 담론에 도입한 시도였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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