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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찌옹수 Nov 06. 2019

그림은 어떻게 우리를 흔드는가? [클레]

"선으로도 다른 세계를 표현할 수 있다."

클레는 선, 혹은 윤곽선이 가장 지적이라고 생각했던 통념을 와해시키고, 선마저도 표현의 매체로 승격시켰다. 이것이 바로 클레가 가진 고유성이다.



1940년 9월 26일 오전 10시 프랑스와 스페인 국경 마을 포르 부 Port Bou에서 우리 시대 가장 치열했던 인문주의자 한 명이 자살로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감한다. 바로 벤야민 Walter Benjamin (1892~1940)이다. 그의 유품 중에는 항상 그가 소장하던 그림 한 점이 있었다. 서양미술사에 조예가 깊은 사람이라면 그것이 클레 Paul Klee (1879~1940)의 수많은 천사 그림들 중 한 점, 벤야민 때문에 가장 유명세를 타게 될 운명을 가진 그림 한 점이라는 걸 알 것이다. <새로운 천사 Angelus Novus>라는 그림이다. 나치의 위협에 생명의 위협을 느낀 벤야민을 끝까지 지켜주었던 수호천사가 바로 클레의 천사였던 것이다. 얼마나 이 그림이 인상적이었던지, 벤야민은 서둘러 남긴 자신의 유고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Über den Begriff der Geschichte>의 9번째 테제를 아예 이 그림을 해석하는 데 할애하고 있을 정도였다.


클레가 그림 <새로운 천사>라는 그림이 하나 있다. 이 그림 속의 천사는 마치 자신이 응시하고 있는 어떤 것에서 금방 멀어지려고 하는 것처럼 보인다. 천사는 눈을 크게 뜨고 있고 입은 벌어져 있으며, 또 그의 날개는 펼쳐져 있다. 틀림없이 역사의 천사도 바로 이렇게 보일 것이다. …… 천사는 잠시 동안이라도 머물러 죽은 자들을 소생시키고 또 산산 부서진 것을 모아서 다시 결합하려고 한다. 그러나 천국에서 폭풍이 불어오고, 또 그 폭풍은 그의 날개를 옴짝달싹 못하게 할 정도로 세차게 불고 있기에, 천사는 자신의 날개를 더 이상 접을 수조차 없다.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지배자들, 혹은 승자의 역사에 맞서 억압받았던 대다수 사람들의 삶을 긍정하려는 벤야민 자신의 모습을 연상시키는 것이 바로 클레의 천사였던 것이다. 어쨌든 지상에 머물고 싶지만 폭풍우 때문에 머물 수도 없는 천사의 신세나, 사람들 편에 있어야 하지만 도주자 신세로 전락해버린 벤야민의 처지나 애처롭기는 마찬가지다. 전체주의와 자본주의에 맞서 인문주의를 지키려고 분투했던 벤야민은 그의 예민한 감성으로 클레가 자신과 같은 심장을 가지고 있다는 걸 직감했던 것이다. 그러니 그의 외로움도 클레의 그림에서 많은 위로를 받았을 것이다. 그런데 벤야민은 자신이 가장 좋아하던 화가 클레가 자신이 죽기 세 달 전, 그러니까 6월 29일 파란만장한 삶을 마쳤다는 것을 알았을까? 어쨌든 여러모로 1940년은 유럽 지성인들에게는 슬픈 해로 기억될 만하다.


나치 정권으로부터 퇴폐 화가로 낙인찍혀 정치적으로 억압받던 중 클레는 지병이었던 피부 경화증 scleoderma마저 악화되어 세상을 떠난 것이다. 하긴 사회민주주의를 지향하던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과 그 맺은 같이했던 예술학교 바우하우스 Bauhaus 의 교수였으니, 사회민주주의를 적대시했던 나치 정권이 바우하우스 교수를 가만히 내버려 둘 리 만무했다. 인상주의를 넘어서 표현주의를 표방했던 클레에게 전체주의는 정말 독가스와도 같이 치명적인 것일 수밖에 없었다. 전체주의는 자신의 체제가 영원한 것이라고, 그리고 개체들은 전체를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것을 창조해서 자기만의 단독성을 표현하려고 했던 표현주의자 클레! 이런 클레의 존재 자체가 전체주의자에게는 눈엣가시일 수밖에 없었다. 직접 클레의 예술혼을 느껴보도록 하자.


파울 클레의 <새로운 천사> (1920). 이 그림은 나치의 위협에 생명의 위협을 느낀 벤야민을 끝까지 지켜주었던 수호천사였다.
예술은 보이는 것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보이도록 만드는 것이다. …… 과거에 우리는 세상에 있는 가시적인 사물들, 우리가 즐겨 보거나 즐겨볼 수 있다고 여기는 사물들을 재현하곤 했다. 오늘 우리는 가시적인 것들 이면에 있는 실재를 드러낸다. 이렇게 우리는 가시적 세계란 우주와의 관계에서 볼 때 단지 고립된 사례라는 믿음, 그리고 수많은 다른 잠재적인 실재들이 존재한다는 믿음을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사물들은 더 넓고 다양한 의미를 갖는 것으로 종종 과거 합리적 경험과는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창조와 관련된 고백 Creative Confession≫

   1920에 작성된 이 짧은 글에서 클레는 예술이란 창조활동이라고 역설하고 있다. 예술은, 작게는 미술은 보이는 것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자신이나 주변 사람들이 보지 못했던 것을 "보이도록 만드는 것"이다. 긍정적으로 말해서 새로운 예술작품은 새로운 감각을 창시하는 것이다. 창조란 그런 것이 아닌가. 과거에는 없었던 무언가를 있도록 만드는 것이 창조니 말이다. 당연히 제대로 창조된 예술작품은 난해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현존하는 세계의 습관적 체계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도 도래할 새로운 세계에서나 이해될 수 있으니 말이다. 결국 하나의 예술작품은 살마들로 하여금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를 넘어서 다른 세계로 이행하도록 강요하는 힘을 갖는다고 하겠다. 그러니 나치 정권 입장에서 클레는 얼마나 불온한 존재로 보였겠는가? 현존하는 국가사회주의 정권마저도 극복되어야 할 것으로 사유하니 말이다.


1924년에 작성된 팜플렛 ≪현대미술에 관하여 Über die moderne kunst≫에서도 클레는 다시 한번 자신의 입장을 강조한다. "화가는 철학자가 되려는 의도가 있은 없든 철학자다. 그는 낙관론자들처럼 가능한 모든 세계 중에서 이 세계가 최선의 세계라거나, 모델로 삼기에 부적할 만큼 최악의 세계라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그는 다만 말한다. '현재 형태의 이 세계가 유일하게 가능한 세계는 아니다.'" 관념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가능한 세계다. 그러니 그것은 가시적인 세계가 아니다. 그러나 화가는 그 가능한 세계를 강하게 느끼고 있고, 그걸 형상화하는 작품을 만드는 것이다. 1933년 1월 30일 히틀러가 독일제국 통총이 될 때까지, 클레는 이렇게 가능한 세계에 대한 느낌을 회화로 창조하는 작업을 쉬지 않았다. 스스로 철학자를 표방할 정도로 클레는 상당히 지적인 화가로 보이지만, 사실 가장 감성적인 사람이란 걸 잊어서는 안 된다. 대부분 사람들이 가시적인 세계에 머물러 타성에 젖어 세상을 감각하고 있다면, 클레는 아직 가시적이지 않은 것을 온몸으로 느끼고 그것에 형상을 부여하려고 한 것이다.


'아직 가시적이지 않은 것', 그것은 들뢰즈의 표현을 빌리자면 감성에 포작 되지만, 정체를 모르기에 우리에게 해석을 강요하는 '기호 signe'와 같은 인식론적 위상을 갖는다. 느꼈지만 정체를 모르니 그 정체를 그림으로 형상화한 것, 이것이 바로 클레의 작품이었다. 그러나 전체주의가 집권했던 1933년에서부터 1940까지 대부분의 독일 사람들은 간과하고 있었지만 클레는 느끼고 있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전체주의의 핏빛 미래와 임박하는 대량살육에 대한 불길한 예감에 대한 것이었다. 당시 대부분의 클레 그림들이 어두워 보이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여기서 한 가지 첨언할 것이 있다. 벤야민이 가지고 있던 천사 그림은 나치 시절이 아니라 1920년에 그린 것이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되었지만, 더 큰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고 느낀 클레가 그린 예언적인 작품이었던 셈이다. 이 작품에 벤야민이 크게 공감했던 것은 그도 클레와 마찬가지로 파시즘의 대두를 위기 상태로 직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호처럼 느껴지지만 아직 가시적이지 않은 것이 있다. 이것을 가시화하려고 할 때, 그러니까 자신의 동요나 감정을 표현하려고 할 때, 클레는 선을 사용해 표현했다. 물론 클레는 세잔의 교훈을 잊지 않고 있었다. 색도 화가의 감정을 표현하는 수단이기에, 가시화의 작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걸 그도 충분히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바우하우스에 근무하던 1921년에서 1931년까지 클레의 강의 준비 노트에는 선뿐만 아니라 색의 사용법에 대한 수많은 고민의 흔적들이 나오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어쨌든 색도 중요하지만 일차적으로 클레가 고민했던 것은 선이었다. 그러니 그의 입장은 색들이 대조되면 윤곽선이 나온다는 세잔의 입장과는 명확히 구분되는 것이다. 선이 표현적 매체 중 가장 우선적이라는 입장은 다음 글에서 더 명확해진다.


추상으로의 경향은 데생에 본질적인 것이다. 육관에 한정된 회화적 가공물은 요정 이야기와 같은 성질과 아울러 동시에 대단한 정밀함도 달성할 수 있다. 회화작품이 더 순수할수록─데생을 기초하는 형식적 요소들이 더 강조될수록─가시적 대상에 대한 사실주의적 재현은 더 부적절하게 된다. 회화의 형식적 요소들은 점, 선, 면, 그리고 공간이다. …… 이것이 주어진 작품은 단지 이런 요소들로만 구성되어야만 한다는 걸 의미하지는 않느다. 차라리 이런 요소들은 형태들을 만들지만 그 과정에서 사라지지 않고 보존되다는 것이 중요하다.
≪창조와 관련된 고백≫


인상주의가 색의 추상으로 귀결하는 경향을 보이지만, 클레의 표현주의에는 데생, 즉 선의 추상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여기서 선이 지적이라면 색은 감성적이라는 통상적인 사실에 주목해보도록 하자. 나무가 회색 색조로 그려진 그림이 하나 있다고 하자. 그 윤곽선을 통해 우리는 그것이 나무인지 사람인지 지적으로 식별한다. 반면 그 회색으로 우리는 화가의 감정상태를 공감하게 된다. 이건 누구나 경험하는 일이다. 동일한 방이라도 벽지나 커튼의 색만 바꾸어도 우리는 전혀 다른 분위기, 과거와는 다른 감정 상태에 젖어드니 말이다. 그런 클레의 선은 지적이라기보다 감정적인 효과를 낳도록 고안된 것이다. 선의 굵기와 방향 그리고 속도감, 선으로 만드는 면의 크기와 모양 그리고 위치 등등은 우리에게 강한 감정적 효과를 남긴다는 것을 클레는 잘 알았던 것이다. 그러니까 사실주의에서 선은 지성과 관련된 것이라면, 클레에게 선은 감성과 관련된 것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인상주의든 표현주의든 미술에서 '추상'이란 단어는 지성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감성과 관련된 용어다. 철학이나 수학의 용례와 다르니 항상 주의해야 한다. 어쨌든 그래서 "회화작품이 더 순수할수록-데생을 기초하는 형식적 요소들이 더 강조될수록-가시적 대상에 대한 사실주의적 재현은 더 부적절하게 된다"는 클레의 말이 중요하다. 재현이 부적절하게 되어야 그림은 촤가의 내면과 역사, 혹은 감동적 동요를 유효하게 전달할 수 있다. 재현의 요소가 많으면 표현의 요소는 줄어들고, 반대로 표현의 요소가 커지면 재현의 요소는 그만큼 줄어들 수밖에 없다. 회화의 표현주의적 특성, 혹은 추상적 특성을 세잔은 색으로 전달하려고 했는데, 지금 클레는 선으로 그걸 시도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클레가 가진 고유성이다. 선, 혹은 윤곽선이 가장 지적이라고 생각했던 통념을 와해시키고, 선마저도 표현의 매체로 승격시킨 것이다.


이제 클레는 두 가지 표현 매체를 손에 쥐게 된 셈이다. 하나는 ,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이다. 선과 색은 클레의 그림에서 세 가지 관계 중 하나에 속하게 될 것이다. 하나는 선이 주는 강렬한 감정적 효과를 색이 증폭시켜주는 경우, 두 번째는 선이 주는 감정적 효과를 색이 억제하는 경우,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선이 주는 감정적 효과와 색이 주는 효과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는 경우일 것이다. 물론 선으로만 이루어진 클레의 데생 그림만으로도, 혹은 세잔의 방식으로 색을 대조해서 만든 색채 그림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감정적 충격을 받을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클레를 유럽 표현주의의 최상급 화가로 만든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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