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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찌옹수 Nov 15. 2019

사랑은 하나가 되는 것인가?

"사랑해"라는 말의 내적인 논리


'사랑'이란 개념을 숙고하다 보면, 우리는 이 개념이 함의하는 것이 너무도 다채로워 당혹감을 느끼게 된다. 이성 혹은 동성에 대한 육체적 욕망에도,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지구 반대편 아이들에 대한 동정에도, 가족들에 대한 배타적인 관심에도, 심지어는 신과 같은 초월자에 대한 헌신에도, 모두 '사랑'이란 용어가 동일하게 사용되기 때문이다. 이런 혼란스러움을 정리하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 가장 친근한 사례를 통해 사랑의 내적 논리를 하나하나 해명하는 것이 제일 효과적일 것이다. 그럼 "너를 사랑해!"라는 평범한 말에서부터 출발해보자. 우리는 무엇을 표현하기 위해 이 말을 사용한 것일까? 겉으로 봐서는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고 헌신적으로 너에게 애정을 기울이겠다는 서약처럼 보인다. 하지만 "너를 사랑해"라는 표현의 진정한 의미는 "나는 '당신이 나를 사랑하기'를 원해일 수도 있다. 그래서 "너를 사랑해"라고 말한 사람은 설레는 마음에서건, 확신에 찬 마음에서건 상대방에게서 "나도 너를 사랑해"라는 말을 기대하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는 사랑에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는 것 하나를 짐작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내가 관심을 기울인 타자가 나를 좋아할 수도 있고 혹은 나를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는 '자유'를 가진 존재라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지금 내가 좋아하는 상대방 혹은 사랑하는 상대방인 타자는 언제든지 나를 버리고 떠날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사랑과 관련된 사르트르 Jean-Paul Charles Aymard Sartre (1905~1980)의 통찰이 빛을 발하는 것도 바로 이 대목에서이다.


사르트르 Jean-Paul Charles Aymard Sartre (1905~1980)
만일 내가 타자에 의해서 사랑을 받아야 한다면, 나는 사랑받는 자로서 자유로이 선택되어야 한다. 알다시피 사랑과 관련된 통상적인 용법에 따르면 '사랑받는 자'는 '선택된 사람'이라고 불린다. 그러나 이 선택은 상대적이거나 우발적인 것이어서는 안 된다. …… 사실 사랑에 빠진 자가 원하는 것은 사랑받는 자가 자신을 절대적으로 선택해야 한다는 점이다.
≪존재와 무≫


사르트르는 사랑에 빠진 사람이 원하는 것을 정확히 지적하고 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자신의 애인이 다른 일체의 외적인 압력 없이 자유롭게 자신을 사랑하기를 원하는 법이다. 하지만 타자가 자유로운 선택의 결과로 나를 사랑하게 되었던 것에는 비극의 씨앗이 잉태되어 있지 않은가? 타자가 나를 자유롭게 사랑할 수 있다는 것에는 언제든지 그 타자가 나에 대한 사랑을 자신의 뜻에 따라 자유롭게 철회할 수도 있는 가능성이 함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에 빠진 사람은 불가능에 가까운 소망을 품게 된다. 타자는 나를 자유롭게 사랑하지만 그러한 타자의 자유는 딱 한 번만 작용했으면 하고 바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상대방은 나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갖고 있지만, 나를 사랑하자마자 그 자유를 포기해야 한다고 믿는 것이다. 사르트르가 "사랑에 빠진 자가 원하는 것은 사랑받는 자가 자신을 절대적으로 선택해야 한다는 점이다"라고 지적했던 것도 바로 이런 달성될 수 없는 욕망을 잘 보여주고 있다.

라캉 Jacques-Marie-Émile Lacan (1901~1981)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다루지 못한 것이 있다. 그것은 우리에게 사랑이 찾아오는 이유이다. 나는 왜 어떤 사람을 특별한 사람으로 사랑하게 되는 것일까? 여기서 사랑에 대한 라캉 Jacques-Marie-Émile Lacan (1901~1981)의 설명을 들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 같다. ≪세미나≫ 8권에서 그는 "욕망과 그 대상 사이의 불일치" 때문에 사랑이 발생한다고 이야기했다. 사랑에 빠진 주체는 타자에게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켜줄 무엇인가가 있다고 상상한다. 이렇게 상상된 타자의 모습이 실제 타자의 모습과 부합되면, 사랑은 촉발되지 않는다는 것이 라캉의 근본적 입장이다. 그것은 마치 목이 마를 때 물을 마시는 것과 같아서, 욕망이 곧바로 충족되기 때문이다. 반면 상상의 모습이 실재의 모습과 일치되지 않을 때, 그럼에도 타자가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켜줄 수 있다는 상상에 계속 집착할 때, 사랑은 불꽃처럼 타올라 결코 꺼지지 않을 것처럼 강하게 빛을 발한다는 것이다. 사랑에 대해 라캉은 결국 욕망이란 것 역시 기본적으로는 '결여'를 전제로 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사랑은 우리가 특정한 타자를 특별한 사람으로 느끼고, 동시에 그 타자가 우리를 특별한 사람으로 생각해주기를 바라는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라캉을 통해 우리가 어떤 타자를 특별한 존재로 생각하고 사랑에 빠지게 되는 심리적 메커니즘을 살펴보았지만, 사랑과 관련된 가장 중요한 난점은 사르트르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타자로 하여금 나를 특별한 사람으로 생각하도록 강제할 수는 없다는 데 있다. 사랑에 빠지자마자 우리는 우선 자신뿐만 아니라 타자도 자유를 가지고 있다는 중요한 사실을 배우게 된다. 물론 우리는 타자를 노예처럼 만들어 나를 사랑하도록 강제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강요된 타자의 사랑은 거짓된 사랑이기 때문에 결코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지 못한다. 상대방의 자유가 아닌 강제된 복종을 통해 드러나는 사랑 표현을 누구라도 쉽게 진실인 것처럼 간주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처럼 사랑의 내적 논리에 근접하면 할수록, 우리는 타자의 타자성이란 문제가 사랑에 있어 심각한 난점을 던져주고 있음을 자각하게 된다.


사랑의 숙명은 우리가 자신만의 힘으로는 혼자 버려져 있다는 고독의 느낌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는 데 있다. 오직 사랑하는 타자가 손을 내밀 때만 우리는 고독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타자의 타자성 혹은 타자의 사랑의 열정을 가능하게 해 주면서 동시에 사랑을 비극으로 만드는 계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랑의 소설가 프루스트 Marcel Proust (1871~1922)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À la Recherche du temps perdu≫에서 묘사하고자 했던 것도 바로 이것이다.


연애할 때 발생하는 호기심 curiosité의 법칙을 간단하게 요약하려면 그것은 '눈결에 본 연인'과 '다가가서 애무한 연인' 사이에 놓여 있는 '차이의 최대 le maximum de d'écart'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옛날 창녀 집이라고 불리던 곳의 여인들, 아니 고급 창녀들마저도 (그녀들이 고급 창부라는 것을 알기만 한다면) 그다지 이 쪽 마음을 끌지 않는 것은, 그녀들이 다른 여인만큼 아름답지 않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는 탓이다. 획득하고자 하는 바로 그것을, 그녀들이 벌써 내맡기고 있는 탓이다. 이것은 승리의 획득이 결코 아니다. 이 경우 차이 écart는 최소이다. 창녀는 거리에서 벌써 미소를 지어오는데, 나중에 단둘이 되었을 때에도 그런 미소를 지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조각가다. 여인이 우리에게 나타낸 모습과 전혀 다른 조각상을 그녀에게서 얻고자 한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갇힌 여인 La Prisonnière>


'눈결에 본 여인'과 '다가가서 애무하는 여인' 중 누구에게 우리는 호기심을 갖게 되는지 프루스트는 자문자답하고 있다. 여기서 물론 '눈결에 본 여인'은 나의 눈결을 사로잡을 정도의 매력은 가지고 있는 여인이다. 그렇지만 이런 여인이 너무나 아름답고 매력적인 고급 창부보다 더 마음이 끌리는 이유는 두 여인 사이의 '차이' 때문이다. 그리고 그 차이를 결정하는 것이 바로 자유라고 할 수 있다. 돈으로는 얻을 수 없는 여인과 돈으로 쉽게 잠자리를 함께 할 수 있는 여인! 두 여인 사이에는 바로 자유의 유무가 존재했던 것이다. 프루스트의 통찰은 자유와 관련된 사르트르의 속내를 거의 그대로 반복하고 있다. 상대방이 자유롭게 나에게 복종하기를 원하는 아이러니한 욕망을 사랑에 빠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를 사랑할 수밖에 없게 되면, 혹은 나의 욕망에 완전히 '갇힌 여인'이 된다면, 상대방에게서 자유는 신기루처럼 사라진 것 아닌가?


애인이 자유롭기에 구속하려고 했는데, 애인을 구속하자마자 사랑이 식어버리는 역설! 애인에게서 자유를 뺏은 순간, 사랑도 식어버리는 역설! 이 역설은 우리가 사랑의 딜레마에 빠져 있다는 걸 보여준다. 생각해보라. 누군가를 사랑할 때 상대방 역시 자신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면, 사랑의 열정은 우리에게서 금방 식어버릴 것이다. 반대로 누군가를 사랑할 때 상대방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자신이 사랑에 빠진 것을 비극으로 경험하게 될 것이다. 원리적으로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타자의 자유를 부정하여 사랑의 비극을 피할 것인가? 아니면 타자의 자유를 긍정하면서 사랑의 비극을 감내할 것인가? 전자의 길을 따랐던 살마이 바로 헤겔 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이라면, 후자의 길을 따랐던 사람이 바로 바디우 Alain Badiou (1937~)였다고 볼 수 있다.


헤겔 Friedrich Hegel (1770~1831), 바디우 Alain Badiou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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