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을 주는 타자와 연대하라."
자유로운 근대 도시 암스테르담이 데카르트만을 성장시켰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암스테르담이 자신의 모든 자유정신을 불어넣어 만든 탁월한 사상가는 데카르트라기보다 바로 스피노자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살마도 결국 스피노자 본인이었다. 스피노자의 가족은 스페인에서 종교 탄압을 피해 네덜란드로 이주했던 유대인, 즉 마라노 Marrano 였다. 그럼에도 스피노자 본인은 항상 네덜란드를 자신의 조국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만큼 스피노자는 네덜란드가 품고 있던 암스테르담이란 도시의 자유정신을 깊이 사랑했고 자신이 이곳에 머물게 된 것을 큰 행운으로 여겼다. 심지어 그는 1673년에 있었던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교수가 되라는 제안마저도 거부했을 정도였다. 아마 하이델베르크의 제안을 받았다면, 스피노자는 그곳에서 이단으로 박해받거나 아니면 암살되었을 수도 있다. 바보가 아닌 이상, 그런 위험한 곳으로 갈 리 없는 일이다.
암스테르담에서 데카르트가 고독한 사유의 주체를 발견했다면, 스피노자는 고독한 삶의 주체를 발견하게 된다. 사유가 아니라 삶이다. 스피노자는 우리의 삶은 육체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이 결합되어 영위된다고 보지 않는다. 오히려 사정은 그 반대다. 삶이란 하나의 실체의 두 가지 속성인 육체와 정신이니 말이다. 결국 삶이 없다면 정신도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스피노자의 사유는 데카르트가 기대고 있던 플라톤주의나 기독교 사상으로부터 가장 멀리 서 있게 된다. 정신 혹은 이성이 아니라 삶이 중심이 되는 순간, 육체는 잃어버린 권리를 되찾는다. 이것이 바로 스피노자 철학이 가진 의의라고 할 수 있다. 어쨌든 스피노자에게 삶의 주체란 자신의 삶을 유쾌하고 즐겁게 증진시키려는 의지, 즉 코나투스 Conatus를 가진 주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사실 이것은 인간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그에게 인간을 포함한 모든 사물은 "자신의 존재 안에서 지속하고자 노력하는 코나투스"를 "현실적 본질"로 모두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정신과 육체를 이원론적으로 파악했던 데카르트와는 달리 스피노자는 코나투스 개념을 통해 이제 정신과 육체를 통일적으로 설명하려고 시도한다.
코나투스가 정신에만 관계될 때에는 의지 voluntas라고 일컬어지지만, 그것이 정신과 신체 동시에 관계될 때에는 충동 appetitus이라고 일컬어진다. 그러므로 충동은 자신의 유지에 유용한 것에서 생겨서 인간으로 하여금 그것을 행하도록 하는 인간의 본질 자체에 지나지 않는다. 다음으로 충동과 욕망 cupiditas의 차이는, 욕망은 자신의 충동을 의식하는 한 주로 인간에게 관계된다는 것뿐이다. 따라서 욕망이란 의식을 동반하는 충동으로 정의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상의 모든 것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이 분명해진다. 즉 우리는 그것을 선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에 그것을 향해 노력하고 의지하며 충동을 느끼고 욕구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노력하고 의지하며 충동을 느끼고 욕구하기 때문에 어떤 것을 선이라고 판단한다.
≪에티카 Ethica in Ordine Geometrico Demonstrata≫
스피노자에게 코나투스는 정신에서는 '의지'로 드러나며, 정신과 육체를 포함한 실존의 전체 영역에서는 '충동'으로 드러난다. 자신의 삶을 보호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과 마주쳤을 때, 우리는 그것을 가지려고 할 것이다. 물이나 음식, 혹은 따뜻한 관심과 애정 등이 이런 사례가 될 수 있다. 이것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들의 본질적인 행동양식이기도 하다. 물론 스피노자의 말대로 자신의 의지나 충동을 의식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인간은 동물과 차이가 있다. 인간은 자신이 무엇인가를 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의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스피노자는 이런 경우 '충동'을 '욕망'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니까 인간이 가진 충동만은 욕망이라고 부르자는 것이다.
여기서 핵심적인 문제는 스피노자에게 코나투스나 충동, 혹은 욕망이 먼저이고 의식적인 판단은 그다음에 온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그의 말대로 "우리는 그것을 선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에 그것을 향해 노력하고 의지하며 충동을 느끼고 욕구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거꾸로 우리는 "노력하고 의지하며 충동을 느끼고 욕구하기 때문에 어떤 것을 선이라고 판단한다". 이처럼 사유보다는 욕망에 우선성을 부여하면서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에게서 상당히 멀리 벗어나게 된다. 데카르트는 의식적인 판단 혹은 사유가 우선적이고 의지나 욕망은 그다음에나 가능한 것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사유하는 것이란 무엇인가? 의심하고, 이해하며, 긍정하고, 부정하며, 의욕하고, 의욕하지 않으며, 상상하고, 감각하는 것이다.
≪성찰≫에 나오는 데카르트의 말을 통해 이 점을 잘 엿볼 수 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스피노자에게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사물이 가지고 있는 코나투스가 불변하는 실체와 같은 것이 결코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타자와 우발적으로 마주치면서 증가하거나 혹은 감소될 수 있는 역동적인 힘이었다. 이제 직접 스피노자의 말을 통해 그의 속내를 살펴보도록 하자.
우리는 정신이 큰 변화를 받아서 때로는 한층 큰 완전성으로, 때로는 한층 작은 완전성으로 이행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이 정념 passiones은 우리에 기쁨 laetitia과 슬픔 tristitia의 감정을 설명해준다. 그러므로 나는 아래에서 기쁨을 정신이 더 큰 완전성으로 이행하는 정서로 이해하지만, 슬픔은 정신이 더 작은 완전성으로 이행하는 정념으로 이해했다. 더 나아가 나는 정신과 신체에 동시에 관계되는 기쁨의 정서를 쾌감 titillatio이나 유쾌함 hilaritas이라고 부르지만, 슬픔의 정서는 고통 dolor이나 우울함 melancholia이라고 말한다.
≪에티카≫
이 대목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인간이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 "큰 변화를 받는다"는 스피노자의 생각이다. 고독하고 폐쇄된 사유 영역에서 벗어나 스피노자는 인간의 현실적 경험에서 자신의 사유를 전개하고 있다. 유한자로서 인간은 타자와 어떤 식으로든 마주칠 수밖에 없고, 거기에서 싫든 좋든 어떤 자극을 받게 된다. 당연히 이런 자극은 인간의 정신과 육체에 모종의 변화를 초래할 것이다. 스피노자는 타자와 마주쳤을 때 주체의 내면에 발생할 수 있는 변화를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원초적 감정 상태로 정리한다. 기쁨의 감정과 슬픔의 감정이 바로 그것이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정신과 신체를 포함한 인간의 삶에서 기쁨의 감정이 쾌감이나 유쾌함이라고 규정될 수 있다면, 슬픔의 감정은 고통이나 우울함이라고 표현될 수 있다.
기쁨, 쾌감, 혹은 유쾌함의 감정이 발생했을 때, 모든 인간은 자신의 삶의 의지가 증가되었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코나투스가 증진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스피노자의 생각에 따르면 삶의 주체가 코나투스의 증가를 지향하는 쪽으로 행동하고 실천하게 된다는 것은 필연적인 귀결이다. 바로 이 점에서 스피노자의 윤리학이 지향하는 바가 명료해진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의 코나투스가 증진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다시 말해 자신의 삶에 기쁨과 유쾌함을 가져다주는 타자와의 소통과 연대를 끈덕지게 도모하고 유지해야 한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생각해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인간은 타자와의 유쾌한 연대를 가로막는 일체의 부정적인 힘에 맞서 싸워야 하며, 동시에 자신의 삶에 슬픔과 우울함의 정서를 가져다주는 타자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막아야만 한다. 이 대목에서 스피노자의 윤리학은 필연적으로 정치학적 테마와 연결될 수밖에 없다. 코나투스의 윤리학이 네그리의 다중과 기쁨의 정치철학으로 연결되었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인간은 자신의 코나투스를 증가시키는 타자와의 관계를 포기하고, 자신의 코나투스를 약화시키는 타자와의 관계를 지속할 수 있다. 스피노자의 욕망 개념이 중요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욕망이란 의식을 동반하는 충동으로 정의할 수 있다." 바로 이 의식이 문제가 된다. 바로 이 의식이 코나투스, 혹은 충동을 왜곡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당연히 우리의 욕망도 왜곡될 수 있다. 자신의 코나투스를 지킬 수 없을 때, 의식은 인간 내면에 기쁨과 유쾌함의 감정을 순간적인 쾌감에 불과하다고 폄하할 수 있다. 일종의 신포도 전략인 셈이다. 높은 곳에 자란 포도를 따먹기가 너무나 힘들 때, 우리는 그 포도가 시기 때문에 따먹지 않는다고 자위할 수 있다. 한마디로 스피노자에게 의식은 일종의 정신승리 기능을 하는 것이다. 의식과 욕망의 잘못된 인식이 결국 우리의 본질인 충동과 코나투스를 적대시할 수 있다. 그렇기에 ≪에티카≫에는 인식론적 논의가 그렇게 많이 출현한 것이다. 의식의 잘못된 인식을 수정해서 우리로 하여금 코나투스를 긍정하는 삶으로 이끌려는 것, 이것이 바로 스피노자의 속내였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