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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나의 그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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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정윤 Apr 19. 2020

칫솔에 의지하며 앞으로 나아가기

내게 딱 맞는 칫솔이 필요한 이유

우산 없이 길을 걷다가 갑자기 쏟아지는 비를 맞는 것처럼 살다가 아무런 예고 없이 혼란스러운 일이 찾아올 때가 있다.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비가 내리면 눈에 보이는 아무 건물로 들어가 잠시라도 피할 수 있지만 삶에서는 어디로 내달린다고 피할 수 없으니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앞으로 계속 전진해야 한다.


내게 그런 순간이 오면 여태 계획했던 일과 희망에 부풀었던 꿈과 개인적인 발전과 열심히 꿈꿨던 미래는 빠르게 사라지고 원초적인 욕구만 남게 된다. 프로는 혼란 속에서도 맡은 일을 일사불란하게 처리하겠지만 인생의 아마추어인 나는 모든 게 버거워진다.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서 생리적 욕구만이라도 스스로 잘 해결하기 위해 온 힘을 쏟는다. 흐릿한 미래보다 앞에 닥친 현실에서 벗어나지 않으려 악착같이 매달린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이때는 오로지 잘 자고 잘 먹고 잘 배설하는 일에 집중한다. 날마다 반복되는 작은 생활들이 무너지지 않게 최선을 다하며 일상을 유지하는 것, 그 자체가 거대한 임무가 된다.


'질'보다는 '양'이라는 생각으로 열심히 버틴다. 밥에 국만 말아먹어도 원래 먹었던 횟수와 비슷하게 먹으려고 한다. 생각이 꼬리의 꼬리를 물고 늘어져 도저히 잠이 오지 않아도, 잠들었다가 중간에 일어나도, 수면의 질이 좋지 않아도 최소 4시간 정도는 자려고 애쓴다. 누워서 자지 못하면 엎드리거나 의자에 앉아서 존다. '어떻게' 보다는 먹고 자는 행위 '자체'에 집중한다.


생리적 욕구를 잘 채워주기 위해서는 씻는 것도 중요하다. 21세기에는 사람이 가만히 있어도 자동으로 씻겨주는 기계가 있으리라 기대했는데 아쉽게도 현재 그런 제품은 없다. 캡슐만 먹어도 배가 불러 씹는 행위 없이 살아가면 좋겠지만 그것도 아니기에 억지로 몸을 일으켜 화장실로 향한다.


외출하고 돌아오면 기운이 쪼옥 빠져서 눕기만 하면 스위치를 끈 것처럼 잠으로 빨려 들어갈 때가 있다. 그러면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져 나를 어둠에서 끌어낸다. 갑자기 눈이 번쩍 떠지면서 생각이 계속 이어진다. 지금 닦지 않고 자면 치과에 갈 일이 높은 확률로 생길 것이고 그러면 시간적 육체적 정신적 에너지를 거기서 또 소모할 것이고 나는 지금도 버겁고 거기까지 신경 써야 할 남아있는 에너지는 없으니 어쩔 수 없이 일어나 입에 칫솔을 문다.


집에 누가 사놓은 새 칫솔 중 하나를 골라 사용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자신이 선호하는 칫솔을 선택해 구입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칫솔은 그저 칫솔일 뿐이라 생각했는데 사려고 보니 어찌나 종류가 다양한지. 한 박스에 들어있는 개수도 다르고 생긴 모양도 가지각색이다.


칫솔 손잡이에 미끄럼 방지 고무가 붙어있는 것, 매끈한 것, 고무가 길게 붙어있는 것, 엄지 손가락 닿는 부분만 고무가 붙어있는 것, 미세모, 황금색모, 숯모, 캐릭터가 달려있는 것, 없는 것, 끝이 뭉툭한 칫솔모, 뾰족한 칫솔모, 입 안에 넣고 세 번만 휘저으면 다 닦일 것 같은 크기의 칫솔모, 세로로 긴 칫솔모, 가로로 넓은 칫솔모, 친환경 칫솔 등 가격만 보고 선택하기에는 너무도 광범위한 세계가 거기에 있다.


이 세계에서 내가 우선시하는 기준은 칫솔 헤드의 크기다. 칫솔 헤드가 크면 어금니나 사랑니가 있는 부근까지 닿지 않고 작으면 닦으면서 화가 난다. 도대체 언제까지 닦아야 돼?


다른 물건은 사용해보고 맞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게 주거나 중고로 팔 수 있는데 칫솔은 잘 못 선택하면 꺼낸 제품을 제대로 쓰지도 못하고 버려야 한다. 계속 쓸지 안 쓸지는 칫솔이 어금니를 스치는 순간 느낄 수 있다. 어금니까지 칫솔모가 부드럽게 들어가면 성공이다. 한 번 골라둘 때 은근 신경 쓸 게 많아 번거로워서 그렇지 다음에는 골랐던 제품만 쓰면 되니까 오히려 시간도 단축되고 내게 맞는 제품을 사용하니 만족도가 높다. 스스로 나를 챙겨주는 느낌도 들어서 뿌듯하다.

 

반쯤 감긴 눈으로 칫솔질을 한다. 내게 딱 맞는 칫솔을 움직여 거품을 낸다. 세심하게 골라놓은 칫솔은 거슬리지 않고, 거슬리지 않으니 신경 쓸 일도 없고, 신경 쓸 일이 없으니 얽혀있던 생각들도 잠시 사라진다. 닦다 보면 입안이 개운해져서 덤으로 상쾌한 기분도 든다.


재빨리 자리로 돌아와 누웠던 자세를 다시 취하며 켜 둔 스위치를 끄면 그날의 임무는 완벽하게 끝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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