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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찌옹수 Oct 07. 2019

소통은 가능한가? [라이프니츠]

"예정되어 있는 소통에 조바심치지 말라."

데카르트가 고독한 사유주체를 발견하자마자 근대철학에서는 타자와의 소통이란 문제가 전면에 대두되었다고 했다. 스피노자가 중요한 이유는 그가 삶의 의지, 즉 코나투스라는 개념을 통해 소통의 가능성을 진지하게 숙고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스피노자와 함께 데카르트 이후 유럽의 근대철학계를 양분한 라이프니츠라는 철학자에게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스피노자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타자와의 소통 문제를 해명하려고 했다. 소통이란 문제를 풀어가는 라이프니츠의 방식은 재기 발랄하고 심지어는 기발하다는 인상마저 풍긴다. 그는 우리가 타자와 소통할 수 없고, 동시에 소통할 필요도 없는 존재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만드는 내용이다. 라이프니츠는 도대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 그의 설명을 직접 들어보자.


하나의 단자 Monad가 어떤 다른 피조물에 의해 그의 내부에 영향을 받거나 변화될 수 있는지를 설명할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단자들은 어떤 것이 그 안으로 들어가거나 그 안에서 밖으로 나올 수 있는 창문을 가지고 있지 않다. …… 모든 창조된 사물들을 개별자 각각에, 그리고 각 개별자들을 다른 모든 것에 결합 또는 순응시킨 것은, 모든 단순한 실체가 다른 실체들의 총체를 표현하는 관계를 포함하고 그 결과로 그는 살아 있고 영속하는, 우주의 거울이 되게 하는 결과를 낳는다.
≪단자론 The Monadology≫


라이프니츠를 잘 모르는 사람도 ‘창이 없는 모나드 windowless monad’라는 유명한 표현에 대해서는 어디선가 한 번쯤 들어보았을 것이다. 이것은 글자 그대로 우리와 타자 사이에는 소통할 수 있는 ‘창’과 같은 통로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창이 없는 모나드’라는 표현은 현대인들의 고독한 삶을 묘사하는 수식어로 자주 쓰이곤 한다. 그렇지만 오늘도 우리는 누군가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고,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기도 하며, 누군가를 미워하기도 하지 않는가? 만약 라이프니츠의 말대로 우리에게는 타자에게로 열려 있는 창이 전혀 없다면, 이런 일들은 도대체 어떻게 해서 발생하는 것일까?


라이프니츠의 복잡한 속내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분석명제 analytic proposition’와 ‘종합명제 synthetic proposition’를 먼저 구분할 필요가 있다. ‘분석명제’는 주어만 이해해도 참과 거짓이 결정되는 명제를 말한다. “총각은 결혼한 남자이다”라는 명제를 예로 들 수 있다. ‘총각’이란 주어의 의미를 안다면 누구든 이 명제가 거짓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반면 ‘종합명제’는 주어에 대한 이해를 통해서 참과 거짓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반면 ‘종합명제’는 주어에 대한 이해를 통해서 참과 거짓이 결정되지 않는 명제를 가리킨다. 예를 들어 “찌옹수는 결혼한 남자다”라는 명제를 보면, ‘찌옹수’라는 주어를 명확히 이해한다고 해서 그가 결혼했는지 혹은 그렇지 않은지를 확인할 수 없다. 이 명제의 참과 거짓을 결정하려면, 우리는 경험을 통해 확인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만약 결혼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이 확인되면 이 명제는 참일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이 명제는 거짓일 것이다. 요약하자면 분석명제가 참과 거짓을 결정하기 위해 경험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인 데 반해, 종합명제는 그 진위를 판단하기 위해 반드시 경험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라이프니츠는 ‘분석명제’와 ‘종합명제’라는 용어 대신 ‘필연적 진리 necessary truth’와 ‘우연적인 진리 contingent truth’라는 말을 더 자주 사용했다. 어쨌든 두 진리 사이의 구분은 인간이라는 유한자의 시선에서만 구분 가능하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었다. 이것은 신이란 무한자의 시선에서는 ‘분석명제’와 ‘종합명제’, 혹은 ‘필연적 진리’와 ‘우연적 진리’ 사이의 구분이 무의미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신의 입장에서는 모든 명제는 ‘필연적 진리’를 담보하고 있는 ‘분석명제’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개별적 실체에 대한 완전하고 완벽한 개념에는 그것이 가질 수 있는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술어들이 함축되어 있다. …… 그러므로 베드로와 유다에 대한 완전한 개별적 개념에는 그것에게 발생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갖추어져 있다. 그리고 이런 모든 것은 신이 알고 있다.
≪고트프리티 빌헬름 라이프니츠: 철학적 논문과 서신들 Gottfried Wilhelm Leibniz: Philosophical Papers and Letters ≫


라이프니츠는 주어가 될 수 있는 모든 개체의 내부에는 그에게 앞으로 붙여질 모든 술어가 미리 잠재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라이프니츠는 베드로와 유다의 경우를 예로 들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는 기독교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서 카이사르 Gaius Iulius Caesar (BC100~BC44)클레오파트라 Cleopatra (BC69~BC30)의 사례가 더 적절해 보인다. “카이사르가 클레오파트라에게 키스를 한다”는 명제를 생각해보자. 라이프니츠는 ‘카이사르’에게는 “클레오파트라에게 키스를 한다”라는 술어가 함축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마치 ‘총각’에는 “결혼한 남자다”라는 술어가 함축되어 있는 것처럼 말이다. 반대로 라이프니츠의 이런 생각은 클레오파트라의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그는 ‘클레오파트라’에도 “카이사르에게 키스를 허락한다”라는 술어가 함축되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다시 생각해볼 점은,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가 직접 키스를 한 적이 결코 없다고 라이프니츠가 주장한다는 점이다.


그의 생각에 따르면 단지 카이사르는 자신에게 함축되어 있던 “클레오파트라에게 키스를 한다”라는 술어를 실현한 것일 뿐이고, 동시에 클레오파트라 역시 자신에게 이미 함축되어 있던 “카이사르에게 키스를 허락한다”라는 술어를 실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라이프니츠의 ‘예정조화설 the doctrine of pre established harmony’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물론 카이사르나 클레오파트라는 자신의 입술로 자신의 의지에 따라 키스를 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라이프니츠는 이런 생각은 단지 인간의 유한한 시선에서만 가능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의 키스는 신이 예정한 것이라고, 다시 말해 카이사르나 클레오파트라를 창조할 때 그 속에 넣어둔 예정된 술어가 한번 실현되어 나온 것에 불과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라이프니츠는 우리가 타자와 소통할 수도 없고, 동시에 소통할 필요도 없는 존재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타자와의 사이에서 생길 수 있는 모든 행복과 불행은 새롭게 혹은 우연히 발생한 것이 결코 아니라, 우리가 탄생할 때부터 모두 신이 예정해놓은 질서에 의해 하나씩 실현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라이프니츠의 주장은 충격적이다. 아니 기이하기까지 하다. 우리 모두 홀로 영화관에 앉아 신이 만들어놓은 영화를 보고 있는 형국이다. 이 고독한 영화관이 바로 창이 없는 모나드였던 것이다. 타인을 보고 있지만, 그것 영상일 뿐이다. 꽃을 보지만 그것도 영상일 뿐이다. 전쟁을 목도하지만 그것마저 영상일 뿐이다. 놀라운 건 옆 영화관의 타자도 그렇게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우리가 느끼는 희로애락은 얼마나 덧없는 것인가? 우리가 세계라고 믿고 있는 것 또한 얼마나 황당한 것인가?


놀라운 것은 이런 기묘한 라이프니츠의 생각이 작동하는 세계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스마트폰과 컴퓨터 화면을 고독하게 응시하며 가상세계에 빠져 있는 우리의 모습을 떠올려보라. 실재세계는 모조리 증발하고 이제 이미지만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우리는 세계와 소통하고 있다고, 심지어 다 많이 소통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신의 예정조화설이 자본과 체제의 예정조화설로 현실화된 셈이다. 지금 우리는 라이프니츠의 세계에 빠져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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