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상학, 우리 시대 철학하기의 다른 이름
칸트는 우리가 '물자체'의 세계가 아니라 '현상'의 세계만을 알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이미 칸트에게서는 후설 현상학의 단초가 보이는 대목이다. 저기 멀리 서 있는 사과나무는 나와 무관하게 객관적으로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사과나무는 단지 우리의 의식이 구성한 것이라는 것, 이것이 바로 후설 현상학의 핵심 취지였다. 그는 모든 주관적인 것들, 그리고 모든 객관적인 것들을 우리의 의식 체험으로 환원하려고 한다. 나의 의식을 떠나서 사과나무는 존재할 수 없고, '나'라는 자아도 존재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객관이나 주관에 대한 일상적인 생각에 대한 판단을 중지하라! 그리고 생생한 의식 체험에 시선을 집중하라.
'현상학적 환원 phenomenological reduction' 혹은 판단중지라는 의미를 가진 에포케 epoché라는 말로 후설이 주장했던 것은 바로 이 점이었다. 의식 체험은 후설에 따르면 두 가지 측면을 갖는다. 하나는 순수한 의식 작용으로서의 노에시스 Noesis라면 의식 작용으로 구성된 대상으로서 노에마 Noema가 또 다른 것이다. 노에시스가 '지향성'이라면, 지향된 대상을 '노에마'라고 이해해도 좋겠다. 노에시스나 노에마는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즐겨 사용하던 '정신'을 의미한 '누스 Nous', 그리고 '안다'라는 의미의 '노에인 Noein'에서 유래한 말이다. 노에마가 있어서 노에시스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노에시스가 먼저 발생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 노에시스의 끝에 바로 노에마가 있는 것이다. 이처럼 후설이 개시했던 현상학적 운동은 생생한 의식 체험, 지향성, 그리고 노에시스에 대한 강조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항상 모든 것을 의식하고 있을까? 오히려 우리가 무엇인가를 의식할 때는 습관적으로 영위되던 친숙한 세계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만이 아닐까? 형광등을 의식할 때에는 그것이 고장 났을 때가 아닌가? 이런 의문을 던지면서 스승을 괴롭혔던 사람이 바로 그의 제자인 하이데거였다. 한편 마음의 지향성 자체가 순수하지 않다는 것, 그것은 신체적 경험이 없다면 불가능하다는 것을 밝혔던 또 다른 철학자도 등장했다. 그 사람이 바로 메를로-퐁티인데, 그의 신체 현상학은 이미 후설이 숙고했던 것을 바탕으로 전개된 것이다. 바로 후설이 말년에 숙고했던 '생활세계의 현상학'이 그 토대가 된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메를로-퐁티는 후설의 생활세계 현상학을 단순히 반복하지만은 않았다. 그는 생활세계의 현상을 통과해서 자신만의 독창적인 지평을 펼치려고 시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인박명이라고 했던가? 메를로-퐁티는 너무도 일찍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다. 하이데거, 셸러, 사르트르, 메를로-퐁티, 레비나스 그리고 데리다까지 탄생시켰던 현상학, 후설이 시작하여 20세기 유럽의 지성계를 휩쓸었던 현상학은 도대체 정체가 무엇일까? 하나의 공통된 전제를 갖고 있는 플라톤 학파나 칸트학파, 혹은 주자학이나 양명학처럼 같은 학파에 속해 있는가? 그러나 현상학자로 분류되는 다양한 사상가들을 살펴보면, 우리는 그들이 공유하고 있는 원리를 찾으려 해도 찾을 수가 없다. 심지어 현상학자들은 서로의 생각을 논박하기까지 하니, 현상학은 하나의 학파라고 부르기도 애매하다. 그렇다면 도대체 현상학은 무엇인가? 도대체 후설은 무슨 일을 했던 것일까? ≪지각의 현상학≫ 서문에서 메를로-퐁티가 고민했던 것도 바로 이것이다. 잠시 그의 이야기를 경청해보자.
"기술하는 것이 문제이지 설명하는 것과 분석하는 것이 문제인 것은 아니다. 후설이 초기 현상학에 하달했던 최초의 지령은 '기술 심리학 psychologie descriptive'이어여 한다는, 또는 '사물 그 자체로 aux choses même' 복귀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선 그것은 학문의 부인이다. 나 Je는 나의 신체 또는 '심리현상'을 결정하는 복잡한 인과관계의 결과나 교차가 아니다. 나는 나를 세계의 일부로, 생물학과 심리학 그리고 사회학의 단순한 대상으로 생각할 수 없고 나를 학문의 세계에 가두어둘 수 없다. 나는 내가 세계에 대해서 알고 있는 모든 것이, 비록 학문적 인식이라고 할지라도, 나의 관점 또는 학문적 상징들이 의미 없는 것으로 되지 않는 세계의 경험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고 있다. 모든 학문의 세계는 직접 체험된 세계 위에 세워지고, 만일 우리가 학문 그 자체를 엄밀하게 사유하고 그 의미와 범위를 정확하게 평가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우선 학문이 2차적 표현이 되는 세계의 경험을 일깨우지 않을 수 없다."
메를로-퐁티는 말한다. 현상학은 무엇보다도 통용되는 학문의 거부라고 말이다. 그러니까 대학에서 배운 것이나 혹은 타인의 가르침을 맹목적으로 따른다면, 이것은 형상학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일일 뿐만 아니라, 심지어 반현상학적 행위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메를로-퐁티 이야기에서 우리는 빈번히 등장하는 '나'라는 단어에 주목해야 한다. 나다. 너도 아니고 우리도 아니고 인류도 아니다. 그저 나다.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내가 경험한 것, 혹은 체험한 것을 긍정하고, 그걸 기술하는 순간 누구나 바로 현상학자가 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사랑 경험이 아무리 근사해도, 내가 겪지 않은 사랑에 대해 설명하고 분석하는 것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법이다. 사실 돌아보면 우리가 대학에서 배우는 것도 누군가가 겪은 생생한 체험과 그 체험에 대한 그의 기술에서 유래한 것일 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체험이지, 나의 체험은 아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그의 체험이 타당한 것인지 검토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바로 나의 체험일 뿐이다.
칸트의 철학을 잘 배워서 그걸 적용하는 건 현상학이 아니다. 오히려 칸트의 철학을 나의 체험으로 검증하고 판단하는 것이 현상학이다. 결국 현상학은 바로 철학이 아니라 철학하기였던 셈이다. 후설이 말한 노에시스와 노에마는 후설 본인의 체험이었던 것이다. 너의 경험과 체험을 기술하라! 이렇게 가르치는 순간, 후설의 모든 제자들은 후설에게서 멀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후설의 경험은 하이데거의 경험과 다르고, 메를로-퐁티의 경험과도 다르고, 셸러의 경험이나 데리다의 경험과도 다를 테니 말이다. 그래서 현상학자들의 사유는 그렇게도 달랐던 것이다. 어쨌든 현상학은 18세기 이후 대학에 포섭된 철학에 맞서 철학하기가 다시 사자후를 토한 현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건 칸트나 교수님의 생각이지요. 제 경험상 사랑과 정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바로 이것이 현상학이다. 20세기 서양은 다시 철학이 아니라 철학하기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결국 후설이 현상학의 방법이라고 역설했던 '에포케 epoche'는 '판단중지'라는 뜻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판단중지는 사실 가장 강력한 판단작동이었다고 할 수 있으니 말이다. 판단중지의 대상이 나를 제외하는 일체 타인의 생각이었다면, 이것은 결국 다른 누구의 생각도 아니라 자신의 생각만으로 사태를 판단하겠다는 의지의 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생각과 모든 관습을 판단중지할 수 있을 때에만, 혹은 다른 모든 판단을 중지할 수 있을 때에만, 우리는 자기의 힘만으로 사유하고 판단할 수 있게 되는 것 아닌가. 특히나 20세기 프랑스 철학이 서양철학의 동력으로 작동할 수 있었던 것도 그대로 사태에 직면해서 스스로 판단하겠다는 후설의 정신을 가장 래디컬하게 밀어붙였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메를로-퐁티, 데리다, 레비나스, 푸코, 알튀세르, 그리고 들뢰즈의 사유에 그토록 강력한 개성과 단독성이 빛났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던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