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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찌옹수 Nov 11. 2019

그림은 어떻게 우리를 흔드는가? <고찰>

슈베르트의 선율에서 비트겐슈타인이 느낀 것


세잔, 클레, 로스코, 그리고 베이컨을 통해 우리는 그림이 함축하는 철학적 논리를 색과 윤곽선의 문제로 정리할 수 있었다. 특히나 여기서 공식으로 기억해두어야 할 것은 그림에서 색은 감성과 관련된다면, 선은 지성과 관련된다는 사실이다. 근사한 바닷가 풍광을 담은 한 폭의 그림이 있다고 하자. 윤곽선을 통해 우리는 화가가 무엇을 그렸는지 지적으로 이해하게 된다. 멀리 바다와 하늘이 만나는 수평선, 가까운 해변의 높다란 파도의 윤곽선, 그리고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는 절벽의 압도적 자태 등등, 한 폭의 그림에 담겨 있는 다양한 윤곽선들을 보면서 대부분은 안도감을 느낀다. 자신이 그림을 감상할 수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화가는 바다를 그린 것이고, 자신도 이미 바닷가에 가본 적이 있었다. 이렇게 그림에서 윤곽선을 읽어내는 데 성공한 지성은 편안함을 느낀다. 그렇지만 이 그림의 핵심은 윤곽선으로 할당된 면을 채운 색체에 있다. 예를 들어 수평선 부분이 어둡다면 무언가 더 안 좋은 일이 생기리라는 불안감이 들 것이고, 반대로 수평선 부분이 밝다면 어둠이 걷히듯 희망적인 일이 생기리라는 기대감이 들 테니 말이다.


아무리 윤곽선을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화가는 색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고 관객은 그 색을 통해 감동을 받는 법이다. 이것이 바로 그림, 즉 회화가 작동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무엇을 그렸는지 식별할 수 있는 윤곽선들이 그림에서 사라질수록, 화가의 그림은 재우들의 무관심에 방치될 수밖에 없다. 관객들은 색들의 향연만으로 바로 화가가 표현하고 싶었던 감정에 젖어들기 힘들기 때문이다. 물론 어느 예술가나 마찬가지로 화가도 관객과의 소통을 욕망한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화가에게 그러면 윤곽선을 풍성하게 그려서 관객과의 소통을 도모하라고 충고할 수는 없다. 그러나 윤곽선이 많아지고 정교해질수록, 색채의 힘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색채의 힘이 떨어지는 그림으로 화가는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다. 윤곽선에 사로잡힌 대중들은 색채가 어떻게 화가의 감정을 표현하는지 느끼기 힘들기 때문이다. 수평선의 어두운 색채를 통해 화가의 절망과 불안을 느끼기보다, 수평선의 윤곽선을 통해 관객들은 바다에 갔을 때 행복했던 과거 경험만을 떠올리기 쉬운 법이다. 정말과 불안을 전하려고 했는데, 윤곽선 때문에 희망과 행복이란 감정을 전하게 된 아이러니가 발생한 것이다.


모든 예술 장르가 그렇듯이 회화는 지성이 아니라 감성에 호소한다. 그래서 회화의 예술성은 근본적으로 선이 아니라 색에서 찾아야 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선, 특히나 대중들이 쉽게 식별할 수 있는 윤곽선을 풍성하게 사용한다면, 그림은 대중성을 얻겠지만 오해될 여지가 있다. 반대로 화가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색채를 풍부하게 사용하면, 그림은 예술성을 확보할 수 있겠지만 난해해서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 무관심의 대상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 선과 색 사이의 이율배반, 혹은 소통성과 표현성 사이의 이율배반이라고 할 만한 현상이다. 그러나 과연 이것은 회화만이 겪는 운명일까? 그렇지 않다. 이것은 모든 예술가와 그의 작품들이 겪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기 때문이다. 과거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예술의 양대 산맥은 그림과 음악이라고 할 수 있겠다. 바로 음악도 그림과 같은 이율배반을 겪는다. 그림이 선과 색 사이에서 이율배반을 겪고 있다면, 음악은 어떤 이율배반을 견디고 있을까? 다시 물어본다면 음악이 감당하는 소통성과 표현성 사이의 이율배반은 구체적으로 어떤 계기에서 드러나는가? 그것은 바로 가사와 선율 사이의 이율배반이다.


슈베르트 Franz Schubert (1797~1828)의 애절한 음악은 누구라도 한 번은 들어보았을 것이다. 여기서는 그의 수많은 명곡 중 말기 작품 3가지만 주목하도록 하자. 1827년에 작곡된 가곡 ≪겨울나그네 Winterreise≫, 1824년에 처음 작곡되어 1826년 최종 개작된 ≪죽음과 소녀 Der Tod und das Mädchen≫로 더 유명한 ≪14번 D단조 현악사중주 String Quartet No.14 In D Minor≫, 그리고 1828년에 작곡된 ≪A장도 피아노 소나타 Sonata in A Major≫(D.959)가 있다. 가곡 ≪겨울나그네≫는 뮐러 Wilhelm Müller(1794~1827)의 서정시를 가사로 사용하여 그것을 피아노 선율이 뒷받침하는 식으로 연주되고, 실내악 ≪죽음과 소녀≫는 '죽음과 소녀'라는 테마로 네 대의 현악기의 선율만으로 연주되다면, ≪A장조 피아노 소나타≫는 어떤 주제도 없이 피아노 솔로로만 연주된다. 당연히 대중들이 금방 이해하기 쉬운 곡은 가사 중심으로 이루어진 ≪겨울나그네≫일 것이다. 반대로 가장 이해하기 힘든 곡은 ≪A장조 피아노 소나타≫일 것이다. 결국 소통성이 강한 음악이 ≪겨울나그네≫라면, 표현성이 강한 음악이 ≪A장조 피아노 소나타≫라고 정리할 수 있겠다. 가사가 있는 가곡 ≪겨울나그네≫가 감상하기 어렵지 않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니 이것은 모두 지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가사 내용 때문에 생기는 착시효과가 아닐까?


전체 24개로 이루어진 ≪겨울나그네≫의 첫 번째 노래 <밤새 안녕 Gute Nach>의 가사를 옮겨보자.

"이방인으로 왔다 이방인으로 떠나네. 5월은 아름다웠네. 그녀는 내게 사랑을 속삭였고 그녀의 어머니도 결혼을 약속했지만, 이제 세상은 슬픔으로 가득 차고 길은 눈으로 덮였네. 너의 꿈을 방해하지 않도록, 너의 휴식을 방해하지 않도록, 나의 발자국 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살며시 문을 닫네. 지나는 길에 너의 집에 '밤새 안녕!'이라고 적으리라. 얼마나 너를 생각하고 있었는지 언젠가는 알 수 있도록!"

애잔한 피아노 선율을 배경으로 근사한 바리톤 가수의 노래를 들으면, 누구나 한 번쯤 이루지 못한 사랑을 떠올리며 상념에 잠길 것이다. 그러고는 이제 이곡에 담긴 슈베르트 본인의 정서를 알았다고 확신할 것이다. 이런 우리의 판단은 옳은 것일까? 정말 슈베르트는 이루지 못한 사랑 때문에 이 아름답고 애잔한 가곡을 작곡한 것일까?


여기서 우리는 슈베르트가 항상 죽음을 예감하며 살았던 것을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실제로 그는 30대 초반에 요절하기도 했다. 장티푸스로 죽었다고는 이야기하지만, 전해지기로는 친구와 사창가에 한번 들른 뒤에 발생한 매독 때문이라는 설도 파다하다. 매독으로 죽을 때 그 증상이 장티푸스와 비슷하다는 이야기도 있다. 어쨌든 육체적을 죽음을 예감했든 아니면 민감한 영혼답게 죽음을 직감했든, 슈베르트는 항상 죽음을 곁에 두고 살았던 사람이다. 현악사중주곡 ≪죽음과 소녀≫는 그 증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죽는다는 생각에 두려움을 느낀 소녀, 그리고 죽음이란 그렇게 무서운 것이 아니라고 설득하는 죽음의 신 사이에 대화가 벌어진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주목해야 할 것은 ≪죽음과 소녀≫가 1824년에 처음으로 작곡되었다가 1826년에 개정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1828년에 사망했으니, 죽기 2년 전부터 슈베르트는 다시 죽음과 죽음에 대한 공포, 그리고 나약하고 유한한 삶을 가슴에 품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겨울나그네≫의 가사를 음미해야 하고, 나아가 그 가사에 풍성한 감성적 색채를 부가하는 슈베르트의 피아노 선율을 들어야만 한다.


우리는 죽음의 신 앞에 무기력한 삶을 상징했던 ≪죽음과 소녀≫에서의 '소녀'가 ≪겨울나그네≫의 첫 번째 곡에서 화자를 사랑하고 그로부터 사랑받았던 '그녀'로 변주되고 있다는 사실을 직감하게 된다. 그렇지만 죽기 1년 전 슈베르트는 죽음과 삶에 대해 조금 다른 정서를 보이고 있다. ≪죽음과 소녀≫의 '소녀'는 죽음을 두려워하고 죽음에 저항하느라 자신이 살아 있다는 걸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겨울나그네≫의 화자, 즉 '겨울나그네'는 '그녀'로 상징되는 사랑과 삶을 긍정하며, 그것과의 이별을 담담하게 노래하고 있다. 겨울로 상징되는 죽음에 연연하기보다는 지금까지 잘 살았다는 만족감마저 피력하기까지 한다. 겨울처럼 가까운 죽음의 땅으로 떠나아만 하는 나그네였지만, 슈베르트는 지금까지 자신의 삶과 음악을 따뜻하게 회상할 정도로 담대해진 것이다. 심지어 그는 자신에게 '밤새 안녕'이라고 인사할 정도로 여유까지 생긴 것이다. 이렇게 슈베르트는 죽음과 삶을 화해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것은 그가 죽은 1828년 같은 해에 작곡된 ≪A장조 피아노 소나타≫에 더 적극적으로 드러난다.


서양음악의 교과서적 공식이 하나 있다. 단조 Minor는 슬프고 우울한 정서를 나타낸다면, 장조 Major는 반대로 밝고 유쾌한 정서를 나타낸다는 공식 말이다. 그렇지만 ≪A장조 피아노 소나타≫는 이 음악 공식을 조롱하고 심지어 좌절시키기까지 한다. 분명 장조로 작곡되었지만 이 피아노 소나타의 정서적 효과는 단조보다 더 단조스럽기 때문이다. 마치 웃으면서 눈물을 흘리는 것 같아, 그 슬픔이 거 배가 되는 느낌이 든다. 특히 두 번째 악장인 '안단티노 Andantino' 부분을 들어보라. 죽음과 삶의 화해이니, 눈물과 웃음의 화해일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그 눈물은 공포에 사로잡혀 절망적으로 터뜨리는 눈물이 아니고, 그 웃음은 천진난만하고 해맑은 웃음이 아니다. 오스트리아 빈에서 서양음악을 생활로서 경험했던 비트겐슈타인은 슈베르트의 이런 특이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문화와 가치≫에서 그는 "슈베르트의 장조는 종종 단조보다 더 슬프다"라고 이야기했던 적이 있다. 슈베르트의 은밀한 속내를 읽어낸 비트겐슈타인의 감수성이 빛나는 대목이지만, 그가 엄밀한 지성뿐만 아니라 예술적 감성마저 가지고 있었다고 부러워할 필요는 없다.


≪문화와 가치≫를 읽어보면, 비트겐슈타인이 처음부터 슈베르트를 들었던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55세 이전 그가 주로 듣던 음악은 브람스, 멘델스존, 브루크너,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등이었다. 이 시기에 비트겐슈타인이 비망록을 남길 정도로 주목했던 작곡가는 브람스, 멘델스존, 브루크너 정도였다. 그러나 1946년, 그러니까 그의 나이 58세 이후 비트겐슈타인은 처음으로 진지하게 슈베르트를 듣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그전에는 다양한 작곡가 중 한 명 정도로 다루어졌던 슈베르트가 이제 본격적으로 그의 성찰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때 비트겐슈타인은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긴다.

"슈베르트는 비종교적이며 우울하다."
"슈베르트의 선율들은 요점들로 가득 차 있다고 말할 수 있는데, 이런 말은 모차르트의 선율들에 대해서는 할 수 없는 말이다. …… 우리는 슈베르트의 멜로디의 어떤 지점을 가리키며 말할 수 있다. '보게나, 그게 바로 핵심일세. 여기에서 사고가 첨예화된다네.'"


비트겐슈타인은 1951년 4월 29일 6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그의 사인은 1950년 11월 25일 최종 진단된 전립선암이었다. 점점 노쇠해지고 아울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몸에 암세포가 자라는 동안, 비트겐슈타인은 슈베르트의 음악에 자주 몸을 맡겼던 것이다. 치통을 겪은 사람이 치통을 겪는 사람의 고통에 공감하기 쉽고, 지인의 죽음 경험한 사람이 동일한 경험을 하고 있는 사람의 고통을 위로할 수 있는 법이다. 그래서 "슈베르트는 비종교적이며 우울하다"는 판단에서 우리는 삶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태도를 엿볼 수 있다. 비종교적이면서 동시에 우울한 상태! 이것은 비트겐슈타인이 평생 떨치지 못했던 그 자신의 심리 상태 아닌가. 슈베르트와의 묘한 공감대를 느낀 뒤 "슈베르트의 장조는 종종 단조보다 더 슬프다"는 기록도 가능했던 것이다. 이 글은 1950년, 그러니까 그가 죽기 1년 전 62세에 작성한 것이다. 당시 비트겐슈타인은 죽음과 화해하고 있었던 슈베르트의 말기 작품들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실존적 상태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 가지 더, 슈베르트의 선율 안에 "사유가 첨예화되는" 요점을 찾아냈던 비트겐슈타인의 속내에 주목해보자. 우리는 장년과 말년의 비트겐슈타인이 다양한 언어 게임들이 분기되고 연결되는 지점을 더듬었던 언어철학적 작업에 몰두해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모차르트와 슈베르트에 대한 그의 언급은 매우 중요하다. 이것은 그의 청년기 언어철학과 장년기 언어철학 사이의 관계를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년의 주저 ≪철학적 탐구≫에서 그는 말했던 적이 있다. "우리는 마찰이 없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는 이상적인 조건인 미끄러운 얼음에 올라섰지만 동시에 바로 그 이유로 인해 걸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우리는 걷고 싶다. 따라서 마찰이 필요하다. 거친 땅으로 돌아가라!" 요점이 없이 미끈한 모차르트는 이상적인 천상의 음악일 뿐인데, 그것은 삶의 다양한 문맥을 보지 않고 빙판을 미끄러지듯 논리학에 매몰되었던 청년 비트겐슈타인의 모습과 유사하다. 반대로 요점이 있어 울퉁불퉁한 슈베르트는 삶이 이루어지는 거친 땅, 다양한 타자와 이질적인 문맥을 가진 삶의 지평을 강조했던 장년 비트겐슈타인을 닮아 있다.


모차르트와 슈베르트 사이의 차이! 혹은 청년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철학과 장년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철학 사이의 차이! 인공적으로 만들어져 미끈하기만 한 플라스틱 막대기와 옹이와 마디들로 거칠기만 한 나무 막대기 사이의 차이라고나 할 수 있다. 1951년 비트겐슈타인은 주치의의 집에서 주치의 부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세상을 떠나게 된다. 아마도 전립선암이 온몸에 퍼지는 순간 비트겐슈타인은 ≪겨울나그네≫나  ≪A장조 피아노 소나타≫를 휘파람으로 자주 불었을 것이다. 어린 시절 한 번 들은 교향곡은 휘파람으로 그대로 재연할 정도로 음악에 소질이 있었던 비트겐슈타인이었으니 말이다. 임종을 맞아 그는 슈베르트처럼 삶과 죽음을 화해시키는 데 성공했고 파란만장하게 펼쳐졌던 자신의 삶에 '밤새 안녕'이라고 인사할 정도로 담대했다. 의식을 잃기 바로 직전 비트겐슈타인은 침대 곁에 자신을 지키고 있던 주치의 부인에게 말했다고 한다.

"친구들에게 전해주세요. 나는 멋진 삶을 살았다고."


어쨌든 슈베르트의 음악은 가사와 선율 사이의 이율배반을 잘 보여준다. 대중들이 쉽게 식별할 수 있는 가사를 사용하면, 음악은 대중성과 소통성을 얻겠지만 오해될 여지가 존재한다. 반대로 작곡가 자신의 감정을 선율로만 전달하려고 하면, 음악은 예술성과 표현성을 확보할 수 있지만 난해한 작품이 되기 쉽다. 그래서 어쩌면 역설적이게도 ≪겨울나그네≫가  ≪A장조 피아노 소나타≫보다 듣기 몇 배가 더 힘든 것인지 모른다. 피아노 솔로의 애절한 연주로 선율만 제공하는 ≪A장조 피아노 소나타≫를 통해 우리가 지금 당장 슈베르트의 고뇌를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언젠가 그의 고뇌와 공명할 수 있는 날을 기대할 수는 있다. 반면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을 노래한다고 지성으로 이해된 ≪겨울나그네≫는 영원히 슈베르트의 고뇌를 멀리하도록 만들기 쉽다. 그래서 가사의 반주로 여겨지는 ≪겨울나그네≫의 피아노 선율이 ≪A장조 피아노 소나타≫의 선율처럼 슈베르트의 고뇌를 표현하고 있다는 사실이 영영 은폐될 수 있다.


사실 클래식 음악이 아니더라도 가사와 선율 사이의 이율배반은 모든 음악이 겪는 숙명과도 같은 것이다. 대중음악 중 트로트를 생각해보라. 이별의 서러움, 실향의 아픔, 늙음의 회한 등등 가사는 지적으로 보아도 다양하지만, 모든 트로트의 선율은 동일한 정서를 유발하지 않은가? 결국 궁극적으로 회화가 선이 아니라 색으로 발전하는 것처럼 음악도 가사가 아니라 선율을 지향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작곡자뿐만 아니라 청중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사실이다. 처음에는 가사가 있는 선율을 만들거나 듣다가, 점점 성숙해지면 가사가 없는 선율을 만들거나 들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결국 예술은 무언가를 식별하고 분류하는 지성이 아니라 느끼고 공감하는 감성을 중심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다. 간혹 지성이 감성을 환기시키는 데 도움이 되기도 한다. 슈베르트의 삶에 대한 정보가 그의 음악을 듣는데 도움이 되고, 6·25 동란이나 개발경제에 대한 정보가 트로트를 듣는 데 도움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 예술의 창조와 향유에서 지성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철저하게 감성이 들어서야만 한다. 결국 예술작품은 지성의 대상이 아니라 감성의 대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그림과 마찬가지로 음악도 제대로 향유하는 방법은 오직 한 가지뿐이다.


머리를 쓰지 말고 그냥 온몸으로 보고, 그냥 온몸으로 들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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