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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찌옹수 Oct 29. 2019

그림은 어떻게 우리를 흔드는가?

재현의 위기, 혹은 세잔의 고뇌


레오나르도 다빈치 Leonardo da Vinci (1452~1519)

레오나르도 다빈치 Leonardo da Vinci (1452~1519)의 그림에 우리는 감동한다. 어떻게 세상을 있는 그대로 담을 수 있었을까? 특히 그가 그린 많은 말 그림들을 보라. 말들은 금방이라도 그림에서 뛰쳐나와 우리에게 달려들 것만 같다. 보통 인문학에서는 재현 이란 말을 많이 사용한다. 글자 그대로 '다시 re' '표현한다 presentation'라는 의미다. 그러니까 저 평야에 달리고 있는 말을 그림으로 다시 표현한 것이니, 회화는 기본적으로 재현의 매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사실 엄격히 말해 3차원, 아닌 시간까지 포함한 4차원의 사물을 있는 그대로 그림으로 재현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미 캔버스나 도화지는 2차원의 평면이니까 말이다. 그러니 있는 그대로를 재현한다는 것은 정말로 탁월한 능력과 연습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니에프스 Niépce (1765~1833), 다게르 Daguerre (1787~1851)

재현된 것이 실제 대상과 거의 일치한다면, 우리는 경탄하게 된다. 재현의 능력과 기술! 미술에서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가장 중요시하는 것이다. "어머! 똑같네" "엄마를 정말 잘 그렸네" "너 그림에 소질이 있구나" 등등. 이런 입장이 바로 사실주의 realism다.  사실주의는 회화가 실제 reality를 그대로 화폭에 재현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주의 회화이론, 즉 재현이론은 19세기에 들어 완전히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1827년 프랑스의 화학자 니에프스 Joseph Nicéphore Niépce (1765~1833)가 사진술을 발명하면서 위기가 시작된다. 마침내 위기는 엄연한 현실이 되어버린다. 풍경화가 다게르 Louis-Jacques-Mandé Daguerre (1787~1851)가 1839년 8월 19일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사진을 찌었기 때문이다. 이제 화가가 세상을 근사하게 재현해도, "사진 같네!"라는 평에 만족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시각예술의 나라답게 프랑스의 화가들은 심각한 고민에 빠지게 된다. 사진이 할 수 없는 것을 하지 못한다면, 화가들은 더 이상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지 못할 테니 말이다.


모네 Claude Monet (1840~1926)

마침내 화가들은 탈출구를 찾았다. 1872년 모네 Claude Monet (1840~1926)가 그린 <인상, 일출 Impression, soleil levant>이라는 그림이 그 서막이 되었다. 물론 아직도 사실주의에 젖어 있던 주류 화가들은 모네의 그림을 혹평했다. 무언가 완성되지 못한 흐릿한 항구의 일출 풍경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모네는 사진이 결코 찍을 수 없는 풍광을 그림에 담는 데 성공한 것이다. 모네는 자신이 항구에서 받았던 인상을 화폭에 옮겨놓았다. 아마도 다른 화가였다면 다른 인상을 받았을 수도 있다. 바로 이것이다. 이제 자신이 받은 인상을 타인에게 전달할 수 있는 회화가 탄생한 것이다. 사실주의에 맞서는 이런 경향을 모네가 그림에 붙인 단어 '인상 impression'을 따서 인상주의 impressionism라고 부른다. 사실 동일한 실제에 대해서도 화가의 수만큼이나 다양한 인상들이 가능하다. 그러니 화가의 내면과 화가만의 고유성이 강조되는 시대, 즉 인상주의 시대가 활짝 열리게 된 것이다.


인상들의 다양성은 화가만의 고유성, 혹은 단독성에서 유래한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자기만의 역사를 가지고 역사를 만들며 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예를 들어 최근에 사랑하는 어머니와 사별한 화가가 있다고 하자. 공원에서 구걸을 하고 있는 할머니를 보았을 때, 그가 받은 인상은 그런 역사를 갖지 않은 화가의 인상과는 사뭇 다를 것이다. 또 이성만 보면 지나치게 수줍어하는 화가와 바람둥이 화가가 이성에 대해 갖는 인상은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결국 다양한 이상들에서는 '재현'의 논리보다는 '표현 expression'의 논리가 더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인상주의에서는 데생의 정밀함보다 색채의 풍성함을 더 선호할 수밖에 없다. 색채보다 화가의 내면 상태나 감정 상태를 잘 보여주는 것도 없으니 말이다.


베르나르 Bernard (1868~1941), 세잔 Cézanne (1839~1906)

사실주의에 따르면 화가는 정밀한 데생으로 사물들의 윤곽선을 그리고, 이어서 그 윤곽선들이 만든 면에 색을 칠해야 한다. 그러나 인상주의에 들어서면 이런 관계는 전복된다. 화가이자 미술평론가였던 베르나르 Émile Bernard (1868~1941)은 1904년 7월 잡지 ≪록시당 L'Occident≫에 기고한 <폴 세잔>이란 글에서 세잔 Paul Cézanne (1839~1906)의 말을 인용했던 적이 있다.


어떤 선도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조형법도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대조들만 존재할 뿐이다. 검은색과 흰색이 이런 대조들을 제공하지 않는다. 색 감각들이 대조들을 제공하는 것이다. 조형법은 색들의 완전한 관계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색들이 조화롭게 병치되고 모두 살아 있고 완전할 때, 그림은 저절로 입체적인 느낌을 갖는다. 데생과 색은 서로 그렇게 떨어지지 않는다. 색을 점점 칠할수록, 우리는 데생을 하고 있는 것이다. 색들이 더 조화로울수록, 데생은 더 엄밀해질 것이다. 색들이 가장 풍성해질 때, 형태는 가장 충만해진다. 데생과 조형법의 비밀은 색들의 대조와 친밀성에 달려 있다.


사진이 탄생한 해에 함께 태어난 세잔은 자신의 60년 인생을 인상주의라는 제단에 바쳤던 인상주의의 대가였다. 세잔을 통해 인상주의는 더 이상 비주류 화풍이 아니라, 시대를 풍미하는 주류 화풍으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사실주의에 맞서서 회화의 고유성을 지키려고 분투했던 인상주의 투사는 인상주의를 아주 간명하게 '색 couleur'이라는 단어 하나로 요약한다. 노련함과 완숙함이 아니라면 간명함은 불가능한 덕목일 것이다. 인상주의는 이론적인 틀로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느껴지는 감각 인상을 중시한다. "있는 그대로"의 자연은 어떻게 보일까? 세잔은 무엇보다도 먼저 그것이 색들의 세계라고 단언하고 있는 것이다. 보통 사실주의 화풍에서나 아카데미 실습장에서는 선을 먼저 그리고 색을 칠한다. 그러나 바로 이것이 이론적인 태도이고, 따라서 생생한 인상과는 무관하다는 것이 세잔의 입장이다.


색깔들이 대조될 때 윤곽선이나 선을 발견하는 우리 경험을 상기하는 것으로 세잔의 입장은 충분히 이해 가능하다. 설원에 흰색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래서 설원의 희색과 옷의 흰색이 대조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사람을 식별할 수 없다. 그 사람과 설원 사이에 윤곽선의 감각되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흰색 옷이 설원과는 다른 색조의 흰색이라면, 혹은 그의 검은 머리카락이 보였다면, 아니면 그의 홍조를 띤 얼굴이라도 보였다면, 우리는 그 사람을 금방 식별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색들이 대조될 때 윤곽선이 나온다는 것, 이것이 우리가 세상을 감각하는 방법이다. 그러니 세잔은 "색을 점점 칠할수록 우리는 데생을 하고 있다"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아직 세잔은 화가 개인마다 색 인상이 미묘하게 다를 수밖에 없다는 데까지 논의를 진행하지는 않고 있다.


고흐 Gogh (1853~1890), 고갱 Gauguin (1848~1903), 마티스 Matisse (1869~1954)

세잔 본인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자신이 얼마나 정직하게 자연이나 풍광이 주는 색 인상에 충실했는지의 여부였다. 그러나 고흐 Vincent van Gogh (1853~1890), 고갱 Paul Gauguin (1848~1903), 마티스 Henri Matisse (1869~1954) 등 세잔 이후의 인상주의를 이끌었던 화가들의 그림만 보더라도 인상주의 화가들은 아주 개성적인 색 인상을 가지고 있다는 걸 우리는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결국 색 인상은 내부와 외면의 마주침, 혹은 화가 자신의 본성과 외부 자연의 본성 사이의 마주침에서 결정된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만약 화가의 내면, 혹은 화가의 고유성을 강조하게 된다면 우리는 인상주의를 넘어서 표현주의라는 화풍에 이르게 된다. 표현주의 Expressionism에서는 외부나 자연은 우리의 내면세계를 드러내는 계기에 지나지 않는다. 외부나 자연에 의존하지 않고 더 과감하게 내면세계를 표현할 수 있는 길, 전시회를 찾은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추상화 Abstract Painting의 길은 이렇게 열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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